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와 '잔니 스키키'
쓰디쓴 현실 속 낭만적인 '황금빛 선율' 흐르다
골목길마다 사투리가 하나씩 존재한다는 이탈리아지만 그래도 엄연히 표준어라는 것이 있다. 그건 수도 로마의 말도 아니고,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나폴리 방언도 아니다. 바로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중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어다. 아마도 대시인 단테 알리기에리 덕분일 것이다.
그가 쓴 불후의 명작 '신곡'이 온 이탈리아에 퍼져 토스카나어의 정밀한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기 때문이다. 특히 '신곡'의 첫 문장은 지금도 모든 이탈리아인이 암송하고 있을 정도로 찬연한 명문이다. '생의 교차로 한가운데에서 바른 길을 벗어나 버린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칠흑같이 어두운 숲 속에 있더라'
'신곡'에는 세 가지 사후 세계가 등장한다.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이다. 600여년 뒤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가 이런 세계관을 그대로 이어받아 '일 트리티코(3부작)'라는 연작 오페라를 썼다. 파리 센 강변 화물 잡역부의 삶을 다룬 '외투'는 지옥, 중부 이탈리아 시에나 인근의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죽음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수녀 안젤리카'는 연옥편에 해당한다. 마지막 '잔니 스키키'가 가장 유명한데, 중세 피렌체를 배경으로 어느 가문의 유산 다툼을 블랙 코미디풍으로 다룬 이 작품은 말하자면 천국이다.
피렌체의 부호 부오조 도나티가 사망하고 그의 유산을 챙기려 주변 친척들이 모여든다. 그런데 유언장을 열어보니 유산 전액이 수도원에 기부된 것 아닌가! 친척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누군가의 제안에 따라 피렌체 최고의 해결사로 이름 높은 쟈니 스키키를 불러온다.
스키키는 딸 라우레타와 함께 도착한다. 마침 그녀의 약혼자 리누치오도 삼촌 도나티의 유산 분배에 몫이 좀 있었다. 평소 온갖 수상쩍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스키키지만 자식 앞에서는 아무래도 지저분한 '직업적 현실'을 보여주기 꺼려 한다. 그러나 오히려 아버지의 등을 떠미는 건 딸이다. 이때 라우레타가 노래하는 아리아가 저 유명한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O mio babbino caro)'다. 제목과 달리 실제 내용은 그렇게 사랑스럽지는 않다. 지극한 효심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귀여운 협박이 가미된 딸의 재밌는 투정이다.
"사랑하는 아빠, 남자 친구 리누치오와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그가 빈털터리라는 거 나도 알아요.) 그래도 잘 생겼잖아요. 그러니 도와주세요. 아빠가 이 결혼 허락 안 해 주면 나 베키오 다리 위에서 아르노강으로 확 뛰어들고 말 거야!" ▷기사 더보기
소렌토와 엔리코 카루소
천국 같은 땅, 소렌토서 들려오는 위대한 목소리 '카루소'
나폴리에서 출발해 구불거리는 도로를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달리면 지중해의 평화와 고요, 아련한 동경을 상징하는 천국과도 같은 땅 소렌토에 도착하게 된다. 칸초네 '돌아오라 소렌토로' 덕분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곳이다. 1902년에 발표된 이 곡은 특유의 달큰하고 낙천적인 나폴리 방언과 찬란한 태양처럼 유려하고 명징하게 빛나는 선율 덕분에 전 세계인이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다.
그리고 20세기 말, 또 하나의 위대한 칸초네가 이 도시를 배경으로 태어났다. 바로 '카루소(Caruso)'다. 노래의 제목은 20세기 초엽 세계 최고의 테너였던 엔리코 카루소(1873~1921)를 가리킨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가 낳은 가장 위대한 테너요, 역사상 최초의 국제적인 오페라 가수였다.
나폴리의 허름한 뒷골목에서 태어나 카루소는 온갖 멸시와 차별을 딛고 오페라 가수로 데뷔한다. 나폴리 인근의 시골 극장 카제르타에서 출발해 곧이어 나폴리 중심부로, 로마와 베네치아로 기념비적인 성공기를 써내려갔다. '오페라의 종가' 밀라노 라 스칼라에 입성한 그는 그곳에서도 단숨에 최고 테너가 된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어떤 성악가도 누려보지 못한 권세에도 카루소는 한창나이인 40대에 치명적인 질병인 늑막염에 걸리고 만다. 시름에 젖은 그가 회복을 갈망하며 요양지로 선택한 곳은 소렌토의 아름다운 해변가에 위치한 빅토리아 호텔. 그곳 발코니에 앉으면 나폴리의 아름다운 만안(灣岸)과 베수비오산의 부드러운 그림자가 그대로 보였다. 그러나 테너는 이 아름다운 정경을 얼마 즐기지 못했다. 겨우 마흔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리고 60여 년이 흐른 1986년 어느 날, 카루소가 마지막을 보냈던 그 호텔 그 방에 당대 이탈리아 최고 싱어송라이터 루치오 달라(1943~2012)가 찾아왔다. 창문을 열자 작렬하는 지중해의 태양과 진한 오렌지 향기, 그리고 저 멀리 하늘거리는 우윳빛 커튼처럼 펼쳐진 나폴리만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모든 것이 카루소가 최후의 순간까지 숨 쉬고, 느끼고, 보았던 그대로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달라가 무엇에 홀린 듯 단 하룻밤 만에 써내려간 노래가 바로 '카루소'다.
