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가 미술 시장에까지 영향을 끼쳐 호황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과 주목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회화, 조각, 사진, 서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력과 감성을 갖춰 나름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연예인 작가들이다. 미술을 정식으로 배운 사람들은 아니지만, 평소 그들의 주체할 수 없는 끼를 각자의 작품으로 표출하면서 특유의 스타일을 구축한 케이스가 많고, 대중적으로 인기도 얻고 있다.
그림의 매력은 간단하다. 보는 재미는 차치하고, 행위로서의 미술은 그리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다. 연예인 화가들이 따로 배우지 않고도 척척 해내는 것은, 그만큼 내재된 감정들이 많다는 것으로도 풀이해볼 수 있다.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이유로 파인아트에 빠져드는 스타들은 점점 늘고 있다. 대중에 공개되고 개인전 등을 열기도 하는 스타들은 조영남, 하정우, 구혜선 정도. 이들은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팬층도 두텁게 확보하고 있어서 개인전이 가능하다. 최민수, 김혜수, 심은하 등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지는 않지만 가끔씩 작품을 선보이는 스타들도 있다. 이들은 경매나 아트페어 특별전에 작품을 내는 형태고 본인의 작업을 대중에게 공개한다.
작품으로 명성을 쌓아야 하는 일반 작가와 달리 연예인 출신 작가는 이름이 알려진 상태에서 시작하는 데다 사회적으로 네트워크가 잘 갖춰져 있어서 본인의 그림을 알리기에 매우 유리하다. 그러나 연예인의 작품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아주 인기가 있거나 관심이 없거나, 두 가지 중 하나다. 연예인의 의외의 모습에 점수를 주는 경우도 있고, 깊이 없는 작품인데 단지 스타라는 이유로 과대평가되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림은 결국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에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단, 연예인 화가의 작품이 실제로 거래되는 것을 보면 하나의 패턴이 있다. 점점 연예인 작가의 전시가 많이 열리고 실제로 미술품 거래도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대작보다는 소품이 인기가 있다. 관계자들은 이를 두고 “전문 컬렉터가 아니라 대중이 소비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본다. 대체로 연예인 화가의 작품은 투자를 위해 사는 사람은 드물고, 해당 연예인의 인기가 시들해질 경우 그림값이 유지된다고 보장하기 어렵다.
원조 그림 그리는 연예인 가수 아니고 화수 조영남
그림 그리는 연예인 중 실매매에서 최고 대접을 받는 작가는 화투 작가로 알려진 조영남이다. 그는 1973년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지금까지 40여 차례 개인전과 단체전을 가졌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고 고교 시절 미술반장을 지낸 것이 전부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하게 작업을 하면서 본인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여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그림값도 제대로 책정되어 있다. 조영남은 한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그림의 가격은 일체 손을 안 댄다. 갤러리에 능력대로 팔라고 한다. 객관적으로 1천만~2천만원 정도 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호당 50만원 선으로 웬만한 중견 작가를 뛰어넘는 판매가다.
조영남의 작품은 화투 등 일상적 소재를 이용한 팝아트 스타일이다. 미술계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을 경매로 진행한 적이 있는 서울옥션은 “출품된 모든 작품이 완판됐고, 1천만원 이상에 판매된 작품도 있었다”고 전했다. 큐레이터 김연희는 “조영남의 작품 가격은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유명 교수,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혜수, 심은하 작품 500만원 선에 형성 다른 배우들도 이름값 하는 중
배우 김혜수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그녀는 지난 2009년 서울오픈아트페어에서 작품 하나를 500만원에 팔았다. 익명을 요구한 수집가가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한다. 수묵화에 빠져 있다는 심은하의 작품은 2009년 비공개 경매에서 낙찰 하한선이 500만원에 형성되기도 했다. 유명세 덕분에 일반 화가보다 높은 가격에 그림이 팔리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현대미술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장르다. 연예인이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비판할 것은 못 된다. 하지만 연예인들이 작품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전시를 열어서 좋은 성과만 얻는다면 평생 작업에 몰두하는 작가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미술 시장에서도 완판남 충무로 대세 하정우
배우 하정우는 지난 2004년부터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잭슨 폴록과 장 미셸 바스키아 등의 작품을 따라 그리면서 하정우의 독특한 작품 세계가 시작됐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개인전을 열었고, 미국 뉴욕과 홍콩에서도 전시회를 열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지난해 3월 뉴욕 전시에서는 작품 16점이 모두 팔려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촬영으로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속도는 가히 프로급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방 촬영을 가면 현장에서도 그림을 그릴 정도로 애착이 커서 작품도 많다. 지금까지 전시 공개한 작품만 100점이 넘는다.
하정우의 그림 역시 조영남 못지않게 높게 책정되어 있다. 알려진 바로는 호당 20만~30만원 선. 최근 한 전시에서 최고 1800만원에 판매된 것이 알려져서 주목을 끌기도 했다.
하정우와 전시를 몇 차례 진행한 경험이 있는 갤러리 관계자는 “정확한 가격을 밝힐 수 없지만, 전시 작품 중에서 1500만원 이상에 판매된 경우도 있었다”며 하정우의 작품은 일반 컬렉터들에게도 인기가 좋다는 사실을 전했다. 충무로 대세인 그는 갤러리에서도 대세로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하고 있다.
몽환적이고 자유로운 작품으로 인기 팔방미인 구혜선
구혜선은 2009년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의 두 번째 개인전 이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와 국제 아트페어 홍콩 컨템퍼러리에 초청 작가로 참여할 만큼 화가로서 인지도가 상승하고 있다. 구혜선의 작품은 자유분방한 기질의 드로잉과 공예가 특징인데, 배우는 물론 가수, 작곡가, 영화감독, 소설가에서 화가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녀의 성향이 잘 묻어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혜선의 그림값은 호당 10만~20만원에 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자, 조명 등 공예품은 점당 수백만원에 팔리고 있다고 한다.
스타의 그림, 작은 것이 더 잘 팔린다?
연예인 화가는 그림값이 형성되고 작품이 팔리는 과정이 일반 작가들과 조금 다르다. 국내 미술 시장에서 신진 작가는 호당 5만~10만원, 중견 작가는 20만~30만원 선에서 가격이 책정되지만 연예인들은 예외 조건이 있다. 미술계에서는 길지 않은 시간을 보낸 하정우와 구혜선의 작품은 각각 호당 20만~30만원, 10만~20만원 선에서 팔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예인 화가의 작품은 개인전 말고도 자선 경매 같은 비영리 행사를 통해 많이 소개되고 팔린다.
외국의 스타들도 그림 그리기 열풍?
비틀스 출신의 폴 매카트니, 밥 딜런, 데이비드 보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등 외국의 스타들도 그림을 즐겨 그린다. 미술 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않았더라도 쉽게 접할 수 있고 자유로운 측면이 많아서 연예계 생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연예인들이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다.
연예인이 예술가로서 권위를 획득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스타와 예술가는 공생관계를 통해서 명성을 얻는다. 유명인은 예술가가 가진 문화적인 자본을, 예술가는 유명인의 사회적인 자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스타의 예술 활동은 자신의 문화적 자본 가치를 높이는 노력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대중이 미술을 소비하는 방식은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전시회에 가서 그림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직접 작품에 참여하거나 그림을 사는 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연예인 예술가가 나오고 이들의 작품을 찾는 사람들도 늘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