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건’이 발생한 지 3년이 지났다. 이 부부가 2016년 여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문을 두드렸고, 열렸다.
무작정 찾아간 건 아니었다. 인터뷰까지 몇 차례에 걸쳐 메일과 전화를 주고받았다. 일종의 단서가 달렸다. 옛날 일보다는 지금 얘기를 위주로 했으면 좋겠다는. 그러자고 했다. 지난날의 진위 여부를 밝히는 역할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잖나. 그 이면(裏面)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싶었다. 김포 자택으로 갔다. 2013년 5월. 일주일 동안 ‘윤창중’ 기사만 1만 개 쏟아지던 그때. 수백 명의 기자들이 ‘뻗치기(취재 대상을 만나기 위해 기약 없이 기다리는 일)’를 하던 바로 그 집으로.
어떻게 이사를 안 가고 계속 산다? 이사를 갈 이유가 없잖나. 2000년 입주 때부터 살던 집이다.
그러고 보니 휴대전화 번호도 안 바꿨더라. 왜 바꾸나. 그냥 안 받았다. 많게는 하루에 부재중 통화가 몇천 통이 찍힌 적도 있다.
언제쯤 뜸해지던가. 뜸해졌다가도 잊어버리려 하면 한 번씩 오더라. 웃긴 게 뭔지 아나? 천통 씩 오다가 안 오니까 또 섭섭하더라고.
그런 말을 하는 것 보니, 여유가 좀 생겼나 보다? 여유…라기보다는 매일같이 이름이 나갔던 사람이잖나. 비단 그 사건 이전에도. 바이라인에라도 항상 '윤창중'이란 이름이 나갔다. 대변인 시절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다가 잠잠해진 시기가 오니까… 완전히 세상을 등지고 내가 내 이름을 버려버리는 그런 지경이 아닌가 싶은 생각. 내 이름조차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고,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인가 싶기도 하고. 아, 이렇게 내가 폐인이 되는구나, 그런 차원에서 한 말이다.정말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됐다. 머리를 기른 것마저도. '김포의 존 레넌'이라는 제목으로. 머리를 기른 이유는 하나였다. 기사에 보도되는 사진들이 다 너무 험상궂더라. 그런데 거울을 보면, 그 속엔 진짜 험상궂은 윤창중이 서 있었다. 비난받는 장본인이 눈앞에 있더라. 그게 반복되니 스스로를 혐오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기존의 모습을 고수하고 싶지 않았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알아보던가. 알아봤겠지. 그럼. 믿을지 모르겠지만 단 한 명에게도 쓴소리를 들은 적은 없다. 손가락질을 하거나 욕설을 뱉는 사람을 못 봤다. 만일 누구 하나만이라도 나에게 "나쁜 놈!"이라고 했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힘드시겠다, 속상하시겠다, 라고.
극단적인 선택이라면? 세상을 등지는…. 근데 내가 왜 살아 있느냐? 죽으면 내 억울함은 누가 증명할 건가 싶더라. 또, 자살 소식을 들려주는 게 주변 사람들에게 할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이내 반드시 살아야겠다로 바뀌었다.
재야의 윤창중. 호칭이 애매했다. ‘전 대변인’이라 했더니 본인을 ‘대표’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무슨 대표인가 하니, 그는 지난 6월 7일 ‘윤창중칼럼세상’이라는 블로그를 재개했다. 그때부터 매일같이 칼럼을 올리고 있다. 7월까지 한 달간 올린 칼럼을 엮어 이라는 에세이도 냈다. 말인즉슨 윤창중칼럼세상의 대표라는 말이다.
인터뷰에 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고민 많이 했다. 특히 아내가 고민을 많이 했다. 원래 나서는 사람이 아니다. 한 번도 인터뷰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최근까지도 여러 방송 등에서 요청이 왔는데 다 거절했다.
근데 왜 (응했나). 나는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이다.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지만, 더 내려간다고 해도 상관없다. 다만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 게 마음의 짐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통화 끝에) 내 얘기를 비틀지 않고 들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척을 지는 일이 없길.