"이곳 태양이 빛나는 바다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소렌토만의 한 낡은 테라스에서, 한 남자가 여인을 포옹하네. 소녀는 곧 울음을 터트리고, 남자는 곧 노래하기 시작하지." ▷기사 더보기
토리노와 '마농 레스코'
'안타깝고 비극적인 앙상블' 찬란한 舊도심에 울려 퍼지다
몇 년 전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주(州)의 대표 오페라단인 토리노 왕립극장 가극단이 일본 도쿄를 방문해 공연을 가졌다. 이탈리아 출신 마에스트로 자난드레아 노세다(53)가 지휘봉을 잡고 아르헨티나 테너 마르셀로 알바레스(55) 등 일군의 세계적 성악가들이 총출동해 베르디와 푸치니의 명작 오페라를 노래했다.
토리노는 이탈리아 통일을 이룩한 사보이 왕가의 발원지다. 왕실의 후예들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격조 높은 자태를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도시로도 유명하다. 온통 대리석으로 휘감긴 구도심의 찬란한 자태는 첫눈에 여행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의 말투나 행동거지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다혈질의 이탈리아 사람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매사 느리고 여유가 있으며 윤후(潤厚)한 품격이 온몸에 배어 있다. 프랑스어의 흔적이 뚜렷이 보이는 지역 방언 또한 특유의 유려한 울림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준다.
까칠하면서도 고고한 취향 또한 토리노 사람들만의 자부심이다. 이탈리아의 명품 커피 라바차가 이 덕분에 탄생했다. 왕궁 근처에서 식료품점을 하던 루이지 라바차(Luigi Lavazza·1859~1949)는 매번 왕실에 납품하던 커피가 퇴짜를 맞자 고심을 거듭한다. 입맛이 까다롭고 요구 사항이 복잡했던 사보이 왕가의 귀공자들은 한 가지 원두만으로 내린 커피에 도저히 만족하지 못했다. 연구를 거듭하던 루이지는 여러 가지 품종을 뒤섞어 풍윤한 질감을 지녔으면서도 신선한 산미가 살아있는 블렌딩 커피를 만들어 왕자들에게 선보인다. 이탈리아 넘버원(No 1) 커피인 '라바차'의 신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도 그즈음 토리노로 건너왔다. 원래는 밀라노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그였다. 밀라노 음악원을 최우수로 졸업했고, 오페라 데뷔 작품도 밀라노 스칼라 극장을 위해 썼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이 잘 안 풀렸다.
롬바르디아(밀라노)를 떠나 피에몬테(토리노)로 자리를 옮긴 푸치니는 거기서 우연히 사보이 왕가의 아메데오 공작을 추모하기 위한 엘레지 하나를 작곡하게 된다. 현악 사중주로 이뤄진 이 곡의 제목은 '크리산테미(I Crisantemi)', 즉 국화였다. 하룻밤 사이에 즉흥적으로 작곡된 곡이었지만 이 곡이 갑자기 푸치니의 창작열에 불을 붙이게 된다. 마침 그는 프랑스의 소설가 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Manon Lescaut)'를 오페라로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 ▷기사 더보기
프라하와 '팔려간 신부'
체코 수도 프라하를 관통하며 흐르는 강의 이름은 블타바(Vltava)다. 후손들은 이 강 주변 풍광을 완벽히 보존하기 위해 카렐교를 비롯해 최소의 다리만을 그 위에 걸었다. 덕분에 지금도 프라하의 강변 풍경은 고즈넉한 신비와 숨 막히는 낭만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아름다운 강을 소재로 삼은 클래식 명곡이 하나 있다. 체코의 민족주의 음악가 스메타나(1824~1884)가 쓴 관현악곡 '블타바'다. 애국적 교향시 '나의 조국' 두 번째에 등장하는 음악으로, 우리에게는 독일식 표기인 '몰다우'로 더 유명했다.
프라하에서는 매년 5월이면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다. 프라하 5월 음악제의 개막 콘서트 때 언제나 이 곡이 연주되기 때문이다. 음악제는 작곡가 스메타나의 기일에 맞춰 매년 5월 12일 시작되는데, 올해는 거장 다니엘 바렌보임(75)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 곡을 연주하기로 해 더욱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스메타나 시대 체코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식민 지배에 시달리고 있었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체코 민족의 빛나는 기상과 유구한 문화 전통을 만방에 과시하고자 체코어로 된 오페라를 연이어 발표했다. 그중 지금까지 전 세계적 인기를 누리며 널리 공연되는 작품은 희극 오페라인 '팔려간 신부'가 유일하다.
희극 오페라인 '팔려간 신부'가 장엄한 영웅 서사시는 아니지만 작품 곳곳에 조국애와 민족 문화에 대한 애정이 넘쳐 흐른다. 음악은 시종일관 보헤미아의 흥겨운 민속 춤곡인 폴카(Polka)와 푸리안트(Furiant) 사이를 오가며 질주하고, 장면마다 전통 세시 풍습과 그곳 사람들의 소박하면서도 푸근한 인정을 흥겹게 묘사해 절로 미소 짓게 한다.
가장 멋진 장면은 2막에 등장하는 '맥주 합창'이다. 마을 회관으로 모여든 남정네들이 맥주잔을 산처럼 쌓아놓고는 이 마을에 비전(祕傳)으로 내려오는 가정식 수제 맥주를 몇 드럼통씩 들고 와서는 나눠 마신다. 얼큰하게 취한 그들이 부르는 합창은 오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맥주' 권주가다.
