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과학자 뉴턴은 사과 나무 아래에서 멍 때리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도 욕탕 안에서 멍 때리다가 “유레카”를 외치며 알몸으로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것은 가끔 넋을 놓을 때 벌어지는 찰나의 고요이며, 예상 밖의 창조적 순간이다. 그리하여 세계 제일의 ‘멍 때리기’ 선수를 가리기 위한 국제 대회까지 열렸다.

7일 오후, 제3회 수원국제멍때리기대회가 열린 경기도 수원 화성 창룡문 앞을 찾았다. 이 요상한 이름의 대회를 참관하기 위해 기자도 직접 대회에 뛰어들어 멍 때림의 시간을 공유했다.

◇70명, 3시간 동안 멍 때리다

돌담 성벽길 앞 잔디밭에 요가 매트 70장이 깔렸다. 이 매트는 대회 참가자들이 오후 3시부터 꼬박 2시간 동안 머물러야 하는 전투의 장이다. 참가자 70명이 오와 열을 맞춰 자리를 잡았다. 자기소개서 심사로 7대1의 경쟁률을 뚫은 참가자들은 유치원생부터 60대 주부까지 폭이 넓었다.

'멍 때리기' 대회장 주변은 꽤나 번잡스러웠다. 황금연휴를 맞이해 외출을 즐기러 나온 나들이객의 웃음소리, 대회장 앞 대로를 오가는 차량들의 매연, 한낮의 땡볕 더위, 대기에 가득한 황사와 미세먼지가 대회장을 감쌌지만 참가자들은 '시작'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리자마자 '멍 때리기'에 몰입했다. 2시간 동안 무심한 눈빛으로 '속세'를 떠난 이들은 변기 커버 위에 올라 앉거나 옆으로 드러눕기, 가부좌 등 각자 개성넘치는 자세를 선보였다.

참가의 변은 ‘여유’와 ‘안정’을 지향했다. 우체국 집배원 문정훈(38)씨는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8~9시에 퇴근하는 여유가 없는 삶 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어서 나왔다”고 했다. 트로트 가수 리미혜(29)씨는 “요즘 행사철인데 불러주는 데가 없어서 너무 우울해 참가했다”고 했다. 그는 “억지로 잠을 자려고 하면 잠이 안오니까 그냥 하루 대부분을 멍하니 있는다”면서 “데뷔 3년이 지났지만 소속사도 없이 혼자 가수 활동을 하다보니 외롭다”고 했다. 어떤 반전의 계기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1회 대회 우승자였던 초등학생 김지명(당시 9세)양은 우승 뒤 지상파 TV에 출연하는 등 유명인사가 된 바 있다.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정신적 이완 대신 우승을 위한 집념이 불타올랐다. 20분쯤 지나자 첫번째 탈락자가 나왔다. 허리가 아파오자 몸을 자주 들썩였던 5세 여자 아이였다. 첫 탈락자가 나오자 다른 참가자들이 내심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황금색 트로피가 탐난다”며 경남 김해에서 올라온 김태우(9)군은 70분 동안 가부좌를 틀고 앉아 관중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1시간 11분 뒤 어깨를 흔들며 끅끅 울기 시작했다. 놀란 경기 진행요원이 헐레벌떡 달려가자 김군은 “엉덩이가 너무 아프다”고 흐느끼며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이날 경기 참가자들은 대회 규칙에 따라 모두 자신의 직업을 나타내는 복장을 입고 왔다. 작업복에 안전벨트·안전모까지 착용하고 참가한 건설회사 직원 김창원(40)씨는 “간만에 휴식을 누리고 싶었다”고 했지만 “한 달 전부터 대회 요강과 ‘멍 때리기’ 요령을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멍 때리러 왔지만…승부는 승부다