판단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는 것뿐이다. 한편 세간에서는 왜 아직까지 욕한다고 생각하나?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언론이 보도한 대로였다면 나는 지금 심판을 받았을 거다. 언론과 기타 음해세력이 협업해 박 대통령의 첫 번째 인사 대상인 나를 꼬투리 잡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난도질을 가하는 거다.
잘못이 없다는 얘긴가. 있었다면 미국에서 내게 출석요구를 했을 거다. 나는 공직에 있던 사람이다. 미국 검경이 소환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얼마든지 했을 거다. 미국에 갈 채비도 해놨었다. 관용여권을 반납하고 개인여권을 찾아왔다. 근데 출석요구가 없는 걸 내가 어딜 가서 조사를 받나. 3년간 단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미국 경찰이 그리 호락호락한가. IMF 총재씩이나 되는 사람을 비행기에서 쇠고랑 채우는 게 미국 경찰이다. 근데, 청와대 대변인이 심지어 그 악랄한 성추행을 했는데 그걸 어떡해서든 잡아가지 않겠나? 지금도 팩트 체크를 안 한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를테면? 수도 없다. 사건 직후, 일주일 동안 내 관련 기사만 1만 건이 보도됐다. 그중에는 '췌장암에 걸렸다', '이혼을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심지어 '딸이 파혼을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나는 아들만 둘이다. 심지어 '자살을 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내가 기자시절엔 국민들이 왜 그렇게 기자를 욕하는지 몰랐는데, (그때) 알겠더라. 최근에는 지난 5월 23일. 모 종편에서 '윤창중이 미국에 면책특권을 요청해서 처벌을 안 받았다'고 보도했다. 근데 개인은 면책특권을 요청할 수 없다. 정부에서 해줘야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면책특권을 해줬을 리도 없고.
왜 그 직후 해명하지 않았나. 왜 지금에서야 이 얘기를 하나. 공소시효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나왔다는 생각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 질문 잘했다. 2013년 5월 7일. 결백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서,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도 이해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다. 결코 하루 이틀에 해결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 세상에 나가야 하나. 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생각했다. 그 결과 1년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수도승의 입장에서 나는 누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고심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 1년은 내가 정한 기한이었다. 1년을 지켜보면서 1년을 더 쉴 건지, 2년을 더 쉴 건지, 아니면 아예 세상에 나오지 말아야 할 건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1년을 지켜보니까 어떻던가. 여전히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죄인이더라. 어떤 객관적인 사실도 나오지 않았는데. 언론에서는 '3년 공소시효'를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래, 좋다. 그럼 그 틀에 갇혀주겠다 싶었다. 3년 동안은 그래, 내가 기다리겠다, 억울함은 그 후에 호소하자 싶었다.
스스로 '억울하다' 라는 표현을 많이 할수록 읽는 사람은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게 됐든 간에 윤창중은 국민 앞에서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그 중차대한 시점에 물의를 일으킨 건 사실이다. 내가 결백한 것과 무관하게 나는 죄인이다. 처음에는 내가 죄인이라는 걸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근데 신 앞에서 내가 죄인이다, 라고 내려가니 마음이 편하더라.
혹시 예전처럼 TV 출연을 염두에 두는 것 아닌가. 나도 인간이기에 날 난도질한 방송에는 나가고 싶지 않다.
난도질 안 한 방송에는? 그러나 다시, '나도 인간이기에' 매스컴과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
시기상조 아닌가? 국민의 반응을 보겠다. 만일 윤창중 너, 글도 쓰지 말고 방송(그는 현재 인터넷 방송 에 고정출연 중이다)에도 나오지 말라고 하면 세상과 완전히 결별하겠다. 내 블로그에 칼럼을 게재하는 것도 국민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윤창중은 파렴치범이다, 더 이상 나오지 마라 하는 의견이 압도적이면 지난 3년간 그랬던 것처럼 이름 없는 야생초로 살겠다. 대한민국 어느 한구석에서 살거나, 아니면 대한민국을 떠날 생각도 있다. 내 억울함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라면, 떠나겠다.
블로그에 많게는 하루 1만 명이 들어오더라. 근데 댓글 기능을 없앴더라? 댓글로 인해서 자살에 이르게 된 사람이 너무 많잖나.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메일로 보내라는 거다. 그렇게 해놓길 참 잘했다 싶다. 하루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이메일이 온다. 다들 진지한 내용이다.
