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들'도 나이를 먹는다. 핑클과 함께 1990년대를 풍미했던 1세대 원조 걸그룹 S.E.S.의 재결성 기념 콘서트가 열린 지난 30일 서울 세종대 대양홀. 공연 도중에 멤버 슈(35)의 세 살배기 딸 임라희가 꽃다발을 들고 무대로 올라왔다. 라희는 최근 쌍둥이 자매 라율과 함께 육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라둥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이날 공연은 2002년 팀 해체 이후 14년 만에 열린 무대. 그동안 슈는 1남 2녀의 엄마가 됐고, 유진(35)도 딸을 낳았다. 팀 내 유일한 미혼 멤버인 리더 바다(36)는 "아이를 객석에 앉혀놓고 공연하는 국내 첫 걸그룹"이라고 S.E.S.를 소개했다. 공연 직전, 슈는 "새벽까지 안무 연습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엄마 마음이 되어서 '냉장고에 뭐가 남았지' '마트에서 장을 못 봐서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하기 바빴다"고 했다.
유진은 탈색한 연분홍, 바다는 연갈색, 슈는 샛노랑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무대 위에 올라왔다. 유진은 탤런트, 슈는 방송인, 바다는 뮤지컬 배우와 가수로 각각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멤버 3명이 한 무대에 서는 건 해체 이후 처음이다. 바다는 "S.E.S.의 노래 제목처럼 'Dreams Come True(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실감 난다"고 했다. '친구들과 꿈을 모아서 Dreams Come True'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객석(2000여 석)에도 S.E.S.를 상징하는 보라색 야광봉이 물결을 이뤘다.
god부터 젝스키스와 S.E.S.까지 최근 1990년대 아이돌 그룹의 재결합과 복귀가 붐을 이루고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와 연예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통해 1990년대 대중문화가 재조명 받으면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청소년들이 20~30대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예전에 즐겼던 문화들이 부활하는 '복고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날 공연 영상에서도 휴대용 CD 플레이어와 교복 등 추억을 환기하는 소도구들이 유난히 많이 등장했다. 세종대 대양홀은 1998년 S.E.S.의 팬클럽 창단식이 열린 곳이기도 했다. 멤버들은 "공연장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대형 타임머신 같다"고 했다.
1997년 데뷔한 S.E.S.의 활동 기간은 5년으로 그리 길지는 않았다. 하지만 빠른 템포에 트로트의 단조 음계를 얹은 '트로트 댄스'가 주류였던 시절에, 이들은 밝고 경쾌한 유로 댄스(Eurodance)풍의 노래로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오 마이 러브'와 '아임 유어 걸(I'm Your Girl)' '저스트 어 필링(Just A Feeling)' 등 히트곡을 메들리로 부른 후반부에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날 S.E.S. 멤버들은 브라스 3명을 포함해 8명의 밴드와 2명의 여성 코러스의 실연(實演)에 맞춰 3시간 동안 21곡을 불렀다. 멤버들은 "하이힐을 신고 춤추기 힘든 나이가 됐다"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최근 발표한 일부 신곡을 제외하면 대부분 라이브로 소화했다. 살짝 비음(鼻音)이 섞인 목소리로 후렴구에서 어김없이 폭발적인 고음을 터뜨리는 바다의 절창은 여전히 속 시원했다. 이들이 '한국 걸그룹의 롤 모델(role model)'로 불렸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던 무대였다. 디지털 사운드가 홍수를 이루는 시대에 원조 아이돌의 '아날로그 사운드'는 신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