"이보게, 마시고 또 들이켜세! 맥주는 신(神)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니까!"
체코는 맥주의 나라다. 1인당 맥주 소비량은 부동의 세계 1위이며, 세계 최초로 맥주 양조법을 기록하고 체계화한 나라이기도 하다. 라거식 맥주를 처음 생산한 곳도 여기다. ▷기사 더보기
파리와 로시니
센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파리 최고의 명당에 위치한 투르 다르장(La Tour d'Argent) 레스토랑은 그 자체로 프랑스 미식의 역사이기도 하다. 1582년에 창업해 지금까지 전통의 조리법에 충실한 맛과 품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대대로 프랑스 왕실의 단골집이었으며 지금도 세계 각국의 셀러브리티들이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파리 미식의 영원한 랜드마크다.
여기서 탄생한 메뉴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로시니 스테이크(Tournedos Rossini)다. 이탈리아 최고의 희극 오페라 작곡가 조아치노 로시니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실제로 로시니가 개발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미식과 탐식의 경계에 선 음식이고 심지어 누구에게는 괴식(怪食)일 수도 있다. 놀랍도록 진한 풍미와 엄청난 칼로리를 동시에 자랑하는데, 들어가는 재료와 조리법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우선 최고급 필레 미뇽(안심)을 스테이크로 구워낸다. 그 위에 진한 풍미의 푸아그라를 얹곤 가니시로 버섯의 황제라 불리는 이탈리아 피에몬테산(産) 송로버섯을 슬라이스해 곁들인다. 마무리로 포르투갈 마데이라산 와인을 장시간 졸여 만든 데미그라 소스를 조금 부어주면 완성이다. 진한 재료 위에 더 진득하고 무거운 재료를 얹곤 다시 거기에 더욱 강렬한 풍미의 그 무엇을 가미하는 일종의 '옥상옥(屋上屋)' 요리다. 사실 로시니 오페라가 딱 이렇다.
로시니는 '이탈리아의 모차르트'로 불릴 만큼 천재 작곡가였다. '세비야의 이발사' '라 체네렌톨라' 등 감칠맛 나는 코믹 오페라로 이탈리아 전역을 제패하곤 당대 최고의 도시 파리로 초빙받아 날아간다. 로시니는 파리에서도 단숨에 수퍼스타가 됐다.
리드미컬한 음악 전개, 감각적이고도 흥겨운 선율, 귓가를 상쾌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절묘한 아리아, 서커스를 연상케 하는 화려하고도 흥겨운 초절 기교의 노래 등 버라이어티한 다중 매력을 지닌 그의 오페라는 단숨에 파리지앵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로시니 음악이 주는 거침없는 쾌락에 너무나 즐거워했다. 아예 동상까지 세워 그를 아이돌로 대접한다.
어느 날 로시니가 프랑수아 10세의 대관식을 위한 축전 오페라 한 편을 작곡했다. 사람들은 실망한다. 보나마나 왕의 덕성을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지루한 내용으로 가득 찬 작품이 될 터였다. 아니었다. 로시니는 역시나 로시니였다. 오페라 '랭스 여행(Il Viaggio a Reims)'은 왕의 대관식이 아니라 대관식이 열리는 상파뉴 지방 랭스로 몰려가는 사람들의 한바탕 소동을 다루고 있다.▷기사 더보기
베로나와 마리아 칼라스
이탈리아 북동부의 아름다운 도시 베로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되던 시절에는 밀라노 공작의 통치를 받았고, 그 후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도시 전체를 감싸는 다크 브라운의 안온하고 그윽한 색감은 너무도 유명한데 지금도 북이탈리아의 우아함을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1947년 초여름 이 도시에 무명의 한 소프라노가 도착했다. 뉴욕 맨해튼 50번가에서 열린 오디션에서 합격한 그녀였다. 베로나 태생으로 왕년의 명(名)테너였던 조반니 제나텔로가 여름마다 고대 로마 제국 시절의 야외 경기장에서 열리는 오페라 페스티벌의 주역 가수를 뽑고 있었다.
제나텔로는 젊은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지닌 음색과 질감, 표현력을 모두 마음에 들어 했다. 심지어 그녀의 눈빛 아래 도사린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격정적인 불안, 묘한 열정까지도 모두. 그녀의 이름은 안나 마리아 소피아 칼로예로풀로스. 후일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라 불리게 되는 역사상 최고의 위대한 소프라노였다.
공연을 위해 칼라스는 생전 처음 이탈리아로 갔다. 비행기는커녕 스웨덴 국적의 화물선을 간신히 빌려 타고 대서양을 건너야만 했다. 그녀 수중에 있는 것이라고는 가방 하나, 구겨진 원피스 몇 벌 그리고 미화 50달러가 전부였다. 그래도 당대 최고의 거장(巨匠) 툴리오 세라핀의 지휘로 노래할 수 있었다. 작곡가 폰키엘리가 쓴 격정적인 오페라 '라 조콘다(La Gioconda)'의 여주인공이었다.
오페라의 주인공 조콘다는 베네치아 밤거리를 떠도는 무명의 여가수다. 한때 그녀에겐 엔초라는 귀공자 애인도 있었고, 눈이 보이진 않지만 너무도 사랑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엔초는 그녀를 버리고 귀족 여인 라우라를 찾아 떠났고, 어머니조차 간교한 비밀경찰의 손에 살해당하고 만다. 조콘다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희망도 미래도 없었고, 슬픔과 고통마저 느낄 수 없게 됐다. 그녀는 이 참혹한 절망의 순간에 처절한 절규의 아리아를 목놓아 부른다. 저 유명한 '자결의 노래(Suicidio)'다.