부인 이현옥 씨는 30년 이상을 중학교 수학선생님으로 살았다. ‘그 사건’ 당시 기자들이 학교로 찾아가는 등 그의 신상이 공개되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얼굴을 비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많이 어색해했다. 사진도 최소한으로 찍어달라고 당부했다.
처음 보도를 접하고 어땠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남편을 믿었단 말인가. 그럼. 결혼생활 하는 동안 남편이 늦게까지 술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다. 아무리 늦어도 자정을 넘기지 않았다. 자신하고 말할 수 있다. 근데 낯선 땅 워싱턴에서 5시까지 술을 마셨다고? 그것도 대통령을 모시고 간 자리에서? 그런 중차대한 시기에 보는 눈도 많은데 그럴 리가 없잖나.
일말의 의심도 없었나? 30년 동안 같이 산 사람이다. 속 한번 썩인 적 없다. 애 아빠가 겉으론 다소 오만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가면 아르바이트생들 있잖나. 어린애들. 남녀 할 것 없이 그렇게 말을 걸었다. 시급 얼마 받느냐, 일은 안 힘드냐, 열심히 살아라, 하면서 한 번씩 격려 차원에서 용돈도 주고. 속으로 그랬지. 아휴, 뭘 저렇게까지 할까.
그런 차원일 거라 생각했다? 워낙 많이 본 모습이다. 눈앞에 그려졌다.그래도 그 십자포화 속에서 한 번도 믿음이 흔들린 적이 없다니. 물론 하루에도 몇 번씩 추가 보도가 쏟아지니 한 번씩 "여보, 이 기사가 사실이야?" 했던 적은 있다. 예를 들면 '뉴욕에서도 그런 적이 있다'는 기사를 보고. 남편에 대한 불신. 한 번도 안 들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렇지만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아냐, 그럴 리가 없어라고 생각했다.
남편의 변(辯)은 뭐였나? 긴말 안 했다. 나한테 존댓말을 안 쓰는데 존댓말을 쓰면서 그러더라. "당신에게 깊은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하다. 내 결백이 밝혀지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그때까지 나를 믿어다오." 흔들리다가, 이내 다잡았다.
학교에서는 그 사건 전까지 윤창중의 부인이라는 걸 몰랐다던데. 맞나? 우리 남편이 누구네, 이런 얘기를 안 했다. 괜히 남편 자랑하는 것 같아서. 사건 이후에도 '학교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계속 일을 할 수 있겠다' 하면서 스스로 위안도 했었다. 적어도 선생님들이 수군거릴 일을 없었으니까. 그런데 기자들이 학교에 찾아오면서 알려졌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인터뷰를 시도했더라. 반 학생이 그러더라. "아까 기자들이 찾아와서 선생님 어떤 사람이냐고 묻기에 좋게 얘기했어요"라고. 해맑게 답하는 아이들을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 어느 날 교감 선생님이 불러 묻더라. 왜 자꾸 기자들이 오냐고. 이러저러하다고 했더니 한바탕 놀라셨다.
결국 작년 2월에 퇴직했다. 30년 넘게 몸담은 교직에서 물러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 (옅은 미소) 동료 교사들이 환송식을 해준다고 했는데 마다했다. 괜히 좀 그렇더라. 그저 퇴근하듯이 퇴임했다. 집에 와서 남편이 기념촬영을 해주겠다고 해서 (사진) 한 장 남긴 게 나름의 퇴임식이었다. 직장동료나 친구들이 교감을 해라, 교장까지 해라, 왜 승진에 욕심이 없느냐고도 했었는데…. 사실 그때마다 그랬다. 농반으로. 그걸 뭣하러 하느냐. 내 남편이 나를 지켜주는데, 라고. 또 그런 자리에 오르면 아무래도 가정에 소홀하게 되고, 반 학생들과 살 부대낄 일도 적어지니까.
결혼을 후회한 적 없나. 흔히 그런 질문 있잖나. 다시 태어나도 이 사람과 결혼하겠느냐는. 그때 '아니요'라고 하는 사람들, 왜 그럴까 싶을 정도로… 후회한 적 한 번도 없다.
