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정식당, 뉴욕의 '정식(JUNSIK)'으로 새로운 한식 패러다임 제시"
"성게알 비빔밥, 돌하르방 디저트 등으로 인기몰이"
"파인 다이닝은 생계가 아닌 취미가 정답, 냉면집에서 비즈니스 출구 찾아"

그의 요리는 ‘수요 미식회'나 ‘테이스티로드'같은 맛집 프로그램에 소개되지 않았고, 그는 대중에게 알려진 ‘스타' 셰프도 아니다. 어쨌든 미식 동네의 베벌리 힐스에 사는 그를 ‘셰프와 한 끼' 칼럼에서 한 번은 꼭 만나고 넘어가고 싶었다.

정식당의 임정식. 그는 자존심 강한 은둔형 셰프다. 여러 차례 경험한 바지만, 그는 기자들을 특별히 반기지도 않을뿐더러, 취재를 위한 음식도 에누리 없이 제값을 받는다. 스타 셰프들이 으레 그러하듯 한 그릇의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탄생 설화를 흥분해서 설명하는 법도 없다.

생계형 파인다이닝으로는 손님을 만족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얘기하는 임정식 셰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정식과 정식당은 미식가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2008년 문을 연 청담동 정식당과 2011년 문을 연 뉴욕 트라이베카의 뉴코리안 레스토랑 ‘정식'은 넘볼 수 없는 미식계의 트윈 픽스(Twin peaks, 두 개의 봉우리)다. 뉴욕의 ‘정식'은 2011년 미슐랭 2스타를 받았으며, 올해 3스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청담동 정식당은 발간을 앞둔 한국판 미슐랭 가이드가 별을 수여할 1순위 레스토랑으로 꼽힌다.

◆ 2008년 코리안 뉴퀴진을 컨셉으로 오픈한 정식당, 문 열기 전부터 언론계와 미식가 입소문 타

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있듯, 날 때부터 금주걱을 쥐고 요리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임정식일 지도 모르겠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한식 세계화 바람이 동시에 들이닥쳐 우왕좌왕하던 미식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임정식은 ‘완전히 새로운 한식’으로 파인 다이닝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렸다. 그리고 여전히 정상의 자리에서 권위 있는 ‘월드베스트 50'이나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10위권에 자랑스럽게 ‘정식당'이라는 이름을 올린다.

‘뉴코리안 퀴진'으로 대표되는 그의 요리는 말하고자 하는 텍스처와 플레이버의 뼈대가 정확하다. ‘두루뭉술’이 미덕인 한식에는 보기 드문 개성이다. 성게 알이나 김부각의 향과 질감을 이용한 요리, 미역과 문어의 조직감을 해체하거나 극대화한 요리들을 맛보면, 통 쓰지 않아 퇴화한 어떤 감각 기관이 우두두두 깨어나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임정식이 자기만의 실험실에서 만들어 낸 ‘과학의 맛’인지, 식재료를 많이 다뤄본 자 특유의 ‘경험과 수련의 맛'인지는 모르겠다.

비 오는 밤 10시, 그가 운영하는 정식당의 1층에 자리한 와인바, 정식 바를 찾았다. 야외 비밀 막이 처진 바깥쪽 테이블에 앉자, 봄비가 칼로 치듯이 지붕 위로 떨어졌다. 으스스하게 한기가 일었다. 야구 모자를 쓴 소년 같은 얼굴이 스윽 다가왔다. 작은 얼굴에 작은 어깨. 딱 봐도 ‘몸을 쓰는 데 이골이 난' 셰프의 골격은 아니다.

최고의 한식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으로 손꼽히는 압구정동의 정식당 풍경. 그는 최근 아내 이여영 씨가 조선일보사 앞에 오픈한 프리미엄 막걸리 식당 ‘월향'을 보면서 대중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많이 배운다고 했다.

“저는 요즘 입으로 요리합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임정식은 요즘 직접 요리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정식당이나 정식 바의 키친에서 그가 팬을 잡는 법은 없다. 월드베스트50, 푸드페스티벌, 한불 수교 130주년 등의 대규모 미식 행사가 아니면 그가 앞치마를 두르는 일은 좀처럼 없다는 것.

◆ 저성장 시대, 뉴욕 정식당은 미슐랭 2스타 받고도 운영 쉽지 않아

지금 그가 심취한 것은 ‘냉면'이다. “그런데 저는 냉면을 먹어본 지는 1년밖에 안됐어요"라고 그가 또 피식 웃는다. 그런데 식재료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는데 능숙한 파인 다이닝 요리사가 왜 플레이버와 텍스처의 구조 감을 뽐낼 수 없는 심심한 ‘냉면'에 반한 것일까. 대답은 심플했다. “냉면이 비즈니스를 만들어내는 데 좋아요."

셰프를 예술가나 엔터테이너로 추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의 입에서 나온 ‘비즈니스'라는 말은 다소 생경했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소위 고급 음식점으로 명명되는 파인 다이닝 오너 셰프들의 고충을 들어왔다. 한마디로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식재료, 창의적인 조리법, 맞춤 서비스로 제공되는 음식의 질에 비해 가격 저항은 뜻밖에 크다. 관광객이나 기념일을 맞은 커플 등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화려한 코스 요리에 큰돈을 쓰지 않는다.

