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그때 그 만화영화는 어떻게 끝났을까?'에서는 완결이 난 1980~1990년대 수입 TV 만화영화를 추억해봤다. 이번에는 국산 만화영화다. 한국 최초의 TV 만화영화인 '떠돌이 까치'부터 1999년 방영한 '검정고무신'까지, 아이들의 웃음을 책임졌던 작품을 꼽아보고 결말을 알아보자.
한국 TV 만화영화 태동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제작한 최초의 장편 만화영화는 1967년 '홍길동'으로, 만화가 신동우가 '소년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풍운아 홍길동'을 형인 신동헌 감독이 영화화했다. 그 후 1976년 '로버트 태권 V' 개봉으로 이어지면서 국산 극장용 만화영화는 흥행의 맛을 봤다.
[한국 최초 애니 극장용 '홍길동' 41년 만에 복원]
극장용 만화영화가 떠오르는 사이 국산 TV 만화영화는 침묵 속에 있었다. 우리나라에 TV가 귀한 시절이라 수익성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투자가 없으니 만화 종사자들도 일본 업체 하도급으로 참여해 벌이를 이어갔고, 수입 작품이 TV 편성표를 장악했다.
국산 TV 만화영화 시장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꿈틀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위상 재고 명목으로 정부가 만화영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KBS 1TV에서 1987년 어린이날 특집으로 방영한 ‘떠돌이 까치’를 필두로 국산 TV 만화영화 제작의 신호탄이 올랐다.
한국 최초 TV 만화영화는 '떠돌이 까치'
1987년 KBS 1TV에서 이현세 작가의 만화책 '떠돌이 까치'를 80분짜리 장편 만화 영화로 제작해 어린이날 특집으로 방영했다.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떠돌이 생활을 하던 까치(주인공)가 해동중학교 야구부에 들어간 이후를 그린 한 편의 성장 만화다. 결말은 까치가 경쟁자이자 동료인 마동탁과 함께 야구부를 우승으로 이끌고, 새어머니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면서 행복해지는 내용이다. 아쉽게도 짝사랑 상대인 엄지하고는 끝까지 이뤄지지 않는다.
원작은 만화가 김수정이 월간 잡지 '보물섬'에서 1983년부터 10년간 연재한 '아기공룡 둘리'. KBS 1TV에서 6부작으로 제작해 방영했는데, 인기가 높아 이듬해 속편 7부작을 제작했고 199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재방영했다. 2008년에는 26부작의 새로운 시리즈가 제작되기도 했다. 30년간 사랑받아온 국산 만화영화는 둘리가 전무후무하다.
아기 공룡 둘리가 어느 날 갑자기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있는 고길동 아저씨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깐따비아별 출신 도우너와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타조 또치, 고길동 아저씨의 어린 조카 희동이까지, 악동 4명의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여준다. 이들은 도우너가 가진 타임머신(타임코스모스)으로 우주여행을 하거나, 고길동 아저씨를 괴롭히기도 한다. 시즌1 마지막 화에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 둘리가 엄마를 만나게 되고 정착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희동이가 타임머신과 연결된 끈에 둘리를 묶어놓는 바람에 둘리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서 끝난다.
[서른셋에 낳은 '아기 공룡 둘리' 지금도 그 아이가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아 ]
만화가 이진주의 하니 시리즈 중 하나를 KBS 2TV에서 1988년 13부작 만화영화로 제작해 방영했다. 여중생 하니가 홍두깨 코치를 만나 어머니를 여읜 슬픔을 딛고 육상 선수로 거듭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달려라 하니’는 시기적절하게 서울 올림픽 개최와 맞물려 방영했다.
결말은 하니가 마라톤 대회에서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으로, 순위와 상관없이 끝까지 해내는 스포츠 정신이 돋보였다.
인기에 힘입어 다음 해 제작된 ‘천방지축 하니’는 스포츠 종목도, 인물 관계도 새로이 설정되면서 속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원작은 이두호 작가가 기독교계 어린이 잡지 ‘새벗’에서 연재한 ‘도사님 도사님 우리 도사님’. MBC에서 1989년 80분짜리 장편 만화영화로 제작했다. 애니메이션 전문가 송락현 저서 '애니스쿨'에 따르면, 방영 당시 시청률 54.9%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첫 작품이 흥행한 덕에 다음 해 ‘머털도사와 108요괴’와 ‘머털도사와 또매’라는 새 시리즈가 나왔고, 2012년에는 EBS에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머리털에 신통력이 깃든 머털이 자신의 스승을 죽이고 마을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일당에 맞서 싸워 이긴다. 그리고 과거에 스승과 함께 살던 산꼭대기로 돌아간다.