남편 에세이에 이런 구절이 있다. "윤창중 인생엔 세 여인이 있다. 엄마, 할머니, 그리고 처의 큰엄마. 그 셋에겐 남편 덕 없이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윤창중은 여성에 대해 기본적인 연민을 갖고 산다"라는. 혹시 부인께서도 그 대열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남편 덕 없는 여인. 남편 덕 없다는 생각? 한 적 없다. 지난 30년 동안 정말 평탄하게 살았다. 시댁 식구들 때문에 고생한 적도 없고. 친구들도 그런다. "넌 그 일만 없었더라면 정말 무난하게, 편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아들 이름) 아빠가 너한테 잘했던 거 생각하면서 이럴 때일수록 의지가 돼주라"고. 친구들도 다 이 사람 믿었다. 내 여동생은 형부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여동생은 10년 동안 우리와 같이 살기도 했다. 여동생이 학교도 집에서 멀고, 내 오빠가 결혼을 하고 나서 올케가 어머니 모신다고 하고 그런 상황일 때가 있었다. (남편이) 나한테 묻지도 않고 "처제, 우리 집에 가서 살자"라고 했다. 혼자 계셔 힘들었던 내 큰어머니도 흔쾌히 모시자고 한 사람이다. 그래서 서울 식구치고는 (많은) 6명 대가족이 살았다. 집에서 '윤 서방'은 항상 믿음직한 존재였다.
친정엄마는 어땠나. 보도 직후 어떤 말을 하던가. 엄마가 나한테 전화를 안 하시고 언니를 통해서 내 안부를 물으시더라. 나도 면목이 없어서 전화를 못 드렸다. 그렇게 그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으셨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그러시더라. "네가 윤 서방을 믿어줘야지. 네가 힘이 돼줘야지. 네가 정신을 차려야지…." 엄마가 올해로 여든일곱이다. 정정하시다. (그릇이) 굉장히 크신 분이다.
지난 시간들이 준 결속력이 대단해 보인다. 어떤 남편이었나. 중매로 만나 연애 4개월 만에 결혼했다. 연애기간은 짧았지만 좋은 남편이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자신감이 넘쳤고, 신사적이고 깍듯했다. 이 정도면 내 인생을 맡겨도 되겠다, 하는 기대감이 들더라. 여자 맘고생 시키는 남자들 있잖나. 술을 많이 먹는다거나 잡기에 능한…. 뭐랄까. 화투, 마작, 게임 같은 노름에 빠진다거나. 보증을 잘못 선다거나, 화를 심하게 낸다거나, 친정 식구 데리고 산다고 생색을 낸다거나,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가정이 우선이었고, 그 외에는 오로지 운동. 골프도 안 쳤다. 그저 헬스장. 주말에는 항상 나를 데리고 다니려고 했다. 등산을 가거나 어디 맛있는 델 다녀왔다면서 꼭 나를 데리고 다시 가곤 했다. 남편이 먼저 나가자, 나가자 하고 나는 피곤한데 그냥 쉬자, 하는 편이었다. …. 그렇게 살았다. 30년 동안 평탄하게…. 그러다 아주 큰 거 하나로 갚긴 했지만.
아들이 둘이다. 다 컸고. 아들 반응은 어땠나. 매주 일요일 저녁에 식사를 같이하는 게 우리 집 전통이었다. 대화를 많이 했다. 아들은 항상 아버지를 믿는다고 했다. 두 아들이 아빠를 지켰다.
둘은 뭘 하나. 큰아들은 일본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쓰고 있다. 둘째는 로펌에 있다. 두 아들 모두 한때 기자를 꿈꿨다. 특히 둘째는 열렬히 기자가 되길 바랐다. 신문사에서 인턴까지 했다. 그 사건 당시 기자들 모습을 보고 스스로 꿈을 포기하더라.
‘그 집’은 화실을 방불케 했다. 50~60호짜리 큰 그림 70여 점이 걸려 있거나 바닥에 놓여 있기도 했다. 윤 씨가 칩거 1년 반쯤 됐을 때부터 그린 그림이다. 남편이 잠깐 서재에 가 있는 동안 부인 이 씨는 그림을 둘러보며 “초반에는 원색과 직선 위주의 강한 그림을 그리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곡선 위주의 부드러운 색채를 쓰더라”고 말했다. 벽에 걸린 것 중엔 한 소녀가 가방을 들고 다소곳이 서 있는 그림도 있었다. “부인을 그린 것이냐”고 물었더니 “나도 난 줄 알았는데, 대학교 시절 첫사랑 여인이라더라”라고 했다.