세월이 흘렀다. 세계 최고의 프리마돈나가 된 칼라스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에게로 달려간다. 오나시스는 금세 칼라스를 버리고는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해 버린다. 이제 칼라스 곁에는 든든한 남편도, 진실한 사랑도 남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점차 아름다운 목소리마저 잃어가기 시작한다. 마치 오페라 속 여가수 조콘다의 운명처럼 말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칼라스가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책갈피에 휘갈겨 쓴 메모 하나가 발견됐다. '라 조콘다' 속 '자결의 아리아'였다.▷기사 더보기
독일 바이에른 알프스 지방과 '마탄의 사수' 사냥꾼 막스
성악 하는 친구와 느긋이 저녁을 먹고는 뮌헨 중심가에서 헤어졌다. 그는 남은 오페라를 노래하러 다시 북쪽으로 떠났고, 나는 홀로 남아 독일 남부 바이에른에 드넓게 펼쳐진 알프스의 한 작은 산골 마을로 내려가야만 했다. 밤 9시 반이 넘은 시각. 늦여름이라지만 주위는 이미 칠흑같이 어두웠다. 차를 아우토반에 올리니 아예 사방천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독일의 고속도로는 속도만 무제한인 게 아니다. 정해진 규칙 외엔 모든 것이 자유고, 달리는 차 외엔 아무것도 없다. 톨게이트도, 요란한 광고판도, 환한 가로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와 그 위를 묵묵히 달리는 차들이 전부. 낮에는 그나마 괜찮다. 시커먼 어둠이 몰려오는 밤이면 가로등 하나 없는 이 침묵의 도로를 단단한 독일산 자동차만이 가득 채운다. 그건 마치 철골로 빚어낸 들짐승들의 거대한 침묵 행렬을 보는 듯했다. 장엄하면서도 두려움이 느껴지는 그 도로를 나 홀로 운전해가고 있었다.
울창한 침엽수림 한가운데 금단의 장소 '늑대 골짜기'로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던 사냥꾼 막스의 심정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그는 독일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 '마탄의 사수(Der Freischutz)'의 주인공이다. 일종의 '산악 오페라'로 불러도 좋을 이 작품에서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는 독일인들의 DNA 깊숙이 도사린 산과 들, 숲에 대한 애정과 신성한 경외감을 음악과 시로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지금도 독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최고의 로맨틱 오페라이기도 하다.
막스는 마을의 가장 이름난 사냥꾼이다. 그러나 봄철 사격대회를 앞두곤 극심한 슬럼프에 빠진다. 실의에 젖은 그를 사악한 동료 사냥꾼이 유혹한다. 저 숲속 깊이 존재하는 볼프스슐르흐트, 그러니까 '늑대 골짜기(Wolfsschlucht)'에 가서 악마 자미엘을 만나보라는 것이다. 그에게서 흑마술로 빚어낸 백발백중의 마술 탄환을 얻어내기만 하면 사냥대회에서 우승이 가능하다는 이야기. 오페라의 2막에 펼쳐지는 늑대 골짜기 장면은 21세기인 지금 들어도 머리칼이 쭈뼛해질 정도다.▷기사 더보기
제노바와 시몬 보카네그라
어느 해 이탈리아 북서부 리구리아 주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라스페치아(La Spezia)를 자동차로 느긋하게 돌고 있었다. 리구리아 주는 이탈리아의 숨은 보석과도 같은 곳. 남부 이탈리아보다 태양 각도가 낮고 기후도 온후한 편이다. 덕분에 이탈리아 최고 올리브와 바질이 나온다.
나폴리나 시칠리아의 들끓어 오르는 태양에 푹 익어버린 그런 것이 아니다. 부드러운 해풍에 실린 달큼한 향을 한 몸에 간직한 고운 바질과 영롱한 호박색이 인상적인 섬세한 향취의 올리브 오일이 모두 이 지역 특산물이다. 바질에 마늘과 잣을 함께 넣고, 올리브 오일을 뿌려 손절구로 조심스레 빻으면 풍미가 엄청난 '페스토 제노베제', 즉 제노바식 페스토 소스가 완성된다. 따뜻한 상태로 빵이나 파스타에 올려 먹으면 정말이지 천국이 따로 없다..
제노바는 리구리아 주의 중심 도시다. 과거 지중해 무역의 전성기에는 베네치아와 함께 이 지역을 양분했던 '바다 공화국'이었다. 지금도 이탈리아 제일 항구도시이긴 하다. 그러나 바다에 면한 다른 해안 도시, 가령 베네치아, 나폴리 등에 비해 좀처럼 여행객의 인기를 끌지는 못하고 있다. 아마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일 것이다.
주세페 베르디가 이 도시를 배경으로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Simon Boccanegra)'를 썼다. 소재는 실제 역사에서 취했다. 시몬 보카네그라는 제노바의 젊은 뱃사람인데 하필이면 대귀족 피에스코의 딸 마리아와 운명적 사랑에 빠져 딸도 낳았다.
