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희극인 배삼룡·곽규석과 60~70년대 코미디 전성기 이끌어
"내가 재미있게 말하면 너희들은 웃었지. 슬플 때에도 말이야.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슬프겠지. 내가 없으면 누가 웃겨주니?"
고인은 서영춘·배삼룡과 함께 1970년대를 대표하는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의 간판이었다. 1969년부터 1985년까지 MBC에서 방송한 이 프로그램에 786회 개근하며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으로 이어지는 '최장 길이' 유행어를 내놨다. 70자가 넘었다. 물건 훔치러 집에 들어왔던 좀도둑이 넋을 잃고 방송을 봤고, 도둑 들었거나 말거나 집주인은 박장대소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는 우스개가 돌던 시절이다.
그는 고(故) 배삼룡·곽규석·이기동 등의 1세대 희극인들과 함께 1960~1970년대 한국 코미디 전성기를 이끌었다.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죽어가는 거지 왕초가 부하들에게 장안의 부잣집 생일, 제삿날, 혼인 날짜를 알려주는 '위대한 유산', 상놈끼리 서로 양반이라고 속이며 혼인을 맺으려고 하는 '양반 인사법' 같은 콩트를 펼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코미디언은 당시 광고 섭외 1순위였다. 고인은 곽규석과 함께 라면 광고에 출연해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코미디 공연을 해야 했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지만 희극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 제한된 소재는 벽이었다. 코미디에 의사를 등장시키면 의사협회가 항의하고, 거지를 출연시키면 '한국에는 거지가 없는데 왜 거지가 코미디에 나오냐'는 항의를 받았다. 고인은 한 인터뷰에서 "그럼 도둑만 등장시켜야 하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예능 작가가 없는 시기라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2~3년 동안 직접 대본을 써야 했다.
그는 아들 4형제가 코미디언 아버지를 우습게 알까봐 TV를 보지 못하게 했다고도 회고했다. 코미디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구봉서가 열심을 다한 이유다. 정석희 TV평론가는 "구봉서는 정극 배우로도 활동하면서 희극인을 낮춰보던 당시 분위기를 바꿔놓았다"고 했다. 그는 희극과 정극을 가리지 않고 400편 가까이 되는 영화에 출연했다. 고인의 별명이었던 '막둥이'도 영화 '오부자(1958)'에서 4형제 중 막내 역할을 맡으며 붙었다. 1970년대 김성진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코미디를 모두 없애겠다고 선언했을 땐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저속한 코미디 한두 개 있다고 코미디를 다 없앨 거면 가끔 교통사고 내는 택시도 모두 없애야 하지 않냐"고 따졌다. 코미디 프로를 폐지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바뀌었다.
고인은 1926년 평양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양친을 따라 상경했다. 1945년 태평양가극단에 들어가면서 연예인 생활을 시작했다. 6·25전쟁 당시에는 장병들에게 위문 공연을 해주는 군예대로 복무했다. 2009년 뇌출혈로 수술을 받기 전까지 배삼룡과 함께한 '그때 그 쑈를 아십니까'(2002)를 비롯해 무대 활동을 이어갔다. 2013년 대중문화예술상인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0년 별세한 배삼룡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그는 배삼룡 빈소에서 "저 놈(배삼룡)이 죽으면 난 친구도 동기도 누구 하나 남지 않는다. 이제는 내 차례"라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였던 그가 영면한 27일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에서 한창 연기를 준비하던 후배 코미디언들은 검은 리본을 달고 단체로 묵념했다. 송해·윤복희를 비롯해 유재석·강호동 등 후배 희극인들이 서울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애도했다. 개그맨 전유성은 "힘들고 못살고 추웠던 시절에 서민들이 웃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코미디 덕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웃음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력을 믿었다. 1991년 일본에서 유학하는 개그맨 이홍렬에게 보낸 편지에 '코미디언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연장시킨다는데 자네가 귀국한다면 평균 수명이 100세는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그가 악극단 활동을 시작한 1945년 한국인 평균수명(기대 수명)은 35세 전후였다. WHO(세계보건기구)는 지난 6월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81.2세로 추산했다. 그가 전해준 웃음이 45년이나 늘어난 평균수명에 한몫했을 것이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잘못된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는 진실이 담긴 코미디를 해야 한다"던 대한민국의 '찰리 채플린'은 가을비 속에 우리 곁을 떠났다.
[구봉서, "후배 코미디언들이 돈만 쫓아다니지 않았으면…요즘 개그는 말장난이 많다"]
암울했던 시절 웃음으로 고단한 서민들 삶을 위로했던 '구봉서'
요즘으로 치면 그는 개그맨, 가수, 프로그램 진행자, 예능 기획자를 겸했다. 1956년 데뷔해 영화 400여 편에 출연한 연기자이기도 했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 '막둥이'라는 별명도 영화에서 얻은 것이다. 1958년 히트작인 '오부자'에서 막둥이로 출연한 것이 계기였다. '오부자'는 당시 관객이 몰려 상영 극장이 부서질까 걱정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965년엔 영화 '광야의 결사대'를 찍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다.