앞서 ‘신(神)’ 얘기를 하던데, 어떤 신을 말하는 건가?
칩거 첫 1년 동안은 현관 밖을 딱 세 번 나갔다. 그중 한 번이 병원에 갈 때였다. 칩거 7개월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2014년 1월 7일, 새벽 2시. 화장실에 갔다. 갑자기 엄청나게 하혈을 하더라. 마치 와인 오크통을 변기에 거꾸로 처박은 것처럼. 변기 밖으로 피가 넘쳐흐를 정도였다.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모든 걸 잃었는데, 건강마저 잃게 하십니까… 하면서. 아내와 응급실에 갔다. 병원에서 출혈 부위를 발견하지 못해서 소장 CT를 했는데, 소화기내과 레지던트가 자기 전공분야도 아닌 신장에서 막 크기 시작하는 1.7㎝의 암세포를 발견했다. 비뇨기과 의사가 아니라 소화기내과 레지던트가.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지금 이 시련을 겪고 있는 게, 신이 주신 게 아니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싶더라.
췌장암으로 알려졌는데 신장암인가?
신장암 1기 중 초기였다. 만약 출혈이 없었다면 발견 못 한 채로 살았겠지. 더군다나 신장암은 쉽게 발견되는 게 아니라잖나. 그런 생각도 해봤다. 대변인을 계속했더라면, 죽음으로 갔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모든 게 새롭게 보이더라. 창세기 1장 1절이 와 닿더라. 어느 날은 꿈을 꿨다. 꿈에서 대사 하나가 스쳤다. 윤창중은 원래 죽을 목숨이었는데 사는 거라고. 다음 날 일어나서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내가 죽을 운명인데, 죽음을 피하는 대신 이런 시련 있는 삶을 받은 거라면, 이 시련이 너무 가혹한 건 아니지 않을까, 우리 그렇게 위로를 합시다”라고.
종교는 원래 없었나?
신이 어딨어, 했던 사람이다. 신문사 다닐 때는 일요일에도 출근을 했다. 일요일. 교회 가는 후배들 있잖나. 솔직히 이해를 못 했다. 괜히 나약하게 보이더라. 왜 신에 기댈까. 나 스스로 최선을 다하면 못 할 게 뭐 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오만했더라.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면서 신의 존재를 믿게 됐다.
사람들이 묻기에 ‘무교’라고 답했더니 누군가 그러더라. “무난하게 사셨나 봐요.” 그땐 그게 무슨 말이지 싶었다. 목 놓아 우는 날이 거듭되고,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서 울음을 억지로 참았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꾹꾹 참으니까 그게 출퇴근길 차 안에서 터지더라. 차 안에서 탈진할 정도로 울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그런 영역이 있구나….’ 그래서 (남편과) 비슷한 시기에 (종교를) 갖게 됐다.
같이 일요일에 교회를 가겠네.
그밖에 둘이 뭘 하며 보냈나.
주로 평일에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다. 주말에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림 스케치 여행을 다닌 셈이다. 어느 지역에 가서 하염없이 걸으면서 풍경을 보고 스케치를 하는 거다. 돌아와서 그걸 보며 유화작업도 하고. 둘 다 일할 때는 여행을 많이 못 다녔다.
그 사건 이후에 부부 사이가 오히려 친밀해졌겠다.
그렇지. 이렇게 24시간 동안 같이 있은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뭘 해야 할까, 치열하게 고민하던 때 ‘그래 맞아.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들었었지’ 싶었다. 고향 충남 강경에서 백합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창중이는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가 있었다. 극장 간판에 그림 그리는 사람들 있잖나. 그 사람들 구경 가고 부러워할 정도로 그림을 좋아했다. 미대를 가고 싶단 생각도 했는데 당시 교육공무원이던 아버지 밑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려볼까? 하면서 첫 작품을 완성한 게 2015년 1월 9일. 두 시간 만에 그리고 나서 내 이름을 사인했을 때, 그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도 다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구나, 싶었다.