격분한 피에스코가 마리아를 가둬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고, 시몬은 그의 분노를 피해 딸을 피사 지방으로 피신시킨다. 그런데 이 아이마저 원인 모를 사건에 휘말려 행방불명된다. 슬픔에 빠진 시몬이지만 그는 평민 출신으로는 최초로 제노바의 총독 자리에까지 오른다. 문벌 귀족들의 자중지란을 틈타 평민파가 그에게 몰표를 던진 것이다. 복잡한 프롤로그로 시작된 오페라는 총독이 되고 25년이 지난 노년의 시몬과 피에스코의 삶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후회와 회한'이다.
라스페치아의 언덕으로 차를 올렸다. 만곡이 훤히 보이는 어느 카페에서 느긋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자니 저 멀리 군함 한 척이 어른거린다. 한때 이탈리아 해군이 전 세계에 자랑하던 거대 전함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였다. 시몬과 마찬가지로 도리아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논쟁적이다. 그러나 죽어서도 고향 제노바 앞바다에 군함으로 떠있으니 뼛속까지 바닷사람이었던 그는 내심 만족하고 있지 않을까.
문득 오페라 속 뜨거운 절규 한 구절을 흥얼거린다. "바다여! 바다여! 나는 왜 오래전 당신 품 속에서 삶을 마감하지 못했던가?(Il mare! perche in suo grembo non trovai la tomba?)" 어디선가 불어온 따뜻한 바닷바람이 시린 가슴을 애써 달래주고 있었다. ▷기사 더보기
독일 드레스덴
2013년은 독일을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독일 각지에서 이를 기념하는 음악회를 열었는데, 특히 동부 작센 주의 대표 도시 드레스덴에서 열린 특별 콘서트는 분위기가 참으로 대단했다.
독일을 대표하는 거장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지휘봉을 잡았고, 세계 최고의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이 한달음에 달려와 특별 독창자로 나섰다. 레퍼토리는 모두 바그너가 이 도시에서 작곡하고 발표한 음악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같은 숙소에 묵고 있던 틸레만과는 묘하게 연락이 닿아 공연 후 저녁식사도 함께 하기로 했다.
드레스덴은 독일 문화의 최고봉이자 핵심 도시로 손꼽힌다. 큰 도시는 아니지만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도시 전체를 감싼 고색창연한 바로크 건축물에서는 기품과 신비감마저 느껴진다.
드레스덴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오케스트라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Staatskapelle Dresden) 오케스트라는 1548년에 결성되었고 지금도 독일을 대표하는 관현악단이다.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음악감독을 예전에는 카펠마이스터라고 불렀는데, 드레스덴의 카펠마이스터는 대대로 독일 음악을 대표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바로크 음악의 대가 하인리히 쉬츠를 필두로, 카를 마리아 폰 베버, 리하르트 바그너 등이 자리를 이어받았고 지금은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수장이다.
'탄호이저'는 바그너가 드레스덴에서 작곡하고 발표한 그의 대표작이다. 젊은 시인 탄호이저는 매일 묵상과 기도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 정신의 고결함을 찬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금단의 계곡으로 발을 들였다가 육체적 쾌락과 탐닉만이 지배하는 세계인 '비너스의 동산'을 발견하게 된다. 한동안 주지육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탄호이저는 간신히 그곳을 탈출해 다시금 지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옛날의 탄호이저가 아니었다.▷기사 더보기
나폴리의 글라스 하모니카
이탈리아의 한 미식 전문 잡지가 나폴리를 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다. 커피와 피자, 토마토 파스타가 너무나 맛있는 도시인데 도대체 그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평론가들은 베수비오 화산의 암반을 통해 흘러나온 나폴리산 미네랄 워터에 주목했다. 칼슘과 칼륨, 규소 등이 풍부한 나폴리 특유의 칼칼한 경수(硬水)가 커피나 요리에 비할 바 없이 깊은 감칠맛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폴리 물'은 음악의 발전에도 뜻밖의 공헌을 했다. 예로부터 나폴리에는 글라스 하모니카(Glass Harmonica) 명수가 많았다. 글라스 하모니카란 이름 그대로 유리그릇으로 만든 악기다. 작은 사발 모양의 유리를 수직으로 겹겹이 이어 놓고는 그 가장자리를 물을 적신 손가락으로 문질러 연주한다. 와인잔 등에 물을 채워 두드리거나 문지르는 파티장의 여흥을 제대로 된 악기 형태로 발전시킨 것이라 생각하면 쉽다. 프로 연주자들은 특히 손에 적시는 물을 중시하는데, 부드러운 연수로는 제대로 된 소리를 얻을 수 없다고 한다. 유럽산 경수, 그중에서도 페라렐레 등 나폴리산 물이 최고로 손꼽힌다.
글라스 하모니카는 유리 특유의 웅웅거리는 신비감 넘치는 소리로 예로부터 '영혼을 포착하는 악기'로 불렸다. 음량이 작고 음정을 잡기 쉽지 않아 19세기 말로 접어들며 점차 쓰임새가 줄었지만, 작곡가 가에타노 도니체티(1797~1848)는 이 악기 특유의 신비로운 음색에 주목했다. 그가 나폴리의 산 카를로 오페라하우스를 위해 준비 중이던 대작 '람메르무어의 루치아'(1835)에서 글라스 하모니카를 '비장의 한 수'로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기사 더보기
시칠리아와 칸놀리
영화 '대부3'의 한 장면이다. 대부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 분)의 아들 앤서니가 오페라 가수로 데뷔한다. 하필이면 대부 일가의 고향인 시칠리아 섬에서, 그것도 처절한 비극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를 통해서다. 주변 마피아들까지 모두 시칠리아 제1 도시 팔레르모의 마시모 오페라하우스(Teatro Massimo)로 몰려든다. 여기엔 노회한 마피아 돈 알토벨로도 포함돼 있다. 대부는 그를 제거해야만 한다. 여동생 코니가 역할을 맡는다.