▶구봉서는 바보스럽고 망가지는 연기를 해야 하는 코미디언이었지만 그 스스로 "무식하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구봉서는 작가 역할까지 맡았다. '김~수한무' 같은 코미디 소재도 책을 읽다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1997년엔 '코미디 위의 인생'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웃음이 깔려 있는데, 그걸 딱 제치면 거기서 슬픔이 나와야 해요. 코미디가 그런 거야." 구봉서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코미디는 잘못된 정치와 사회를 은연중 비꼬고 비판하는 풍자여야 한다고도 했다. 구봉서는 1990년대 한 후배 개그맨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 코미디언은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연장시키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시원한 한 방 웃음이 건강에 유익하다는 것은 여러 의학 연구의 공통적 결론이다. 그가 1945년 악극단 생활을 시작으로 70여 년 국민에게 선사한 웃음은 국민 수명을 늘려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기사더보기
[생전 인터뷰] "평생 웃겼지만… 우습게 보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동갑내기 배우인 배삼룡에 대한 구봉서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는 배삼룡이 병상에서 의식을 잃자 병실에 찾아가 "야 인마, 빨리 죽어. 네가 빨리 죽어야 네 딸들이 고생을 안 하지"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통곡했었다. 그 얘기를 꺼내니 구봉서는 "의식이 없어서 못 듣고 말도 못하니까 '빨리 죽으라'고 그랬지, 아니었으면 그랬겠느냐"고 쓰게 웃었다.
구봉서는 1997년 펴낸 자서전 '코미디 위의 인생'에서 배삼룡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정말 타고난 광대였다. 사람들은 배삼룡이 바보스러운 말을 하는 걸 보며 우월감을 느꼈다. 그런데 일부러 그런 건지 정말로 못하는 건지 모르지만 그는 대사를 외우지 못했다. 대사를 너무 못 외워 극 중 가족 이름도 다르게 부르고, '탕수육 한 접시에 고량주 다섯 병' 해야 할 걸 '탕수육 다섯 병에 고량주 한 접시' 하기 일쑤였다. 시청자들은 그가 일부러 그러는 줄 알고 더 많이 웃었다. 상대 코미디언은 예측할 수 없는 그의 연기와 대사에 맞추느라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는 과장도 잘해서 그의 말은 언제나 10분의 1로 줄어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화폐개혁'이라고 부르곤 했다."
―배삼룡씨보다 곽규석씨와 콤비였다면서요.
"그렇죠. 농심 라면 광고에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했던 것도 규석이죠. 한 10년 전쯤엔가 제가 규석이한테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를 늙은 얼굴로 다시 한 번 하자고 했어요. 걔도 좋다고 하고 농심에서도 좋다 했는데, 그만 규석이가 아프기 시작했죠."(미국서 목회를 하던 곽규석은 99년 71세로 숨졌다)
1926년 평양서 태어난 구봉서는 첫돌을 서울에서 맞은 사실상 서울사람이다. 치과 의료기기상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교동초등학교 시절 이미 라디오에 출연해 '국어 독본'이란 프로그램에서 책 낭송을 했다. 물론 이때 '국어'는 일본어였다. 어려서 오르간을 연주했고, 고교 때 아코디언을 배운 그는 광복되던 해 대동상고를 졸업하고 현제명 선생의 사숙(私塾)에서 그를 사사한 성악가 지망생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당시 최고 인기가수 김정구와 그의 친형 김용환이 이끌던 '태평양 가극단'에 들어간 것이 그 삶의 물줄기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유명한 극단에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는 데 들떠서 아버지께 '딱 사흘만 한다'는 약속을 하고 떠난 게 그냥 내 길이 됐어요. 사흘이 나흘 되고, 나흘이 열흘 된 거죠." 여전히 그는 음악을 사랑한다. 악기는 더 이상 연주하지 않지만 특히 라틴 음악을 좋아하는 그는,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라틴 음악을 들을 때가 많다고 했다.
―코믹 연기는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마포에 있던 도화극장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는데, 갑자기 조연을 맡은 희극배우가 사라진 거예요. 단장이 무조건 나더러 대신 무대에 올라가라는데 정신없이 하고 내려오니 한 선배가 '잘했다'고 칭찬을 해요. 그 길로 영원히 발목을 잡힌 거죠."
―어려서 꿈은 책방 주인이었다면서요.
