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올해 중학교 2학년에 진학하는 딸을 둔 윤모(51)씨는 딸의 새학기 과학 교과서를 넘겨보다 머리를 갸우뚱했다. 사람의 침에 함유돼 녹말을 분해하는 소화효소가 '아밀레이스'라고 돼 있었다. 윤씨는 "우리 때만 해도 '아밀라아제'라고 배웠기 때문에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봤더니 둘 다 표준어로 나와 있었다"며 "시험에서도 두 단어 모두 정답일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지난 수십년간 공인돼 써온 일부 과학 용어가 최근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바뀐 후, 무엇이 바람직한 표기인지 논란이 일고 있다. 과학계, 교육부, 국립국어원의 입장이 각각 다르고, 일선 교사들조차 새 용어를 모르거나 헷갈려 하고 있다.
교과서에 아밀레이스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2009년이다. 아밀레이스는 국제 학명인 'amylase'를 영어 발음으로 옮긴 것이다. 예전 용어인 아밀라아제는 독어식 발음이다. 용어 변경의 근거가 된 생물 교과 편수 자료를 2004년 책임 집필한 김남일 춘천교대 과학교육과 교수는 "독어식 발음은 일제 때 일본 교과서를 통해 들어온 것"이라며 "국제 학회에서 영어로 소통하는 현실을 반영해 영어 발음으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2013년엔 화학원소 이름이 독어식에서 영어식으로 바뀌었다. 현재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원소 주기율표를 보면 '요오드'였던 원자번호 53은 '아이오딘'으로, 25번 '망간'은 '망가니즈'로 바뀌어 있다. 이 밖에 음식점에서 많이 쓰이는 부탄가스의 '부탄'은 '뷰테인'으로, 온실가스인 '메탄'은 '메테인'으로 각각 변경됐다.
"독어식이냐 영어식이냐" 학계 논쟁
생물학계에서는 바뀐 용어를 둘러싸고 이견이 분분하다. 지난해 8월 한국생물과학협회(이하 생물협회)가 발간한 생물학 용어집에는 새 용어 아밀레이스를 이전의 아밀라아제로 표기했다. 2001년부터 5년간 생물협회 생물학 용어 심의위원장을 맡았던 박은호 한양대 명예교수는 "일제 때부터의 관행상 맞는 게 아니라, 독일 학자들이 처음 발견한 효소이기 때문에 명칭의 선점(先占) 원칙에 따라 독어 발음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라며 "2004년 편수 자료 발간 당시 이 같은 의견을 냈는데 어째서 교과서 용어가 그렇게 바뀌었는지 황당하다"고 말했다.
당시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부) 교과서 편수 담당관이었던 한 고교 교감은 이에 대해 "생물협회 얘기도 들었지만 대한화학회에서 용어의 표준화·영어화를 강력히 주장해 과학 교과의 통일성 차원에서 생물 용어도 일부 영어식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그때 생물 교과 편수 자료의 연구 책임자로 영어식 표기를 도입한 김남일 춘천교대 교수는 현재 생물협회 산하 학회인 한국생물교육학회 회장이다. 생물학 전공의 한 교수는 "교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고 말했다.
국립국어원은 2008년 표준국어대사전에 교과서 편수 자료에서 바뀐 과학 용어들을 수록했다. 영어식 명칭이 표준어로 인정받은 셈이다. 그러나 독어식 용어도 여전히 사전에 있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과학계에 통일된 의견이 없는 만큼 구(舊)용어를 표준어에서 배제하기엔 무리"라고 말했다.
주관식 문제에 '망간' 써도 정답
교육현장에서는 교사들이 새 용어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경기도 한 고등학교에서 생물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여모(43) 교사는 "20년 가까이 '리파아제(지방 분해 효소)' '말타아제(맥아당 분해 효소)'로 가르쳐오다가 하루아침에 '라이페이스' '말테이스'로 바꿔 가르치려니 헷갈려 고생했다"며 "어떤 고참 교사들은 예전 학습자료를 계속 쓰며 옛 용어로 가르치기도 한다"고 말했다. 올해 6학년을 가르치는 2년 차 초교 교사 이모(30)씨는 "(용어가) 그렇게 바뀌었다는 걸 처음 듣는다"고 말했다.
정답이 '망가니즈'인 과학시험 주관식 문제에 '망간'이라고 쓰면 어떻게 될까. 중학교 과학교사 손모(37)씨는 "해당 개념을 몰라서 잘못 쓴 게 아니기 때문에 정답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객관식 선지에 '망가니즈'만 있고 '망간'이 없다고 해서 "정답이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지금 학교에서는 '망가니즈'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국가기술자격시험에선 아직도 독어식 용어를 사용한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출제 담당자는 "산업현장에서는 다수가 예전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뷰테인 같은 영어 용어를 쓰면 이해가 어렵다"고 말했다.
독어식 용어들은 언론에서도 널리 쓰인다. 과학고 화학교사인 이모(43)씨는 "언론에 '메탄 하이드레이트(고체 에너지 자원)' '포름알데히드(방부제)' 등의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용어는 '메테인 하이드레이트' '폼알데하이드'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뭐가 맞느냐고 묻는다"고 말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장기적으로 보면 현 교과서 용어대로 통일되는 게 바람직하다"며 "지금은 과도기"라고 말했다.
입력 2016.03.05. 03:00업데이트 2016.03.0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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