요즘 낙이 뭔가?
작은아들이 곧 결혼을 한다. 며느리 볼 날이 낙이다. 내가 딸이 없으니까. 며느리가 굉장히 성품이 착하다. 며느리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웃음) 나와 잘 맞을 것 같고. 가까이 지내면서 좋은 말동무가 돼줄 것 같다. 큰아들은 내년에 박사 마치고 들어올 거다. 큰아이 볼 생각. 그런 게 가장 기대된다.
글과 그림이다. 그 둘로 나만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보고 싶다. 여기서 난 수익금을 국가를 위해 써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생각도 있다. 절망을 이겨낸 롤모델이 되고 싶다. 그런 거 있잖나. ‘윤창중도 사는데… (나라고 못 살겠나)’. ‘낙’이라고 해서 하는 말인데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에 지금 나만큼 행복한 사람이 있어?’라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참 행복하다.
그러게. 역설적이긴 하다. 행복의 근원이 뭔가?
3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불행을 대하는 눈이다. 불행을 극복하는 것도 행복이구나. 이래서 수도자가 수도의 길을 걷는구나. 인생은 악전고투다. 내 팔자가 드세기 때문에 더 큰 악전고투가 올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거다. 좌절과 절망? 이미 개한테 줬다. 나는 ‘그 사건’ 전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어떻게 나보다 행복한 사람이 있을 수 있어? 난 없다고 보는데?
결과적으로 내 선택이 몰락으로 끝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후회 안 한다. 만약에 내가 박근혜 대통령 정부에, 당선자 시절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박근혜 정부가 정권 인수 과정을 원만하게 통과했을 것인가. 나는 박근혜 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내 진액을 다 뽑는 헌신을 했다. 온몸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옹호했다. 지켜냈다. 박근혜 대통령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에, 나 개인 혼자 광야에 서서 그걸 막아냈다고 생각하고, 비록 내가 불명예 퇴진을 했지만, 비록 비운으로 종말을 맞이했지만…! 내가 만약에 그 선택(대변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나는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감사하다.
물론, 지금까지도. 비록 내 역량을 끝까지 발휘하지 못하고 끝났지만, 박근혜 대통령께서 나를 첫 번째로 기용하신 것. 그건 윤창중 인생사에 있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내 마음 속에 새겨두고 있다.
추호도 없다. 비록 3년 넘게 나 홀로 이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권력무상이라는 걸 뼈저리게 절감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원망, 추호도 없다.
그건 쓰지 말자. 그건 진짜로 쓰지 말자. 제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 얘기한 건 요 정도로만.
(웃음 후 한참 침묵) 글쎄, 나는 안 했으면 좋겠다. 본인이 한 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안 했으면 좋겠다.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수행하던 윤창중(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재미교포 여성 인턴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사건이다. 피해 여성은 미국 경찰에 “윤 전 대변인이 엉덩이를 움켜쥐는(Grab) 등의 추행을 저질렀다”고 신고했다. 사건 직후인 5월 9일, 윤 전 대변인은 경질됐다. 민정수석실의 조사에서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경질 이틀 후인 11일 자청한 기자회견에선 “허리를 한번 툭 친 것뿐”이라며 본인을 둘러싼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추행 의혹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여러 증언을 통해 점점 구체화됐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서 사과했지만 스캔들은 진정되지 않았다.
윤 전 대변인은 기자회견 당일인 5월 11일부터 김포 자택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올해 5월 7~8일. 3년의 공소시효가 끝났다. 윤 씨와 변호인 측은 “3년간 미국 경찰에서 (출석하라는) 전화 한 통 안 왔다. 내가 결백하다는 게 증명됐다”고 주장하지만, “미국 경찰에서 경범죄로 분류해 사실상 범죄인인도 대상이 아니다. 윤 씨가 가서 조사를 받지 않는 이상 부를 방법이 없다”라는 전문가의 분석도 있는 상황이다.
또 한 뉴스채널에서는 “워싱턴 D.C. 경찰에 직접 연락해본 결과 윤 전 대변인의 사건은 아직까지 ‘오픈케이스’(현재 진행 중인 유효한 수사)라고 한다”라는 내용을 보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