예쁘게 포장한 과자 상자 하나를 건넨다. "수녀원의 비밀 레시피로 만든 거랍니다." 의심 많은 알토벨로조차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연신 과자를 우물거리며 오페라를 보다가 속에 든 독이 퍼져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가 먹던 막대 모양 크림 과자는 칸놀리(Cannoli). 시칠리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울 푸드'이며 이 섬의 3000년 문명사를 집약해놓은 상징과도 같은 과자다.
알토벨로를 독살한 대부는 태연한 표정으로 로열 박스에 앉아 공연을 즐긴다. 오페라의 원작은 '이탈리아의 에밀 졸라'로 불리는 조반니 베르가가 쓴 단편이다. 군에서 제대하고 빈둥거리며 백수로 살고 있는 마을 청년 투리두가 유부녀 롤라와 바람피우고 있다. 당나귀 마부인 롤라의 남편 알피오가 이를 알아채고는 과수원 밭에서 피비린내나는 결투를 벌인 끝에 투리두를 죽인다.
제목인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촌놈들의 기사도'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작고 폐쇄적인 시골 섬마을에서 벌어진 마초들의 명예 결투와 허무한 죽음을 시니컬한 어조로 표현한 말이다. 여기에 청년 작곡가 마스카니가 곡을 붙였다. 음악은 천국과도 같은 시칠리아의 아름다운 자연과 피비린내나는 삶의 실존적 비극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다.
오페라의 막이 내린 후, 어디선가 날아든 흉탄이 대부의 딸 매리를 관통한다. 그녀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곳은 마시모 오페라하우스의 유명한 입구 계단. 절규와 비탄이 교차하는 그 순간 화면에는 오페라의 가장 처연하고도 유장한 간주곡 '인테르메초(Intermezzo)'가 흐느끼듯 흐른다. ▷기사 더보기
뉘른베르크와 마이스터징거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의 북쪽 지역은 예전엔 '프랑켄(Franken)'이라 불리던 곳이다. 프랑켄은 게르만족이 세웠던 프랑크왕국에서 온 말이다. 13세기 프랑켄 공작이 다스리던 지역이다. 대대로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으나 제국이 해체된 후엔 바이에른 왕국에 편입됐다.
독일 화이트 와인의 최고봉인 프랑켄 와인의 주산지이며,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와 작곡가 파헬벨 등을 낳은 문예의 고장이기도 하다. 드높은 문화적 자존심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행정구역상 명칭인 바이에른을 애써 거부하고 프랑켄이란 지역명을 고수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프랑켄 최대 도시는 뉘른베르크다. 중세 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아늑한 느낌의 구시가지는 참으로 아름답다. 이곳은 예부터 뉘른베르크의 이름난 상공업 장인(마이스터)들이 활약했던 강건한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각자의 직역에서 최고의 전문가였던 그들은 언젠가부터 함께 모여 시를 짓고 음악을 노래하는 '시민 예술가 조합'을 결성했다. 이들 조합의 구성원 중에서도 최고 수준에 이른 사람을 장인가수, 즉 마이스터징거(Meistersinger)라고 불렀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들의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든 것이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다. ▷기사 더보기
로마와 토스카
이탈리아 수도 로마의 별칭은 '영원의 도시'다. 1000년 전에도 있었고 1000년 후에도 존재할 도시. 유럽인들의 영원한 정신적 고향이며 살아있는 역사책과도 같은 곳. 시내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수많은 유적, 조각품과 회화, 대성당과 박물관 등은 물론이고 길거리에 널린 돌무더기 하나에도 온갖 사연이 다 녹아 있는 도시. 지금도 로마 시내를 걷는 것은 그 자체로 역사의 한순간을 체험하는 행위가 된다.
1800년 6월 중순,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 로마에서 펼쳐진 비련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Tosca)'다.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그들은 지금도 남아 있는 로마의 역사적인 세 장소에서 사랑과 질투, 애욕과 반목, 기다림과 좌절을 거듭하다가 모두 다 죽어간다.
1막은 나보나 광장 한쪽의 대성당 산탄드레아 델라 발레(Sant'Andrea della valle)에서 시작된다. 종교화를 그리던 젊은 화가 카바라도시가 비밀경찰의 총수 스카르피아 남작에게 체포되고, 탈옥한 친구의 행방을 추궁받는 와중에 잔혹한 고문을 당한다. 마음이 급해진 스카르피아는 카바라도시의 애인까지 불러들인다. 그녀의 이름은 플로리아 토스카. 오늘도 여왕 앞에서 칸타타를 노래한 로마 최고의 소프라노다. 스카르피아가 그녀를 협박한다. 네 남자 친구는 당장 내일 새벽에 처형될 것이다. 그를 살리는 방법은 단 하나, 나와의 하룻밤을 허락해라.
