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발생한 백혈병 등 질병 문제가 9년 가까운 진통(陣痛) 끝에 사실상 타결됐다.
삼성전자와 피해자 가족, 시민단체 등은 12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법무법인 지평 사무실에서 반도체 직업병과 관련한 '재해 예방 대책'에 최종 합의했다. 향후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 추가로 직업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사·감시하는 '옴부즈만위원회' 구성 등에 대해 3자(者)가 합의한 것이다.
이번 합의는 직업병의 원인이나 책임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당사자와 전문가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아낸 새로운 모델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삼성 반도체 문제, 첫 전원 합의
3자 간 합의를 중재한 것은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였다. 반도체 문제의 세 협상 주체인 삼성전자, 피해자 가족 및 시민운동가 등으로 구성된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가족대책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는 지난 1년간 조정위를 통해 협의를 벌여왔다. 조정위원장인 김지형 전 대법관은 "과정이 순탄하진 않았지만 당사자들의 양보에 힘입어 결국 원만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이번 합의에 따라 서울대 법대 이철수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3인의 전문가가 '옴부즈만위원회'를 구성한다. 위원회는 2018년까지 3년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작업 환경에 대한 종합 진단을 벌인다. 진단 결과를 바탕으로 개선안을 마련하고 추후 이행 상황도 정기적으로 점검하기로 했다. '반도체 직업병 문제'는 2007년 3월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 여직원이었던 황유미씨가 급성백혈병으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이후 전·현직 직원들의 소송과 보상 요구가 잇따랐다. 삼성전자는 1000억원의 기금을 조성해 작년 9월부터 가족대책위를 비롯한 100여명의 피해자에게 보상을 마친 상태다. 다만 피해자 가족 2명, 시민운동가 등으로 구성된 반올림은 "삼성의 일방적인 사과와 보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양보·합의로 갈등 해결
첨예하게 갈등을 빚어왔던 세 협상 주체가 핵심 쟁점인 재해 예방 대책에 합의한 것은 삼성뿐 아니라 우리 산업계 전체에도 모범적인 선례(先例)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삼성은 사태가 장기화되자 2014년 12월 피해자 가족들과 협의를 거쳐 김지형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민간조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조정위는 1년여간 중재를 진행한 끝에 '평행선'을 달리던 재해 예방 대책 부분에 최종 합의를 이끌어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와 백혈병 발병 간에 명확한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1000억원이란 거액(巨額)을 보상비 등으로 내놓은 것도 사태 해결에 기여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차원에서 당사자와 가족들의 아픔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수 있도록 지원과 위로를 다한다는 취지였다. 실제로 산업 재해 신청과 행정소송 등을 통해 '산업 재해'를 인정받은 삼성 반도체 직원은 7명이지만, 삼성으로부터 보상을 받은 직원은 지금까지 100명을 넘는다.
갈등 관리 분야 전문가이자 사회학자인 박길성 고려대 대학원장은 "한국 사회에서 갈등 문제가 장기화되는 것은 서로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 의무는 피하기 때문"이라며 "삼성전자가 만든 새로운 모델이 한국의 다른 기업이나 산업 분야가 직면할 수 있는 재해·갈등 문제 해결의 좋은 모범 사례이자 매뉴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