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 억만장자’가 백악관 입성에 성공했다. CNN은 9일(현지시각) 치러진 45대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꺾고 승리했다고 보도했다. 선거당원 583명 중 과반인 270명을 넘겼다.

트럼프 후보는 자신의 정치적 텃밭을 지키고, 경합지로 불렸던 펜실베니아주나 플로리다주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펜실베니아주에서 공화당 후보 지지율이 우세하게 나온 것은 1988년 이후 32년만이다. 위슨콘신주에서도 1984년 이후 36년만에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결과가 나왔다. 대이변이다. 대선 투표가 끝난 직후까지만해도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우세할 것으로 점쳤던 외신들도 이번 결과를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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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어떻게 클린턴을 꺾을 수 있었을까. 전문가들은 트럼프 후보의 대선 승리 요인으로 소외감, 반감, 반엘리트주의 등을 꼽았다.

① 소외감

미국판 ‘브렉시트’가 트럼프 당선의 원동력이 됐다는 분석이 많다. 트럼프 후보는 미국의 사양화 공업지대 ‘러스트 벨트(오하이오, 펜실베니아 등)’에서부터 승기(勝氣)를 잡았다. 트럼프 후보의 인디애나주 지지율은 57.2%였다. 클린턴 후보의 지지율(37.9%)을 크게 앞섰다.

켄터키 지역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트럼프 후보를 지지한 이들이 전체 62.5%, 클린턴 후보를 지지한 이들이 32.7%였다. 이들 지역에서는 개표 초반부터 트럼프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외신들은 ‘미국판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현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후보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를 폐기하고, 미국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의 송금을 제한하는 등 기존 세계화 질서에 반하는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오히려 이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이 결집되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미국 공업지대 근로자는 NAFTA 같은 협정이 체결되면서 외국의 수입산 물건들이 미국으로 들어오고, 세계화 진행의 일환으로 이주 노동자의 유입이 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는 박탈감이 많았다.

이는 영국이 브렉시트에 찬성한다는 국민투표 결과가 나왔던 때와 맥락이 같다. 당시 영국에서도 현실적으로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쪽으로 국민투표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지 않았지만, 유럽연합(EU) 체제의 과실을 향유하지 못하는 소외된 계층에서 대거 찬성표가 나왔다. CNN은 “‘멕시코산 제품의 35%의 높은 관세를 매기겠다고 주장하는 등 기상천외한 트럼프의 막말이 오히려 지지층을 결집시켰다”고 강조했다.

② 반감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후보 시절 유난히 막말을 즐겼다. 기존 정치권 인사들이나 유력언론, 그리고 유권자들에게 트럼프 후보는 괴짜에 가까웠다. 트럼프가 자주 구사하는 막말은 클린턴 후보처럼 오랜 기간 세련되게 정치 스킬을 갈고 닦은 정치인들이 즐겨쓰는 수사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막말이 지지층을 결집시켰다는 분석이 많다. 기존 정치인들에게 실망감과 반감을 느끼던 유권자들이 트럼프의 막말을 오히려 신선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외신들은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반감이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고, 그 대표 상징이 ‘막말’로 구현됐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의 공고한 지지층은 농촌 지역의 저소득·저학력 백인인데 이들에게 트럼프의 언행이 일종의 ‘쾌감(카타르시스)’을 안겨줬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유권자들이 기존 정치인(힐러리로 대표되는)에 갖는 반감은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나온다. 미국 유권자들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부유하고 힘있는 계층으로부터 미국을 되찾을 지도자'를 가장 중요한 선택 기준으로 삼았다는 여론 조사 결과가 나왔다.

로이터가 이날 미국 50개주에서 투표를 마친 유권자 1만6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기존 기득권에게서 미국을 되찾을 지도자를 기준으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응답률이 75%를 기록했다. 미국 경제가 부자와 힘있는 자들에 유리하게 조작됐다고 생각하는 답은 72%, 기성 정당이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답도 68%를 기록했다.

③ 반엘리트주의

엘리트주의에 신물이 난 사람들이 트럼프 후보 측에 몰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꼽히는 월스트리트에 대한 반감이 컸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 이후 장기화된 경제 불황으로 실업률이 크게 오르는 등 미국인의 삶은 이전보다 팍팍해졌다. 경쟁자인 클린턴 후보는 월가의 장학생으로, 금융권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여기에 클린턴 후보의 비밀주의, 측근 정치 스타일도 잡음을 만들었다.

반면 트럼프는 금융규제와 관련해 모두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업무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글래스 스티걸법(Glass-Steagall Act, 1999년 폐지) 부활에 찬성했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투자은행의 부실이 상업은행으로 확대되면서 위기가 확산된만큼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겸업화에 반대입장을 펴왔다. 이는 월가의 성장을 제약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은 불신을 더욱 키웠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을 재수사하겠다고 나선 것은 결과적으로 트럼프 후보에게 약(藥)으로 작용했다. 선거에 임박해 재수사 방침을 정하고, 결국 선거 이틀 전 무혐의 판결을 내렸지만 FBI발 소식 자체가 클린턴에 대한 반감을 키우고, 트럼프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외신들은 “힐러리 후보가 최종적으로 무혐의를 받으면서 외부에 자신의 트럼프 지지를 드러내지 않는 소극적 정치추제인 ‘샤이(shy) 트럼프’ 세력이 대거 투표장으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