토스카는 절규한다. 신이시여, 도대체 제게 왜 이러십니까. 저는 평생을 성당에서 기도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노래만을 불러왔거늘. 제게 왜, 저에게 왜 이토록 참혹한 시련을 던져주시는 건가요?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로 너무나 유명한 이 처절한 절규의 아리아가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 vissi d'amore)'다. ▷기사 더보기
뉴욕 '라 보엠'
노먼 주이슨 감독의 1987년 영화 '문스트럭(Moonstruck)'은 아카데미상을 세 개나 거머쥔 아름다운 로맨틱 코미디다. 뉴욕 브루클린에 살고 있는 로레타(셰어 분)는 이탈리아 이민자 집안 출신으로 서른일곱 살이 된 과부. 얼마 전부터 만난 새 남자친구 조니가 프러포즈를 하는데 한 가지 부탁을 덧붙인다. 오래전에 사이가 멀어진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자신과 얼굴도 마주치기 싫어하니 대신 찾아가 결혼식 참석을 부탁해 달라는 것.
결국 남동생 로니(니컬러스 케이지 분)의 제과점을 찾아가 그와 만난 로레타. 두 사람은 처음부터 티격태격 다투지만 곧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만다. 로니는 그녀에게 '한 가지 부탁만 들어준다면 형의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말한다. 그건 맨해튼에 있는 세계 최고의 오페라하우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약칭 메트)에서 푸치니의 '라 보엠' 공연을 함께 보자는 것.
'라 보엠'의 막이 오른다. 오페라의 배경은 크리스마스이브 날 저녁의 프랑스 파리. 소르본 대학 인근 라틴 지구 쪽방에 사는 가난한 청년 시인 로돌포가 불을 빌리러 온 가녀린 여인 미미와 마주친다. 청초한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그는 미미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붙잡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사랑 고백을 쏟아낸다. 테너 최고음 '하이 C'가 나오는 것으로 유명한 '그대의 찬 손(Che geli da manina)'이다.
"저는 시인입니다. 생활은 가난하지만 시와 노래의 아름다운 천국에 둘러싸여 있지요. 그렇습니다. 마음만은 진정 백만장자인 것입니다." 미미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한다. "제 이름은 미미랍니다. 저는 삯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요. 혼자 사는 다락방에서는 다른 집들의 지붕만 보이지만, 그래도 봄의 첫 햇살과 4월의 첫 키스는 제가 독차지한답니다." 로돌포와 미미 두 청춘 남녀가 만들어내는 1막의 애틋한 러브신은 오페라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것으로 유명하다. 달콤한 사랑의 밀어들이 푸치니 특유의 센티멘털한 선율과 한데 어우러져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자아낸다.▷기사 더보기
빈과 신년음악회
새해를 유려한 왈츠의 선율로 시작하는 건 이제 전 세계인의 문화전통이 된 듯하다. 매년 1월 1일 오전 11시에 맞춰 열리는 빈 신년음악회 덕분이다. 올해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대표적인 콘서트홀 무지크페라인잘(Musikvereinssaal) 황금홀에선 우아하고 경쾌하며 화려한 왈츠 선율이 전 세계를 향해 울려 퍼졌다.
빈 필의 신년음악회는 몇백 년 역사의 전통을 가진 걸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나 독일 등지에선 새해 아침에 무슨 특별한 행사를 여는 문화가 없었다. 대신 '질베스터(Silvester)'라고 해서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 31일을 화려하고 풍성한 축제 분위기로 즐긴다. 지금도 베를린이나 드레스덴 등 독일 주요 문화도시에서는 매년 송년음악회인 질베스터 콘체르트가 성대하게 열린다. 빈도 원래는 송년음악회를 여는 도시였으나 어느 날 그 음악회가 좀 길어졌다. 자정을 넘겼으니 신년이 됐고, 새해 벽두에 느긋하고 유려한 왈츠 음악을 연주했더니 그게 또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1941년부터는 1월 1일 오전으로 시간대를 옮기고 신년음악회라는 타이틀을 붙여 콘서트를 열게 됐다. ▷기사 더보기
베네치아와 비극의 손수건
이탈리아 동부 아드리아 해에 면한 수상도시 베네치아는 예로부터 수많은 예술가를 매혹해 왔다. 19세기 천재 시인 바이런이 이 도시를 찾은 건 한때 바다의 제국이라 불리던 베네치아가 그 생명력을 다해 점차 문명과 사회 전반에서 내리막길로 스러져가기 시작할 때였다. 바이런은 그 퇴락의 우울함이 주는 묘한 낭만적 정서를 극시와 소설 속에 담아내 전 유럽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곧 베네치아는 유럽 낭만주의자들의 성지가 됐다. 20세기엔 스트라빈스키, 댜길레프, 에즈라 파운드 등이 이 도시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곳의 또 다른 별칭이던 '세레니시마(La Serenissima·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땅)'처럼 그들은 베네치아에서 최후의 평화와 영원한 안식을 찾고자 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왕'으로 불리는 주세페 베르디 또한 베네치아와 깊은 인연으로 맺어져있다. 초년생 시절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오페라하우스와 저임금의 불평등 계약을 맺곤 수많은 작품을 토해내듯 써야 했다. 그 험난한 고초의 세월은 스스로 '갤리선 노예시대(Gli anni di galera)'라 부를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나 결국엔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키는 자양분이 됐다. 라 페니체에서 발표한 '리골레토'와 '라 트라비아타'는 그의 대표작이 됐다. 한편 베르디는 만년에 이르러 이 도시를 배경으로 오페라 한 편을 더 쓰게 됐으니 일흔넷에 발표한 '오텔로(Otello)'다. 셰익스피어 희곡 '오셀로(Othello)'를 이탈리아식으로 표기한 것으로 베르디가 남긴 가장 완벽한 오페라로 평가받는다. ▷기사 더보기
세비야와 카르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세비야. 지금은 세비야 대학의 건물로 변해 있는 왕립 담배 공장의 지저분한 건물 안에서 담뱃잎을 말아내던 매력적인 집시 여인 카르멘은 잠깐의 휴식 동안 담배 한 대를 꼬나물며 이렇게 내뱉는다. "사랑은 말을 듣지 않는 반항적인 새와 같아. 그렇게 이리로 왔다가 저리로 날아가지. 남자들이 여자를 고른다고? 천만에! 나는 내가 선택한 남자와 사랑을 할 거야." 세비야의 모든 남정네가 끈적거리는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 오직 한 남자만이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 왔다는 고지식한 하사관 돈 호세. 되레 흥미가 솟은 카르멘이 붉은 꽃 한 송이를 호세의 가슴에 던진다. 그 꽃은 곧 비수처럼 그의 가슴에 꽂힌다.