"나는 대학을 못 다녔지만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요. 그건 모두 어려서부터 읽었던 책 덕분입니다. 초등학교 때 이미 '레미제라블'을 일본어로 읽었어요. 도스토옙스키도 모두 일본어로 읽었죠. 지금도 일본 문예지를 많이 읽어요. '문예춘추'는 매달 꼬박꼬박 읽다가 최근엔 그렇게 못해요. 일본에서 매달 책을 보내주던 친구가 죽었거든. 그래서 요즘엔 문고판 소설을 많이 읽지요. 책을 꾸준히 읽었기 때문에 '웃으면 복이 와요' 원고도 쓸 수 있었어요."
―'웃으면 복이 와요' 원고를 직접 썼습니까.
"그럼요. 한 2, 3년 썼죠. 그땐 코미디 작가가 없었거든."
―그럼 그때 '배 수한무…'로 시작하는 히트작도 직접 썼습니까.
"내가 썼지요. 일본책 뒤져서 쓴 거예요. 수한무(壽限無),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이게 다 책에 나오는 거죠."
―그럼 '사까이야소 호리호리야소'나 '모리모리 셋뽀리깡'도 일본 책에 나오는 겁니까.
"하하하. 그건 그냥 엉터리로 지어낸 거지. '난다이난다이 지기지기난다이'도 지어낸 거고. 아니, 이 사람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당시에 그걸 본 사람들은 모두 기억하죠. '양반 인사법'도 엄청난 히트였잖아요.
"그건 죽은 박시명이 쓴 원고를 내가 윤색했어요."
'양반 인사법'은 두 상민이 양반이라고 속여 혼담을 주고받는데 등을 맞댄 채 양반 말투를 적은 쪽지를 보며 대화를 하는 내용의 코미디다. 구봉서와 배삼룡이 각각 혼주이고, 박시명이 인사법을 적어 준다. 그 시작은 이렇다. ▲구봉서: 별 밑에 인사법! ▲배삼룡: 그건 제목이오. ▲구: 처음 면상하겠습니다. ▲배: 상면이오. 면상이 아니라. ▲구: 아명은 일봉이라 합니다. ▲배: 아명은…(쪽지를 보여주며) 이거 무슨 글자요? ▲구: 심하다, 심해. ▲배: 아명은 심해라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쯤 구봉서의 얼굴에 전성기 때 그 웃음이 피어났다. 그는 "약이 올라서 옛날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여전히 옛날을 생각하면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웃으면 복이 와요' 이전엔 악극단 활동만 했습니까.
"극단에서 악기 연주도 하고 희극 배우도 하고, 6·25 때는 라디오 진행도 했어요. '홀쭉이' 양석천씨하고 둘이 했었죠. 무슨 내용이었는지 다 잊어버렸는데, 하나만은 기억해요.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 아나운서는 참 예뻤다는 거. 그때 스튜디오에 가면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입은 여자 아나운서가 있었는데, 참 예뻤어요. 하하하. 그리고 KBS 개국, TBC 개국 때도 방송 출연했죠. 개국 때 초대받지 못한 건 이번에 TV조선 뿐일걸 아마?"
―'영화배우 구봉서'는 요즘 사람들에겐 덜 알려졌죠.
"1956년에 '애정파도'로 영화에 데뷔해, 400편 넘게 출연했어요. 그중에서도 1958년에 찍은 '오부자'가 내 출세작이지요. 을지로4가에 있던 국도극장에서 개봉했는데, 제작자가 돈을 엄청나게 벌어서 '국도극장 얼마면 살 수 있느냐'고 말하고 다녔으니까."
'오부자'는 4형제를 장가보내는 아버지 이야기를 다룬 코믹 드라마로, 구봉서는 '영·웅·호·걸' 4형제 가운데 막내인 '걸' 역할을 맡았다. 그때 붙은 별명이 '막둥이'로,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애칭이 됐다. 구봉서는 "그때 처음으로 '인기'라는 것이 내게 있음을 실감했고 '배우도 화장실에 가나요?' 같은 소녀팬들의 질문도 받아봤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코미디 없애려거든 택시도 없애라'고 했다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70년대에 문화공보부 장관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코미디를 모두 없앤다고 했거든요. 그때 마침 박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 나하고 곽규석이 갔어요. 내가 '저속한 코미디 한두 개 있다고 코미디를 다 없앨 거면, 가끔 교통사고 내는 택시도 모두 없애야겠네요' 식으로 말했죠.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웃더라고요. 그래서 없던 일이 됐죠."
―'웃으면 복이 와요'는 1985년에 폐지됐죠.