이미 사회는 저성장 시대에 돌입했다.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같은 큰 목표를 세우기보다 그저 친구들끼리 모여 함께 살고, 맛있는 것 찾아 먹는, 작은 즐거움으로 자족하는 시대. 음식에 대한 욕구는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미식에 대한 수준이 높아진 것은 아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먹으며 또 다른 먹는 계획을 수 있는 ‘가성비' 좋고 재밌고 만만한 공간을 원한다. 이를테면 냉면이나 떡볶이집, 수제 맥줏집이나 피자집 등을 오가며 갑론을박 맛의 승자를 가려내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미식가, 탐식가는 여전히 소수예요"라고 임정식이 웃음 속에 탄식을 섞어 말했다.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뉴욕의 ‘정식'은 미슐랭 별 두 개를 따냈지만, 여전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5년 동안 아직 초기 투자비를 건지지 못했어요. 지금도 한국의 정식당에서 벌어서 보내주고 있는 걸요. 파인 다이닝 분야는 전 세계가 힘들어요. 고급 인력을 유지 관리하는 게 쉽지 않아요.”

미역 빠에야. 임정식이 생일을 맞은 직원들 미역국을 끓여주다가 개발한 음식이다.

비즈니스적으로 실패했다 해도, 임정식은 뉴코리안 퀴진의 아이콘으로 알려진 뉴욕의 ‘정식'으로 머지않아 미슐랭 3스타를 받아내겠다고 한다. 그건 그의 자존심이다.

"파인 다이닝을 생계형으로 운영해서 손님에게 좋은 음식을 드리는 건 한계가 있어요. 돈은 비즈니스 구조가 맞는 대중식당으로 벌고, 파인 다이닝은 취미로 하는 게 맞아요."
그리하여 서울의 임정식은 현재 냉면을 수련 중이며, 자신의 식당에서는 입으로 요리 중이다. "저는 주방에 들어가면 설거지 해요(웃음). 대신 이게 맞다, 안 맞다,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 시키죠. 얼마 전에도 장어 덮밥에 마를 슬라이스로 해서 내놓다가, 더 아삭한 느낌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마 장아찌를 담가보라고 했어요."

일단 그가 입으로 요리한 음식 몇 가지를 맛보았다.

먼저 올리브 탕. 새우 머리로 만든 베이스 오일에 버섯, 토마토, 새우, 올리브, 파프리카 가루 등을 넣고 올리브 오일을 듬뿍 부어 끓인 올리브 탕은 그야말로 기름의 향연이다. 흥건한 기름을 숟가락으로 듬뿍듬뿍 떠먹으면, ‘뻔뻔한 죄책감의 맛’이 이런 걸까 싶다. 야밤에 홀로 성인 영화 한 편 보듯 꽤 중독적이다.

◆ 시간 지날수록, 좋은 재료에 잘 조리된 심플한 음식이 좋아져

두 번 째 나온 가지 그라탱은 가지보다 청양고추 오일의 맛이 꽤 괜찮았고, 미역 빠에야는 너무 정직하고 착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맛이었다. 임정식은 미역 빠에야를 생일 맞은 직원들 미역국 끓여주다가 만들었다고 했다. 다정한 레시피의 기원과 함께, 전골 요리를 먹은 후 남은 국물에 비벼 먹는 무던한 볶음밥처럼, 그 질감이 투항적이어서 좋다.

2시간 동안 저온으로 조리한 삼겹살을, 팬 프라이한 오감 만족 보쌈은 장아찌와 같이 나왔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찰진 이 삼겹살은 그것이 돼지의 한 부위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식감이 고급스러웠다. 냄새를 제거한 양고기처럼, 돼지고기 특유의 ‘둔탁함’이 사라진 그 보쌈은, 마치 다이어트와 식이요법으로 완벽한 몸매를 지닌 돼지를 먹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임정식이 가장 사랑하는 식재료 문어. 문어는 아프리카 해안에서 잡아다 지중해에서 처치한 스페인산을 쓴다. “한국의 차가운 바다에서 자란 문어는 텍스처에 한계가 있어요. 뉴욕 정식당의 문어는 더 바삭하고 주이시하거든요.” 그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식재료는 문어를 좋아한다. 문어 다리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심플한 요리에 점점 더 애정이 간다고 하다.

마지막으로 그 유명한 돌하르방 디저트가 나왔다. 바닷가 현무암을 씹어먹듯, 돌하르방을 씹는다. 검은 돌(검은 들깨)이 입안에서 부서져 내일 때, 한라산의 눈이 목구멍에서 눈보라를 일으킬 때, 그렇게 몸 안으로 번져오는 제주의 풍경에 저절로 눈이 감긴다.