원작은 허영만 작가가 1989년 월간 잡지 '만화왕국'에서 연재한 '미스터 손'. KBS 2TV에서 1990년 시즌1 2부작을 시작으로 2001년 13부작의 시즌5까지 방영했다. ‘날아라 슈퍼보드’는 한국에서 제작한 TV 만화영화 중 가장 성공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날아라 슈퍼보드’는 일일 최고 시청률 56.9%를 기록해 역대 TV 만화영화 시청률 순위에서 1위에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가수 김수철이 부른 “치키치키 차카차카 초코초코초”로 시작하는 주제가도 큰 인기였다.
중국 고전인 '서유기'를 모티브로 삼은 점에서 일본 만화영화 ‘드래곤볼’과 설정이 겹치는 부분은 있으나 전개 내용은 판이하다. 또한, 국내 첫 TV 방영은 ‘날아라 슈퍼보드’가 ‘드래곤볼’보다 10년이나 앞선다.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 그리고 삼장법사가 함께 다니면서 요괴를 물리치는 내용이 기본 구조다. 1998년 시즌4부터 손오공이 흰 헬멧을 벗은 채로 나오고, 사오정의 무기가 바뀌는 등 캐릭터에 변화가 생긴다. 그래서 그런지 시즌3 최종화를 결말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시즌3에서는 손오공 일행이 붉은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붉은 수염을 기른 대마왕을 쓰러뜨린 뒤 저팔계가 함께 약을 팔러 다니자고 제안하며 끝난다.
원작은 배금택 작가가 1989년 만화 잡지 '아이큐 점프' 출간과 동시에 연재한 '열네 살 영심이'. 1990년 KBS 2TV에서 13부작으로 방영했다. 중학교 1학년생인 영심이는 첫 화부터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라고 읊조리는 사춘기 소녀다. 친구들 간 시샘과 우정, 그리고 영심이를 좋아해 쫓아다니는 왕경태와 풋풋한 로맨스 등 14세 다운 고민을 코믹하게 그린 성장 만화다.
게다가 영심이는 오빠와 언니, 막내 여동생 사이에 낀 셋째인데, 다자녀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화도 흥미진진하다. 부부싸움 후 냉랭해진 아버지와 어머니를 영심이가 주도해 화해시키면서 성숙해진 영심이를 보여주며 이야기가 끝난다. 왕경태와 관계는 열린 결말로 둬 아이들의 상상에 맡겼다.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라는 노래를 부르던 캠핑, 만남의 장소였던 빵집 등 ‘영심이’에서 당시 10대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매화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각색해 보여주는 형식으로 KBS 2TV에서 시즌2까지 방영했다. 1990년 제작된 시즌1에서는 배추도사와 무도사가 13개의 전래동화를 전해준다. 이듬해 26부작의 시즌2에서는 별나라 소녀 은비와 도깨비 소년 까비로 이야기꾼이 바뀐다. 한 회마다 다른 전래동화를 보여주는 것이 주된 목적이므로 결말은 따로 없다.
가수 조갑경이 청아한 목소리로 부른 ‘은비 까비의 옛날 옛적에’ 주제가도 사랑을 받았다.
KBS TV 만화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황은주 作)을 토대로 KBS 2TV에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한 해에 한 시리즈씩 총 31화를 방영했다. 낮에는 몽땅 빗자루, 밤에는 도깨비가 되는 꼬비와 김서방으로 불리는 인간 소년인 깨동이가 주인공으로 그 둘이 힘을 합쳐 악당을 물리치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인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바탕으로 하며, 민간 신앙에 등장하는 도깨비를 친숙한 이미지로 끌어냈다.
악역 중에서는 시즌 2에 등장하는 '망태 할아버지'가 돋보였다. 망태 할아버지는 말썽쟁이 아이를 망태 속에 넣어 잡아가는 도깨비다.
KBS 1TV에서 1996년 방영한 26부작 만화 영화로 원작은 김재원 작가의 ‘큐라큐라’. 악당(마빈 박사)이 세계 지배를 위해 만든 괴물인 드라큘라와 늑대인간, 프랑켄슈타인, 미라가 뜻하지 않게 초등학생(두치)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4명의 괴물은 인간이 되길 원하고, 마빈 박사는 그 4명을 다시 손에 넣으려는 과정에서 각종 해프닝이 벌어진다. 시트콤처럼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우정, 가족애 등을 담고 있다.
결국 나쁜 짓을 일삼던 마빈 박사는 경찰에 붙잡힌다. 인간이 된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 미라는 늑대인간의 인간화를 돕기 위해 두치 가족의 품을 떠나며 일종의 ‘새드 앤딩’을 맞는다.