피레네 산맥 남쪽에 펼쳐진 이베리아 반도는 예로부터 정통 유럽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피레네 이남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땅을 '아프리카와 같다'고까지 했다. 전성기엔 강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스페인이지만 19세기에 이르면 서 정치적으로 유럽 중심부와 단절되고, 문화적으론 여전히 이질적이고 소외된 미지의 땅으로 인식됐다. 그러던 스페인이 유럽 전역에 알려진 결정적 계기는 오페라 '카르멘' 덕분이다.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가 1875년 발표한 이 오페라는 플라멩코 춤과 투우 등 전통 스페인 문화를 매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시에 떠돌이 집시들의 방랑 기질, 스페인 특유의 정열 등을 강렬하고 화려한 관현악으로 완벽하게 표현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비야는 투우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인간과 소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직면해 혈투를 벌이는 이 야만적이고 극단적인 유희는 뜻밖에 정교한 형식미로 가득 차 있다. 죽음을 조련하고 결정하는 섬세하고 기교적인 법칙이 검붉은 피가 치솟는 어둡고 원초적인 에너지와 공존한다. 작가 헤밍웨이도 여기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의 논픽션 '오후의 죽음'은 스페인 투우에 바치는 헌사다. "삶과 죽음을, 이를테면 격렬한 죽음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전쟁이 끝난 오늘에 와서는 투우장뿐이다."
오페라의 피날레도 투우 경기장이 배경이다. 카르멘은 이제 유명 투우사인 에스카미요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상태다. 카르멘의 유혹에 정혼자를 버리고 삶이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호세는 절망에 차 마지막 호소를 보낸다. 그녀는 냉정하게 거절할 뿐이다. 세비야 최고의 투우장인 토로스 데 라 마에스트란사(Pla-za de toros de la Real Maestranza)에서 에스카미요가 싸움소 등에 최후의 일격을 꽂아 넣는다. 그 순간 절망과 미련에 사로잡혀 몸부림치던 호세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카르멘의 가슴에 비정한 단검을 찌른다. ▷기사 더보기
밀라노와 투란도트
2015년 5월 밀라노가 낳은 위대한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가 이 도시로 금의환향했다. 라 스칼라 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돼 돌아온 것이다. 그는 기념공연으로 자코모 푸치니 최후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지휘했다. 하필이면 밀라노 엑스포 기간과 겹쳤다. 호텔 값이 평소의 두 배로 뛰고 시내는 몰려든 사람들로 발디딜 틈 없었다. 오페라 티켓은 이미 석 달 전 매진. 객석엔 밀라노의 수많은 VIP와 셀러브리티들, 유력 일간지 비평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한때 밀라노의 통치자였던 비스콘티와 스포르차 가문의 후예들, 오페라광으로 유명한 돌체앤가바나의 수석 디자이너 도메니코 돌체의 모습도 보였다.
'투란도트'는 중국의 전설 시대가 배경이다. 남성 혐오증에 빠진 투란도트 공주가 왕자들의 집요한 구혼을 물리치기 위해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내고, 맞히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참수한다는 그로테스크한 줄거리다. 주인공 테너가 칼라프라는 본명을 숨기곤 공주의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그가 부르는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는 최고의 명곡이다. 파바로티, 안드레아 보첼리 그리고 폴 포츠 등의 노래로 지금은 웬만한 뮤지컬 넘버만큼이나 유명해졌다. 사실 테너에겐 극한의 고음 테크닉과 완벽한 호흡 조절을 요구하는 난곡 중의 난곡이다.
공연 전 관객들은 라 스칼라 옆 유명 카페 마르케지노로 모인다. 공연 30분 전에야 극장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때 한 노신사가 은근히 말을 걸었다. '투란도트'에서 가장 멋진 장면이 어딘지 아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테너 아리아 '네순 도르마' 아니겠는가. 아니. 그는 2막 피날레가 최고라 했다. 수수께끼를 모두 맞힌 왕자가 공주한테 역으로 문제를 내는 장면 말이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그대여, 새벽이 오기 전에 나의 이름을 알아내시오. 당신이 성공하면 나는 후회 없이 죽으리'라고 노래하는 그 장면. 노신사는 그것을 가장 아름다운 이탈리아식 프러포즈라고 불렀다. '벨라 피구라(Bella Figura)'가 몸에 밴 이탈리아 남자들만이 가능한 구애라는 것이다.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