“제주도에서 사 온 작은 돌하르방 인형을 본떠서 만들었어요. 다행히도 저희에겐 몰딩 기술이 있어서 어렵진 않았죠.” 여전히 제주 녹차 무스와 제주도산 우유로 만든 돌하르방은 인스타그램에서 인기 절정을 달리는 슈퍼스타이며 대체 불가능한 정식당의 마스코트다.

◆ 누구나 셰프가 되고 싶어 하지만, 셰프로 살아남기 더욱 어려워진 시대

기실 차려진 요리에는 내내 심드렁한 채로, 임정식은 마주 앉은 시간 대부분을 냉면에 관해 이야기했다.

지하 2층에 비밀 연구소도 있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의 집안 내력에는 ‘국수의 역사'가 잠복해 있다. 임정식의 친할머니는 강원도 시장에서 국수 장사를 했다. 임정식의 아버지가 고향에서 처음으로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축하 방문을 한 양양 경찰서장에게 할머니가 대접한 음식도 국수였다. 외할아버지도 국수 장사를 하다 말아먹은 적이 있다고 한다.

정식당의 시그니처 돌하르방 디저트. 제주도 녹차무스와 제주도산 우유로 만들었다. 이 밖에도 디저트로 베르사이유의 장미, 벚꽃 엔딩 등이 인기다. 가격은 점심 코스는 5~8만원 대, 저녁 코스는 9~12만원 대다.

임정식은 자신의 친가와 외가에서 한량 기질과 더불어 국수의 피를 물려받았다. 그래서 임정식은 자신의 이름을 본뜬 ‘정식당'에 사시사철 미각의 꽃봉오리를 피우기 위해, 그러니까 최고의 음식 한량 놀음을 지속하기 위해, 지금은 열심히 국수를 말기로 했다.

“저는 다이닝 셰프로서 저만의 출구 전략을 세웠습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할머니의 이름을 따 ‘재춘옥'이라는 이름도 지어놨다.

정식 바에 밤이 깊어갔다. 셰프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소설가만큼 진입 문턱이 낮은 직업도 없고, 소설가만큼 전업으로 이어가기 어려운 직업도 없다고 토로했다. 붓 한 자루만 있으면 링에 오를 수 있지만, 소설로 먹고살며 링에서 버티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셰프도 그러하다. 칼 한 자루만 있으면 누구나 요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직업 셰프로 살아남는 것은 다른 문제다. 게다가 '맛'이라는 건 대단히 주관적이다. 임정식은 판교에서 유명한 냉면집 능라가 왜 강남에서는 장사가 안되는지 모르겠다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어복 쟁반의 고기 질도 정말 좋거든요. 전문가들이 평가하는 맛과 대중이 좋아하는 맛이 다른 거죠."

압구정동의 프렌치 가스트로 펍 루이쌍끄의 이유석 셰프의 주방에서 냉면을 선보이고 있는 임정식. 이유석과 임정식은 서로를 요리의 피를 나눈 ‘의형제'라 칭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최고의 음식과 대중이 좋아하는 음식은 다를 수 있다. 요리사는 너무 난해하지도, 너무 팬시하지도 않은 '맛의 합의점'을 찾아내야 한다. 임정식은 그 복잡한 고도의 행위를 '비지니스'라고 했다.
얼마 전 아내 이여영 씨가 조선일보사 앞에 낸 막걸릿집 '월향'의 오픈 준비를 도우면서 '비즈니스'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 모양이다. 좋은 쌀로 지은 돌솥밥이라든가 김치찜, 갈비찜 등 월향의 밥상과 한식 메뉴에 임정식의 입김이 서려 있다.

◆ 정식당과는 다른 길, 재춘옥에 거는 기대

“저는 정식당 구멍가게 하나를 운영하지만, 아내는 8개 업장을 경영하는 큰 사업가예요.” 그의 아내 이여영 씨는 프리미엄 막걸리 프랜차이즈 ‘월향' 업장 5개와 와인바 ‘문샤인’ 3개 업장을 운영한다.

서로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던 당대의 한량 요리사 임정식과 당대의 여장부 외식사업가는 쉽게 친해졌고, 2014년 12월, 대한민국 셰프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했다. 그리고 각자의 비즈니스에 골몰한 요즘엔 밤마다 라면을 끓여 먹는다.

임정식은 지금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어 한다. 파인 다이닝과 대중식당. 뉴코리안 퀴진과 냉면. 향과 조직이 다층적인 레이어를 이루는 코스 음식과 단순하고 심오한 한 그릇 음식.

육체를 쓰는 직업이지만, ‘슬렁슬렁하는 것'처럼 보이길 원하는 한량 기질, 불평하는 고객에게 “네 혀가 잘못됐다”고 외치고 싶은 충동적 자의식, “비즈니스 못하면서 손님 탓하는 것은 금기"라는 청교도적인 직업의식이 뒤섞인 채로, 임정식은 오늘도 지하 2층 비밀연구소에서 냉면을 수련한다.

메밀면과 소고기 육수로 뽑아낸 임정식의 간결한 면 요리를 먹어볼 날은 언제일까. 기대된다. 정식당이 아닌 재춘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