진행요원들은 15분마다 선수 검지에 기구를 갖다대 심박수를 체크했다. 또 경기를 관전하던 주변 시민들로부터 참가자들에게 스티커 투표를 받아 점수를 합산했다. 관객 투표 다득점자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심박그래프를 보인 이들이 1~3등이 된다. 그러다보니 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참가자가 속출했다. 시민들의 스티커 투표를 의식해 소파에 누워 TV보는 자세로 목에 팔을 받치고 누운 남성, 플라스틱 박스 위에 변기 커버를 놓고 ‘대변 보는 자세’로 앉은 남성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들은 ‘멍 때리기’ 본연의 자세에서 이탈한 나머지 상·하반신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갔다. 자신이 잠든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눈꺼풀을 격렬히 깜빡이는 참가자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동자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대회엔 규칙이 많았다. 위반 사항이 총 8가지였는데, ▲ 휴대전화 확인 ▲ 졸거나 잘 경우 ▲ 시간 확인 ▲ 잡담 나누기 ▲ 주최 측 음료 외 음식물 섭취 ▲ 노래 부르기 또는 춤추기 ▲ 웃음 ▲ 기타 상식적인 멍때리기에 어긋나는 모든 경우였다. 사또 복장을 한 심사위원 3명이 내내 대회장을 누비며 참가자들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확인했다. 참가자들은 괜한 오해를 살까봐 잔뜩 위축됐다. 옷에 묻은 잔디를 털어내거나 바람에 날아간 모자를 줍느라 움직인 사람들은 어김없이 ‘경고장’을 받았다. 대회가 점차 ‘움직이지 않기 대회’로 변질돼가자 사회자가 뒤늦게 “여러분, 움직이셔도 됩니다”라는 안내방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안내 방송을 수 차례 했지만, 탈락의 불명예를 쓰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날 대기 미세먼지는 ‘매우 나쁨’(151 ㎍/㎥) 수준이었고, 대회장 30m 밖 로터리에서 차량들이 짙은 매연을 쏟아냈지만, 누구 하나 마음놓고 기침 한 번 하지 않았다.

◇멍 때리기와 명상은 달라… 집중하면 안돼

‘멍때리다’는 ‘멍하다’의 어근 ‘멍’과 ‘낮잠을 때리다’ 등으로 흔히 일상에서 쓰이는 속어 ‘때리다’를 붙여 만든 단어로, 정신이 나간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미국에서는 데이드리밍(daydreaming) 혹은 스페이스아웃(space-out), 중국에서는 파따이(發呆)라고 불린다. 의학적으로는 ‘디폴트모드 네트워크(default-mode network)’라고 한다.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는 점은 비슷해도, 멍때리기는 명상과 다르다. 2013년 책 ‘멍 때려라’를 쓴 강북삼성병원 정신의학과 신동원 교수는 “명상은 휴식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정신의 훈련 과정이자 자신의 감각과 생각의 순간적 몰입”이라고 말했다. 반면 멍때리기는 목적 없이 순전히 생각나는대로 하는 것이다. 신 교수에 따르면 멍때릴 때도 사람의 뇌파는 활발하게 움직인다. 이 때 뇌는 무의식 속에서 주로 과거의 정보를 모아 하나로 정리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솔루션이 튀어나오기도 한다는 것이 신 교수의 설명이다.

‘멍때리기 대회’ 1회 대회 후원을 했던 황원준 정신과전문의는 “사람의 뇌는 집중하다가도 멍한 상태로 전환해 휴식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쉬는 시간에도 스마트폰을 보면서 뇌를 혹사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멍 때리기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귀중한 시간”이라며 “며칠간 계속 지속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단 몇 분, 몇 초의 멍때림은 정신 안정에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멍 때리기와 관련한 흥미로운 주장도 있다. 매튜 리버먼 미국 UCLA 교수는 저서 ‘사회적 뇌’에서 “뇌가 디폴트모드 네트워크 상태에서 사회적 세계에 대한 학습을 한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멍때리는 동안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매튜 교수는 이를 “(멍하니 쉬면서 인간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뇌가 인간 종(種)의 성공적 진화를 위해 사회적 지능을 발전시키는 전략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멍때리기가 전 세계에서 모두 환영받는 건 아니다. 칠레에서 13년째 거주하고 있는 민원정 칠레가톨릭대 아시아학센터 교수는 “칠레 학교엔 체벌이 없는 대신, 말썽 피운 아이들을 주말에 학교로 불러서 2시간씩 빈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멍때리기가 칠레에선 일종의 체벌인 셈이다.

◇국제대회로 판 커졌다…외국인 참가자들의 변(辯)

2015년 베이징 멍때리기 대회 우승자 중국인 씬쓰위(辛時雨·23)씨

‘멍때리기 대회’는 2014년 서울시청 앞 잔디밭에서 처음 열렸다. 당시 이 신기한 시도에 대해 여러 매체가 “피로가 큰 한국 사회의 현상” 등으로 분주히 보도했다. 입소문이 나자 이듬해 중국 베이징에서 2회 대회가 열렸고, 올해가 세번째 대회다. 이번 대회는 외국인 9명이 참여하는 등 국제대회로 판이 커졌다. 대회 주최자 ‘웁쓰양’(38)씨는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잠잘 때 빼고는 스마트폰을 붙들고 사는데,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그는 “다음 대회도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베이징 멍때리기 대회 우승자 중국인 씬쓰위(辛時雨·23)씨는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대회에 참석했다가 우승 트로피까지 거머쥔 경우다. 그는 "멍때리기는 바쁜 나라에서 사람들이 뇌를 보호하는 일종의 '쉼표'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도 바쁘지만 중국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중국어에서도 '멍때리기'(發呆)'는 하루에 한 두 번식은 꼭 쓰는 단어가 됐습니다."

