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두 시간을 기다렸는데 왜 우리 딸은 안 봐주는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다른 환자 상태가 심각해서요." "우리가 먼저 왔는데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예요!"

응급 환자의 보호자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머리가 찢어져 몇 바늘 꿰매야 하는 여자아이의 아빠였다. 20대 후반 남자 인턴이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 와중에 옆의 간호사는 내출혈로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중환자의 혈압과 심박수를 1분마다 그 인턴에게 보고했다. 병원장 소개로 진료 받으러 왔다는 또 다른 중년 남자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인턴이 바빠 대접이 시원찮다"며 불평했다. 의사의 낯빛이 점점 붉어졌다.

인턴 의사들은 대부분 포기하지 않고 완강한 ‘환자 배우’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인턴들은 때때로 당혹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배우들은 웃지 않았다.

지난 15일 오후 1시 30분쯤 서울아산병원 시뮬레이션센터에서 진행된 '신입 인턴 임상술기(術技) 교육' 현장 모습이다. 인턴 의사를 뺀 모든 사람이 '가짜'였다. 중환자는 마네킹이었고 간호사, 보호자, 중년 남자는 각자 역할을 연기하는 의료 전문 배우들이었다. 주로 환자를 연기하기 때문에 '표준화 환자(SP·standardized patient)'라고 불리는 이들은 병원에서 의사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실제처럼 연기해 체험 교육을 돕는다. 이날 다른 교육실의 표준화 환자들은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만취 환자', '도뇨관(소변줄) 삽입을 두려워하는 환자' 등을 연기했다.

표준화 환자들은 개별 의대나 지역별 의대 연합체에 등록돼 있는 연기자다. 전국적으로는 수백 명 규모다. 모집 공고를 내면 주로 현역 연극·방송 배우나 퇴직 교원, 주부들이 지원한다. 선발되면 특정 역할에 대한 교육을 10시간 이상 받고 정식 활동을 시작한다. 의대나 병원은 교육 필요에 따라 이들 중 '60대 남성 복통 환자' '30대 여성 빈혈 환자' 등 구체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 연기자에게 일을 맡긴다. 14년째 표준화 환자를 해오고 있는 전문 연기자 남기주(63)씨는 "그간 (연기로) 아플 수 있는 곳은 거의 다 아파봤다"고 말했다.

원래 표준화 환자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의료직업군(群)이다. 1960년대 미 남가주대학 하워드 배로스 교수가 표준화 환자 개념을 개발해 신경외과 수업에 처음 도입했으며, 이후 1980년대에 미국 전역 의대에 퍼졌다. 우리나라에는 1990년대 후반 들어왔다.

표준화 환자는 연기자이면서 평가자다. 그들 대부분은 의대 정규 교육과정 중 하나인 '진료 수행 평가(CPX)'에 참가한다. 우선 모의 진료실에서 의대생에게 미리 정해진 증상을 말한다. 그리고 의대생이 적절한 후속 질문을 던지는지, 환자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지, 환자의 고통에 공감했는지 등을 평가한다. 해당 의대생에게 직접 피드백을 주기도 한다. CPX는 2009년부터 의사 국가시험 실기평가에도 포함돼 왔다. 8년 차 표준화 환자 유영복(58)씨는 "평가를 하려면 단순히 연기력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며 "연속으로 네다섯 명씩 만나는 의대생들의 특성을 각각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도 비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표준화 환자들은 보통 한 번에 3~4시간씩 연기하고, 시간당 1만5000~2만원을 받는다. 대부분 부업으로 한다. 개인 사업을 한다는 표준화 환자 김모(37)씨는 "돈을 번다기보다 의료 봉사활동 한다고 생각하면서 병원에 온다"고 말했다.

반면 한 고참 연기자는 "여기저기 불러주는 데가 많아 한 달에 적어도 열 번은 한다"며 "연기 실력도 키우고 용돈도 챙기니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박주현 울산의대 의학교육학교실 교수는 "표준화 환자를 이용해 짤 수 있는 시나리오는 '한국어 못하는 외국인 환자'부터 '성병에 걸려 서로 싸운 부부'까지 무궁무진하다"며 "각 상황마다 의사가 환자에게 공감하고 그를 납득시키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에 실제 진료 능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