KBS에서 한국 TV 만화영화 10주년 기념으로 해외 시장을 겨냥해 제작했다. 녹색전차 해모수가 방영된 1997년이 ‘떠돌이 까치’가 방영된 지 10년이 된 해다. 실제로 그다음 해 ‘무지개전기 이리스, 虹の戦記イリス’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수출되기도 했다. 원작인 김재환 作 ‘컴뱃메탈 해모수’에서 소재와 인물을 따왔다. 문명이 고도로 발전했지만, 환경 파괴로 폐허로 변한 행성(테라)이 주 무대. 주인공 소년(릭)이 전차(해모수)를 타고, 테라를 멸망 위기에서 구할 방책인 7개의 크리스탈을 찾아 나선다.
인공지능 로봇과 UFO, 최신 신무기 등이 등장하는 한국 순수 제작의 SF 물인데, 질적으로 높은 작품이라 19년이 지난 지금 봐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주인공을 저지하는 악당이 있고, 전쟁터가 배경이나 피를 흘리지 장면은 26화가 진행되는 동안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잔인함과 폭력 대신 평화주의를 지향한 점에서 일본 SF 만화영화와 내용 면에서 차별성을 뒀다.
땅이 흔들리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릭 일행이 마지막 크리스탈을 삽입해 세계 복귀 시스템(레인보우 시스템)이 가동된다. 테라에 다시 햇살이 비치면서 끝난다.
원작은 만화 잡지 '챔프'에 1992년부터 14년간 연재된 '검정고무신(글 이영일, 그림 이우영)'. 6·25전쟁 후 보릿고개를 겪던 1960년대 후반 서울시 마포구에 사는 대가족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특별한 결말이 있다고 하기 어렵다. 어린이 만화영화인데도 어른들이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국민학생(초등학생) 기영이와 차이나 카라의 검은색 교복을 입고 다니는 중학생 기철이를 통해 향수에 젖을 수 있었다.
KBS 2TV에서 1999년 설 특집으로 1화를 방영했는데, 반응이 좋아 이듬해 2화부터 13화까지 방영했다. 2005년 시즌3에 이어 지난해에도 시즌4가 나왔다.
뽀로로와 폴리로 이어진 흥행 조짐
2000년대에 접어들자 눈에 띄는 한국 TV 애니메이션을 보기가 어려워진다. TV를 시청하는 어린이 수가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방송사들도 광고 수익이 높은 예능과 드라마에 투자를 집중했고, 뒷전으로 밀린 국내 TV 애니메이션 산업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유아용으로 타깃 연령층을 낮추고, 3D 기술을 앞세운 작품이 큰 호응을 받으면서 국내 TV 애니메이션 산업이 다시 탄력을 받고 있다. 안경을 쓴 꼬마 펭귄이 주인공인 '뽀롱뽀롱 뽀로로'가 물꼬를 텄다. 아이들 사이에서 ‘뽀통령’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사랑을 받는 이 애니메이션은 무려 120여 개국에 수출됐고, 관련 상품 연 매출은 6500억원, 연간 로열티(사용료) 수입만 150억원에 달한다(지난 2013년 11월 기준). 그 뒤를 이어 나온 '로보카 폴리' '두리둥실 뭉게공항' '라바' 등 다른 국산 애니메이션도 '지상파 TV 방영→국내 OSMU 사업(One source multi use, 영화∙게임∙책 등 부가가치 사업)→해외 수출 및 호평'이라는 공식을 차근차근 밟고 있다.
한국 애니메이션, ‘대박’의 꿈 이어가려면
'뽀롱뽀롱 뽀로로', '로보카 폴리' 등 유아용 애니메이션이 수익 모델을 찾았어도 그 이상의 연령층을 애니메이션 소비자로 끌어들이는 숙제가 남아있다. 청소년 및 성인 애니메이션의 부흥은 이른바 ‘오타쿠(おたく, 한 분야에 열중하며 집착하는 사람)’를 겨냥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수익을 내는 일본 사례도 있지만, 미국 마블그룹을 참고할 만하다.
엑스맨, 스파이더맨 등 '수퍼 히어로' 만화를 책과 잡지로 판매해온 기업인 마블은 1990년대 중반 출판 만화 시장이 급격히 축소되면서 위기에 직면했다가 최근 제2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마블의 부활 전략은 활용 안 된 만화 캐릭터를 찾아내 다양한 매체에 소개하는 '플랫폼(사업창구) 다변화'가 핵심이다. 이를 통해 애니메이션 산업의 선순환 구조를 마련했다.
백만장자가 로봇 갑옷을 입고 활약하는 ‘아이언맨’이 대표적인 예다. 마블은 만화책으로 나올 때만 해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캐릭터였던 아이언맨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3~4년 동안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아이언맨은 첫 애니메이션에서 조연에 불과했지만, 이후 독립된 주인공으로 '천하무적 아이언맨'이라는 애니메이션까지 나왔다. 인지도가 높아지자 영화로 만들어 세계적인 흥행을 거뒀다. 애니메이션과 영화 플랫폼에서 성공하면서 기존 사업 분야였던 만화책의 인기도 되살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