미국인 대니얼 위버그(34)씨

캐나다에서 온 IT엔지니어 윌프레드 리(32)씨는 종이상자로 노트북 모양을 만든 뒤, 컴퓨터 작업을 하는 것처럼 상자를 응시하며 멍때리기 자세 연출에 활용했다. 그는 “한국의 ‘멍때리기’는 일종의 비워내기인 거 같다”며 “뭔가에 집중하는 명상과 달리 멍때리기는 무의식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비워내기가 아닌 내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생각(집중)한다”면서 “정신건강을 위해 샤워할 때나 지하철 탈 때 틈틈이 ‘멍 때리기’를 연습한다”고 했다. 윌프레드씨는 이날 대회 2등을 차지했다.

한국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는 미국인

대니얼 위버그

(34)씨는 “멍때리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한 번도 멍때리기를 두고 경쟁을 한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이걸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건지 모르겠다”며 “자연스러운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특별상 받은 인도인 비라 킬라파르티(27)씨

인도인 비라 킬라파르티(27)씨는 2년 전 한국 기업에서 일하게 된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다. 함께 참가한 남편은 대회 시작 40분 만에 엉덩이 경련을 견디지 못하고 탈락했지만, 그녀는 어릴적부터 다져온 요가의 내공 덕분에 종료 벨이 울릴 때까지 침착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는 "상 같은 걸 바라고 대회에 참가한 게 아니다"며 "남편과 행복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걸로 만족한다"고 했다. 거의 유일하게 긴장을 찾아볼 수 없던 참가자였다.

◇‘멍때리기’에도 1·2·3등?…서울시까지 팔 겉어붙여

이날 우승은 만반의 준비를 해온 참가번호 1번 김창원씨가 차지했다. 1등 상품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모조 트로피를 받아 든 김씨는 “사회자가 웃긴 말을 많이 했는데, (심박동이 널뛰지 않게)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3등은 초등학생 조유나(8)양이었다. 조양의 어머니는 “대회 끝나고 나서 딸이 ‘다리가 많이 아팠다’고 하더라”며 “누가 그러라고 시킨 적도 없는데, 자세를 바꾸면 탈락한다고 본인이 생각했는지 양반다리를 한 채 거의 움직이질 않았다”고 말했다.

참가번호 10번으로 참가했던 트로트 가수 리미혜씨는 결국 빈 손으로 집에 돌아갔다. 리씨는 “심사위원들이 (시험 감독관처럼) 계속 주변을 돌아다녀서 왠지 눈동자라도 돌아가면 경고 받을까봐 꾹 참고 있었다”면서 “참가자들이 다들 이를 갈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이날 대회에는 기자(양지혜)도 참가했다. 처음엔 기사를 위해 주변 참가자들을 관찰하려는 목적이었지만, 대회 시작 종이 울리자 수상 욕심이 생겼다. 욕심은 정신을 황폐하게 했다. 무릎에 앉은 날파리를 손으로 툭툭 털어내다가 경고를 받은 뒤로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대회 후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에게 이 현상에 대해 물었다. 최 교수는 “멍때리기 자체는 정신·문화적인 가치가 있지만 이걸 대회로 열어 경쟁하고 상을 주는 게 모순적인 것 같다”며 “멍때리기에까지 경쟁과 압박이 틈입한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에서 '한 멍' 하기로 소문난 양지혜 기자도 '48번' 선수로 변신했다. 자신의 직업을 나타내는 옷을 입으라는 규칙에 맞춰 검정 버버리 코트에 노란색 'PRESS' 완장을 팔에 달았다. 대회 시작 전에는 "실컷 멍 때려야지" 싶은 마음에 설렜는데, 치열한 경기 분위기에 휩싸여 오히려 멍 대신 번뇌가 마음에 가득찼다. 대회 끝나고 기사 쓸 생각하니 심박수가 올랐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개미를 치웠다가 '옐로카드'를 받았다. '멍때리기'는 쉬워도 '멍때리기 대회'는 역시 쉽지 않다.

대회가 갈수록 인기를 얻자 지방자치단체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서울시 한강사업본부는 22일 이촌한강공원 청보리밭 일대에서 ‘2016 한강 멍때리기 대회’를 개최하기로 하는 등 전국에서 행사 주최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멍때리기에도 1등과 2등과 3등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이날 대회에는 1회 대회 우승자 김지명(11)양은 자원봉사자 자격으로 대회장에 모습을 비췄다. 만사 귀찮은듯한 표정으로 “멍때리기 우승자로서 소감이 어떠하냐”는 질문에도 일절 대꾸를 않던 김양은, 대회가 끝나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집에 가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