1908년 3월, 중국의 서쪽 끝 돈황 막고굴에서 서류뭉치가 발견되었다. 막고굴의 장경동(藏經洞)에서 였다. 장경동은 지금의 제17굴에 해당하는데, 말 그대로 ‘경전이 보관되어있던 굴’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그 안에는 수 만 본의 문서와 그림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들 서류뭉치 속에 뒤섞여있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진가를 알아본 이는 바로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였다.

사르나트 성지, 중앙의 철책 안에 아쇼카석주의 부러진 기둥이 보관되어 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왕오천축국전’을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두루마리 형식인 왕오천축국전의 앞부분 3분의 1이 손상돼 책 제목도 지은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해진 두루마리의 내용을 살펴보던 펠리오는 얼마 전 읽었던 책을 떠올렸다. 바로 혜림(慧琳 737~820)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이다.

이 책은 경전의 용어를 해설해 놓은 일종의 불교용어사전이다. 이 책에 인용된 왕오천축국전의 단어들이 두루마리 뭉치에 언급된 단어들과 일치하고 있음을 펠리오가 알아차린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다. 만약 천재 동양학자 펠리오의 놀라운 기억력이 없었다면 왕오천축국전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두루마리는 혜초가 직접 쓴 것은 아니라, 후대 누군가가 혜초의 글을 보고 필사한 것이지만 말이다.

사르나트 아쇼카석주의 기둥머리

돈황에서 그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것은 너무나도 기쁜 일이지만, 책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6000여자만 남아있다는 사실은 큰 아쉬움이다. 이 문서의 성격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왕오천축국전의 초고로 보는 의견, 둘째는 왕오천축국전을 줄인 축약본이라는 의견, 마지막은 왕오천축국전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보는 의견이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혜초(慧超, 700?~780)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그가 신라인이라고 적고 있는 문헌은 사실 없다. 다만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오행시만이 그가 신라인임을 암시한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남방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계림’은 ‘신라’로 국호를 변경하기 전의 신라의 다른 이름이다.

바로 이 부분, 즉 그의 고향 계림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그리움을 담은 구절만이 그가 신라인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다만 원문에는 ‘誰爲向林飛’이라고 적혀 있어, 이 때 ‘림’이 꼭 계림을 지칭하는 것이냐는 반론도 있지만, ‘(고향)계림’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고, 언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중국에서 인도로 출발할 때가 723년, 귀국한 때가 727년이니 햇수로 5년 동안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을 여행했음은 분명하다. 이후의 그의 생애는 기록을 통해 간간히 알 수 있을 뿐이다.

인도 여행 후 733년부터 스승인 금강지(金剛智, 671~741)에게서 밀교를 배웠다. 740년 금강지가 입적한 후에는 불공(不空, 705~774)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의 6대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리고 780년 무렵 오대산으로 들어가 입적했다. 혜초는 당시 밀교의 대가였던 금강지와 불공에게 밀교를 배우고, 당시의 밀교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밀교 승려였던 것이다.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은 말 그대로 인도의 5개 나라를 다녀와 쓴 글이다. 물론 인도만 둘러 본 것은 아니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도 다녔다. 모두 44개 지역이다. 대부분 혜초가 직접 가보고 적은 글이지만, 일부는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도 있다. 특히 지금의 페르시아, 아랍, 동로마까지 다녀왔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햇수로 5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모두 섭렵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가 밟았던 노선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책은 폐사리국(吠舍釐國)에서 시작한다. 지금으로 치면 인도의 바이샬리에 해당한다. 책의 끝에 등장하는 지역은 중앙아시아 서역북도에 위치한 언기국(焉耆國), 즉 카라샤르이다. 시작이 인도인 것을 보면 출발할 때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7~8세기 인도로 향한 구법승은 해로를 많이 이용했다. 그는 10대 후반 약관의 나이에 광둥항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크메르(지금의 캄보디아)를 경유하여 수마트라섬(인도네시아)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수마트라섬에는 슈리비자야 왕국이 있었다. 이곳에서 수개월 혹은 1~2년 정도를 머물고 인도의 벵갈만을 지나 천축국에 도착했다. 그는 슈리비자야 왕국에서 상당기간 머문 뒤 인도(천축)에 갔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천축의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였다.

왕오천축국전 앞부분

인도에 도착한 혜초는 44개 지역을 답사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혜초는 각 지역에 이를 때 마다 풍속, 언어, 종교, 산물과 그 나라의 정세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8세기 전반 혜초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인도불교는 침체하여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고,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되어 유지하기 어려운 곳도 있었다고 한다. 나체 생활의 풍속, 감옥은 없고 벌전(罰餞)만 있는 법률, 장(醬)은 없고 소금만 있으며, 여러 형제가 아내 한 사람으로 같이 사는 것 등 색다른 여러 풍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왜 인도로 갔는가? 물론 승려인 혜초가 ‘불법 구하기’가 목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목적은 여덟 탑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의 오언시는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급기야 마하보리사(大覺寺)에 도착하고 나니 내 본래의 소원에 맞는지라 너무나도 기뻤다. 내 이러한 뜻을 대충 오언시로 노래한다. … 여덟 탑을 보기란 참으로 어려운데, 오랜 세월을 겪어 거지반 타버렸으니, 어찌 보려는 소원 이루어지겠는가. 하지만 오늘 아침 바로 내 눈앞에 있구나.’

그가 말하는 여덟 탑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석가모니 사리를 팔등분하여 인도 각지에 세웠다는 근본팔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도의 8대 성지를 일컫는 것이다. 석가모니 일생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8곳의 성지를 그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바람이 그를 머나먼 인도로 이끈 것이다.

인도 화폐 루피

8대 성지는 석가모니가 나고 자란 카필라바스투,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첫 설법한 사르나트(녹야원·鹿野苑), 기적을 보인 쉬라바스티(사위성·舍衛城), 도리천에서 내려온 장소인 상카시아, 영축산이 있는 라즈기르(왕사성·王舍城), 원숭이가 꿀을 바친 바이샬리(사진 3), 열반에 든 쿠시나가라이다. 이 가운데 사르나트에 도착한 혜초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위에는 사자가 있는데, 그 기둥은 아주 커서 다섯 아름이나 되며, 결이 섬세하다. …탑을 만들 때 이 기둥도 같이 만들었으며…’. 혜초가 본 네 마리 사자가 장식된 아쇼카 석주는 인도의 화폐인 루피에 등장할 만큼 유명한 조각이다.

이 석주는 마우리아왕조(기원전 321~185)의 제3대 왕 아쇼카(기원전 272~232)가 석가모니의 첫 설법 성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잘 다듬어진 높이 12.8m의 돌기둥인데, 기둥 몸통은 부러져 현장에 있고, 위에 올려졌던 기둥머리 장식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혜초의 여행기간은 햇수로 5년이다. 중국 승려 법현이 12년(399~410), 현장이 17년(627~643), 의정은 18년(671~689) 점을 상기하면 긴 기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여행기는 법현의 ‘법현전’,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함께 3대 여행기로 꼽힐 만큼 중요하다. 8세기 전반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직접 다녀왔던 신라승 혜초가 그의 고향인 신라로 다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또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이 땅에 없지만, 신라승 혜초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그 무엇보다 크다.

◆ 임영애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 경주대 실크로드연구원을 이끌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전통사찰운영위원회와 경상북도, 강원도 등의 문화재 위원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불교 조각사를 주로 연구한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서역불교조각사’ ‘교류로 본 한국불교조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