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저녁 서울 인사동 한 맥주 전문 펍에 가보니 550ℓ짜리 대형 냉장고 5대에 수십 가지 맥주병이 절반가량 들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을 채운 건 비슷한 가짓수의 맥주잔이었다. 잔의 크기·모양이 제각각이었다. 3년 차 종업원 장명재(34)씨는 "맥주 브랜드마다 맥주 맛을 극대화하는 전용잔이 따로 있다"며 "호프집용 500㎖ 머그잔에 따라 마시면 그 맛을 반밖에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맥주의 4대 재료인 맥아, 홉, 효모, 물 외에 맥주잔이 맥주 맛의 '제5원소'로 꼽힐 수 있다고 맥주 전문가들은 말한다. 세계적으로 수천 가지 맥주잔이 있고 그것을 비슷한 모양끼리 묶어도 10종 이상이다. 유리의 굴곡 하나가 잔 안에서 향기의 대류(對流)를 만든다.

그래픽= 박상훈 기자

맥주잔은 그 모양에 따라 길쭉하고 잔 입구가 좁은 종류와 둥그렇고 입구가 넓은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전자엔 보통 라거(저온 발효 맥주)를 따라 마시는데, 좁은 입구 때문에 맥주가 혀 윗부분으로 바로 떨어진 뒤 목으로 흘러들어 라거의 시원한 탄산감을 극대화한다. 또 몸통이 좁아 빛 투과가 잘되므로 라거 특유의 연한 색깔이 시각적으로 강조된다. 세부적으로는 직선형인 필스너(체코식 라거) 잔과 곡선형인 바이젠(밀 맥주) 잔 등으로 나뉘는데, 바이젠 잔은 입구 부분이 곡선으로 부풀어 있어 밀 맥주의 풍부한 거품을 충분히 담아낸다.

둥그런 잔엔 대부분 아로마(향)가 뛰어나고 맛이 깊은 에일(상온 발효 맥주)을 따라 마신다. 잔 입구가 넓어 마시기 위해 잔을 기울였을 때 코가 안쪽으로 들어간다. 맥주가 입에 닿기도 전에 이미 맥주향이 비강(鼻腔)을 감돈다. 맥주가 입안으로 들어올 때도 혀와의 접촉 범위가 넓어 단맛·신맛·쓴맛을 골고루 느낄 수 있다. 미국 맥주 소믈리에 자격증인 시서론(Cicerone) 보유자인 석진영(30)씨는 "점도가 높고 효모 특유의 달콤한 향이 나는 두벨(Duvel)·시메이(Chimay) 등 벨기에 에일이 둥근 전용잔을 갖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둥근 각도나 잔 입구 쪽 모양에 따라 브랜디 잔 모양의 스니프터 잔, 중세시대 성배(聖杯) 모양의 고블릿 잔, 튤립 잔 등으로 나뉜다.

역사적 기원에 따라 독특한 잔 모양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벨기에 에일 파우벨 콱(Pauwel Kwak)의 전용잔은 18세기 마부들이 마차를 몰며 음주하다 잔을 걸쇠에 걸 수 있게 만든 모래시계 형태다. 주문하면 나무로 된 걸쇠에 걸려서 나온다. 맥주회사가 아닌 유리잔 제조업체가 다양한 브랜드의 맥주에 어울리는 범용(汎用) 맥주잔을 만들기도 한다. 일례로 독일 슈피겔라우가 만든 스페이드 모양의 인디언페일에일(IPA) 전용잔엔 수백 가지나 되는 IPA 맥주를 따라 먹을 수 있다. 이 잔은 밑둥이 파도처럼 굴곡져 손과의 접촉면이 넓으므로 체온으로 데워진 맥주가 IPA 특유의 상큼한 허브향을 뿜어낸다.

섬세한 맛 차이에 민감한 맥주 마니아들은 마시는 사람의 후각·미각·시각에 큰 영향을 주는 맥주잔을 중요시한다. 수입맥주상인 구충섭(40) 비어랩 대표는 "전용 맥주잔만 800종 이상 수집했다"며 "같은 브랜드 잔이라도 10~20년 전과 현재 형태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덕질(마니아적 탐구나 수집)'하려면 끝이 없다"고 말했다. 맥주 전문지 '비어 포스트'의 이인기 발행인은 "최근 한국에서도 중소 규모 수제 맥주 업체들이 수십곳 생겨나며 그에 따라 전용 맥주잔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