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석 스포츠부장

정유라 후원 프로젝트라는 의심을 받는 대한승마협회의 '중장기 로드맵'을 보면 기가 차는 대목 하나가 있다. 2015년 10월 작성한 이 문건의 '추진 배경'에 있는 '피겨 김연아 같은 승마의 국민적 우상 탄생을 적극 후원한다'는 내용이다. 정유라를 제2의 김연아로 만들겠다는 요지다. 이를 위해 삼성이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4년간 최대 185억원을 지원하도록 유도한다고 한다. 한국 스포츠 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파격 지원금이다. 이미 삼성의 돈 35억원은 최순실·정유라 모녀가 차려놓은 회사로 들어가 있다.

이 항목을 보면서 "하필 김연아 이름을 들먹이나…" 하는 불쾌감과 함께 11년 전인 2005년 10월, 김연아라는 중3 여학생을 처음 만난 당시가 생각났다. 그때 주니어 유망주였던 김연아는 관중 한 명 없는 태릉 실내 빙상장에서 혼자 넘어지고 헉헉대며 훈련 중이었다. 인터뷰하면서 가장 놀란 건 소녀의 살인적 시간표였다. 아침 8시 30분 러닝으로 시작된 하루는 밤 12시 빙상장에서 스케이트화를 벗을 때까지 끊임없는 훈련으로 꽉 차 있었다. 아이는 새벽 2시가 돼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 일이 1년 내내 반복됐다. 감각을 잃기 쉬운 스포츠이기 때문에 쉬는 날은 1년에 사나흘 정도라고 했다. 중학생이 이렇게 가혹한 일정을 치를 수 있는 건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대한승마협회가 작성한 22페이지짜리 중장기 로드맵의 일부. 정유라씨의 출전 종목인 마장마술은 회장사인 삼성에 후원을 요청한다고 적혀 있다.

['피겨 여왕' 김연아는 누구?]

그렇다면 과연 정유라는 로드맵이 제시한 대로 '제2의 김연아'가 될 수 있었을까. 누구보다 승마인들이 여기에 고개를 흔든다. 이번에 올림픽 준비를 한다며 독일로 건너간 정유라는 거의 훈련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현장을 찾은 감독의 증언이다. 승마 전문가들은 '같은 말을 타고 공정한 평가를 할 경우' 정유라의 실력은 국내에서도 10~15위 수준이라고 한다. 김연아는 이미 중학생 시절에 아사다 마오와 함께 '주니어 세계 2강'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올림픽 승마는 완벽하게 유럽이 지배하는 종목이다. 한 승마계 인물은 "우리의 올림픽 메달보다 농구 금메달이 빨리 나올 것"이라는 자조적 농담을 했다. 다른 승마 선수들의 땀과 노력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렇다.

로드맵이 정유라의 모델로 언급한 김연아네는 빠듯한 생활 탓에 모녀가 스케이트와 의상도 직접 수리했다. 같은 올림픽의 꿈을 가졌다는 승마 모녀는 부정한 방법으로 돈부터 긁어모았다. 승마를 위해 돈이 필요했는지, 아니면 승마는 수단이고 돈이 목적이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둘의 행동이 어려움 속에서 꿈을 좇는 모든 스포츠 유망주를 절망에 빠뜨렸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한국에서 체육을 하는 데 돈에다 권력 배경까지 필요하다면 재능 하나를 믿고 도전하는 유망주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도 스포츠에는 정직한 면이 있다. 돈과 배경을 앞세워 부정을 저지르고 잠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걸로 올림픽 메달까지 얻을 순 없다. 한국 대통령이 아니라 세계 대통령을 등에 업어도 올림픽 스코어는 멋대로 못 고친다. 금메달리스트는 돈이 아니라 땀이 만든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고, 앞으로도 같을 것이다. 그나마 승마 모녀의 계획이 중간에 발각돼 중단된 데서 작은 위안을 얻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