"좋은 작품이 안 나오더라고요. 나도 지쳤고. 우리가 아이디어 다 짜내서 주면 작가가 그거 엮어서 고료 받고, 우리한테는 여전히 얼마 안 나오고. 코미디를 너무 우습게 봐요. 지금도 개그맨들 하는 거, 그거 다 걔들이 직접 하는 거예요. 얼마나 받고 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사업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했죠. 한 번 했다가 망했어요. 처남이 하는 재생 플라스틱 사업에 돈을 대고 '회장' 직함까지 얻어서 우쭐했었죠. 그리고는 오일쇼크가 와서 완전히 망해 집까지 날리고…. 그 뒤로는 절대 욕심 때문에 내 일이 아닌 것에 덤비지 않아요."
―한국을 대표하는 희극배우였으니 무척 재미있는 아버지였겠네요.
"그 반대였죠. 나는 아주 재미없는 남편에다가 무서운 아버지였어요. 아들 넷을 뒀는데, 어렸을 때 코미디를 일절 보지 못하게 했어요. 아이들 친구들이 코미디언 흉내를 내고 내 이름을 친구 부르듯이 했으니까요. 나는 아이들이 아버지인 나를 우습게 알까 걱정했어요. 그래서 코미디를 못 보게 했죠. 그런데 아이들이 내가 아버지인 걸 감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친구들이 '너희 아버지가 코미디언 구봉서냐?'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아니, 이름만 같은 구봉서야'라고 했거든요. 그렇지만 결국엔 알려질 수밖에 없었어요. 아이들은 친구들이 '너희 아버지 되게 웃긴다'고 말하면 '그게 웃기는 거냐? 연기하는 거지'라고 쏘아붙이고, 때론 그런 이유로 친구와 싸우고 들어오곤 했지요."
―지금껏 살면서 언제가 가장 힘들었습니까.
"모르는 사람이 '얼마 줄 테니 한번 웃겨보시오'라고 말할 때예요. 정말 그럴 때는 그 사람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웠어요. 아이가 어릴 때 소풍에 잠깐 들렀더니 선생님도 같은 반 아이들에게 '구봉서 아저씨가 오셨어요. 우리 재미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라고 하더군요. 코미디언이라고 언제나 누구 앞에서나 웃겨야 하는 건 아니죠."
―그럴 땐 어떻게 힘들고 괴로운 것을 이겨냈습니까.
"이기긴 뭘 이겨요. 그냥 꾹 참는 거죠. 아니면 술 한잔 먹고 잊어버리거나."
그렇게 말했지만 희극배우란 직업에 대한 그의 긍지는 대단하다. 작년에 개그맨 이홍렬이 공개해서 화제가 된 편지가 있다. 이홍렬이 일본에서 공부하던 1991년 구봉서로부터 받은 것으로, 편지지 5장을 꼬박 채운 이 글 말미에는 "한국의 코미디언은 한국인의 평균수명을 연장시키는 사람들"이라며 "자네가 귀국하면 한국인 평균수명이 100세는 되리라 생각하네"라는 구절이 있다.
―노년을 보내는 데 종교가 큰 힘이 됩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기독교를 정말 믿기 시작한 건 마흔이 넘어서예요. 그때 우리 집 안방에서 시작한 성경공부에 고인이 된 하용조 목사가 전도사로 참여했고, 남진·서수남·윤복희·정훈희·김자옥도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우리 집 안방이 좁아지면서 세운 게 연예인교회예요." 1976년 서대문에서 시작한 연예인교회는 현재 '예능교회'로 이름을 바뀌어 수많은 연예인이 일요일마다 찾는 곳이 됐다.
―아프리카에 '구봉서 학교'가 있다면서요.
"글쎄, 그렇게 부른다고 하네요. 다리가 아파서 가보지도 못했는데…." 부인 정씨가 옆에서 거들었다. "전도집회 나가서 사례받은 걸 꾸준히 기부했더니 그 돈으로 우간다에 학교를 세웠대요. 너무 멀어서 못 가봤는데, 그 학교에 그런 이름이 붙었대요."
―사람이 행복해서 웃는 겁니까, 아니면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까.
"…웃기 때문에 행복한 거예요. 자꾸 웃고, 웃을 일을 만들고, 웃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거죠. 말 그대로 웃어야 복이 오는 거예요."
―희극배우로 데뷔한 지 67년이 됐습니다. 그 외길 인생은 희극이었습니까.
"글쎄요… 워낙 내 인생이 비빔밥이어서 한 가지로 말할 수가 있나…."
구봉서는 안방 침대 옆에 걸린 자신의 사진을 가리키며 "나 죽으면 저 사진 나올 거요"라고 말했다. 배삼룡의 부음을 듣고 그가 한 말도 "이제 내 차례인가 싶다"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일요일엔 온 가족과 점심을 함께하며 고요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명대사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구봉서는 총을 맞은 뒤, "죽으면 안 돼!"라고 외치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금 죽으면 너희를 누가 웃기니?" ▷전체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