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훈이’ 권창훈이 자신의 별명이 된 빵을 양손에 들고 찍은 사진.

2008년 여름 프로축구 수원 삼성의 스카우트 조재민씨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한 빵집을 하루가 멀다고 드나들었다. 그곳에 가면 중동중에 재학 중이던 축구 선수 권창훈이 빵집 주인인 아버지 권상영씨의 일을 돕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권창훈을 매탄고에 데려가기 위해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던 조씨가 빈손으로 빵집을 나오기가 미안해 구입한 소시지 빵만 수백 개였다.

아버지 권상영씨는 처음엔 신설팀인 매탄고에 아들을 보내는 걸 꺼려 조씨를 차갑게 대했지만, 나중엔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권창훈은 수원 삼성의 유스 팀인 매탄고로 진학했고, '왼발의 달인'이라 불린 고종수 수원 코치를 만나 기량이 급성장했다. 이를 놓고 네티즌들은 '삼고초려'가 아닌 '빵고초려'로 부른다. 지극정성을 들여 한국 축구는 미래를 짊어질 든든한 자원을 얻었다는 얘기다.

2014년 12월 울리 슈틸리케 국가대표팀 감독은 아시안컵을 대비해 스무 살의 권창훈을 발탁했다. 1992년생 손흥민이 4~5년간 막내로 있었던 대표팀에 1994년생 권창훈의 합류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작년 9월 라오스와의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에서 A매치 데뷔골을 터뜨린 권창훈은 이후 대표팀의 주축 선수로 자리 잡았다.

축구 팬들은 빵집 아들인 권창훈을 '빵훈이'로 불렀다. 권창훈은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도 5골로 리우행(行)을 이끄는 등 올림픽 대표팀(23세 이하)에서 확실한 에이스 역할을 했다. 그 활약이 올림픽 본선에서도 이어졌다.

권창훈의 시원한 ‘왼발 한 방’이 한국 축구를 8강으로 이끌었다. 권창훈이 11일 리우올림픽 축구 조별 리그 C조 멕시코전에서 후반 32분 왼발 중거리슛으로 결승골을 넣고 환호하는 모습.

권창훈은 11일(한국 시각) 리우올림픽 남자 축구 C조 조별리그 3차전(브라질리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왼발 결승 골로 한국의 1대0 승리를 이끌었다. 권창훈의 결승 골로 2승 1무(승점 7)를 기록한 한국은 올림픽 축구 사상 처음으로 조 1위로 8강에 올랐다. 동메달을 차지한 런던올림픽에 이어 최초로 2회 연속 8강 진출이란 기록도 썼다. FIFA(국제축구연맹) 주관 세계 대회에서 한국이 '디펜딩 챔피언(전 대회 우승팀)'을 물리친 것도 처음이다. 멕시코는 런던올림픽 우승팀이다.

관중 휴대폰 빌려 찍은 ‘손흥민 셀카’ - 한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8강 진출 확정 이후 응원단을 배경으로 찍은 셀카. 손흥민은 멕시코전이 끝나자 관중석으로 달려가 한 팬의 휴대폰을 빌려다 이 사진을 찍고 다시 돌려줬다. 휴대폰을 빌려준 팬은 이 사진을 자기 SNS에 올렸다. 사진 맨 앞줄 선수들은 왼쪽부터 박용우·손흥민·문창진·정승현. 2회 연속 올림픽 8강 무대에 진출한 선수들은 환하게 웃었다.

권창훈의 시원한 왼발 킥에 승부가 갈렸다. 한국은 멕시코의 공세에 고전하며 유효 슈팅 하나 날리지 못하고 있었다. 권창훈은 후반 32분 중앙에서 페널티 지역 왼쪽으로 돌파해 왼발 대포알 슈팅을 쏘아 골망을 갈랐다. FIFA 홈페이지는 "권창훈의 탁월한 골로 한국이 8강에 올랐다"고 전했다.

[권창훈 선수의 프로필]

권창훈의 왼발을 가다듬어준 이가 바로 고종수 수원 코치다. 정확한 왼발 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종수는 제자의 왼발을 눈여겨보면서 "침대에 고무 밴드를 걸고 왼발목으로 잡아당겨 발목 힘을 기르라"고 조언했다. 권창훈은 지금도 그 훈련을 한다. 권창훈은 "고무 밴드 덕에 세계 무대에서 통하는 킥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했다. 권창훈은 고종수 코치의 현역 번호인 22번을 물려받아 프로팀 수원과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달고 뛴다.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권창훈의 컨디션은 그리 좋지 못했다. 올 시즌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며 40경기 이상을 소화하면서 발바닥에 무리가 왔다. 권창훈의 에이전트 장민석씨는 "올림픽을 앞두고 발바닥 통증이 심해 운동과 치료를 병행했다"며 "부상 때문에 부담이 될 만도 한데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상을 안고서도 권창훈은 3골로 팀의 8강 진출에 앞장섰다. 권창훈은 멕시코전이 끝나고 "팀 동료 모두 포기하지 않아 나에게 좋은 찬스가 생겼다"고 말했다.

권창훈은 '2002 키즈'이자 '박지성 키즈'다. 온 나라가 붉은 물결로 휩싸인 2002 월드컵 당시 여덟 살이었던 권창훈은 박지성의 경기 모습을 보고 축구화를 신었다. 그는 "흥분하지 않고 자신을 컨트롤하는 박지성의 모습에 감동받았다"고 했다.

멋진 골이나 환상적인 패스가 아니라 '자신을 컨트롤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는 면에서 권창훈의 성격이 엿보인다. 권창훈은 화려하진 않지만 늘 꾸준한 모습으로 그라운드에 서는 선수로 유명하다. 숙소와 훈련장을 오가는 것 외엔 별다른 스케줄이 없는 것도 대선배 박지성을 닮았다. SNS도 잘 하지 않고, 걸그룹 멤버는 누가 누군지도 모른다. 여자친구도 없다. 쉬는 날엔 축구 경기를 본다. 선배들이 "네 나이 때 너처럼 안 노는 애는 처음 봤다"고 할 정도다. 나이답지 않은 철저한 자기 관리로 붙은 별명이 '애늙은이'다.

권창훈이 일찍 철이 든 것은 중학교 2학년이던 2008년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다. 권상영씨는 "당시 중2인 아들이 '아빠, 그동안 고생하셨으니 좀 쉬세요'라고 했다"며 "그날 이후 아들은 뭔가를 사달라거나 해달라고 조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시간 날 때마다 빵집에서 일손을 도왔던 권창훈이 가장 좋아하는 빵은 야채피자빵이다.

'빵훈이'의 활약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한국 대표팀은 14일 오전 7시 벨루오리존치에서 열리는 대회 8강전에서 D조 2위 온두라스를 상대한다. 북중미의 복병 온두라스는 아르헨티나를 조 3위로 밀어내고 8강에 올랐다. 경기가 열리는 스타디움 미네이랑은 브라질월드컵 당시 홈팀 브라질이 준결승에서 독일에 1대7 대패를 당한 장소다. 신태용 감독은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