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이나가키 에미코(稻垣えみ子·51)는 마흔 살이 됐을 때 사표를 쓰기로 결심했다. 누구나 한번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최고의 직장으로 꼽히는 아사히신문사다. 당장 그만두려는 건 아니었다. 10년 후, 그러니까 쉰 살이 됐을 때쯤 회사를 관두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월급날만 쳐다보고 사는 내 모습이 싫었다. 인사철만 되면 일희일비하는 것에도 지쳐갔다. 월급을 받기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돈은 늘 모자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고 싶은 건 끝이 없었다. 집에 옷과 물건이 넘쳐났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는 방식과 가치관을 온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은퇴 후에도 답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미코는 그 이후로 소비를 줄였다.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TV도 냉장고도 없앴다. 저축이 차곡차곡 쌓였다. 이쯤 되니 월급 없이도 살 자신이 생겼다. 회사 생활도 뜻밖에 즐거워졌다. 월급과 인사고과에 목 맬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년 동안 오사카 지국 사회부 데스크, 논설위원으로 일하다가 2016년 1월 에미코는 사표를 냈다. 1965년생인 그가 꼭 쉰 살이 되는 해였다. 지난 6월엔 '혼의 퇴사(魂の退社)'라는 책을 펴냈다. '힘써 퇴사를 준비했다'는 뜻이다. 지난 1월엔 우리나라 번역판도 출간됐다. '퇴사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엘리 刊)이다.
에미코는 왜 이토록 열심히 퇴사를 준비했을까. 회사를 나온 이후의 삶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난달 21일 일본 도쿄의 한 출판사에서 에미코를 만났다. 복슬복슬하고 둥근 아프리칸 스타일 파마 머리(아프로 헤어)를 하고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이 성큼 들어섰다. 쉰한 살로는 보이지 않는 경쾌하고 귀여운 외모다. "기자 생활을 28년 했지만 내가 외국에서 온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다"면서 배시시 웃음을 머금는 그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인생이 정말 환해지느냐"는 질문부터 던져봤다. 에미코는 대답했다. "아뇨."
'회사'라는 열차에서 내리다
―아니라고요?
"네(웃음). 사표를 쓰기 전에는 저도 '회사를 그만두면 이 복잡한 고민이 다 사라지겠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꼭 100% 상쾌한 건 아니더라고요. 일단 처음 몇 달은 월급날만 되면 기분이 이상했어요. 늘 꼬박꼬박 들어오던 돈이 안 들어오니까요. 고민이 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어요. 고민은 늘 같은 자리에 있더라고요. 그게 마치 그만의 자리인 것처럼요(웃음). 또 하나 안 좋은 건, 남 탓을 더는 못 해요. 예전에 회사를 다닐 땐 일이 안 풀리거나 사는 게 답답할 때면 늘 남 탓을 했거든요. '이게 다 이놈의 회사 때문이야', '내가 상사를 잘못 만나서 이래'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이젠 그럴 수가 없어요. 모든 게 다 내 탓이죠(웃음)."
―그러면 사표 낸 걸 후회하나요.
"아뇨(웃음). 한 점 후회도 없어요. 이제야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죠. 꼬박꼬박 입금되는 돈이 없는 대신 자유가 늘었고, 남 탓을 못 하는 대신 온전히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게 됐어요. 또 회사를 관두고 나니 보는 사람마다 제게 '너 돈도 없는데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해요. 일본 사람들은 정말이지 웬만하면 그런 말 잘 안 하거든요(웃음). 덕분에 일본 열도 곳곳에 '별장'이 생겼어요! 기자로 일하는 동안 저는 세상 누구보다 사람을 많이 만났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사표를 내고 나니 더 다양한 사람을 훨씬 많이 만나요. 명함이 정말 팍팍 없어져요(웃음). 회사를 통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어요." 그는 이름과 이메일 주소가 적힌 개인 명함을 가지고 다닌다.
에미코는 일본 명문 국립대 히토쓰바시대 사회학부를 졸업하고 1987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했다. 일본 최초로 '남녀고용 균등기회법'이 시행된 해다. 기자·업무직군을 포함해서 동기만 70여 명 뽑혔는데, 그중 여자는 10명 정도였다. 입사하면 지방 근무부터 시작하는 아사히신문사 전통에 따라, 일본 시코쿠에 있는 다카마쓰 지국과 교토 지국 등을 거쳤고, 이후엔 오사카 지국 사회부 기자, 사회부 데스크를 지냈다. 퇴사 직전까지는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에미코는 "회사가 싫어서 떠난 게 아니다. 회사가 내게 준 많은 것에 감사했고,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 최선을 다해 일했고 은혜를 갚을 만큼 다 갚았다고 느꼈을 때, 그리고 이곳에선 내가 더는 할 일이 없다고 느꼈을 때 비로소 사표를 낸 것뿐"이라고 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퇴사 준비를 했나요.
"회사를 기왕이면 더 잘 다녀보려고요(웃음). 서른여덟 살쯤인가 됐을 때 내가 회사의 노예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속품처럼 생각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있더라고요. 오로지 월급과 인사평가, 그 두 가지 당근만 쳐다보면서요. '내가 이러려고 회사를 들어왔던가' 싶더군요. 그때부터 생각했죠. '월급의 노예가 되지 말자. 회사의 노예가 되지 말자. 자발적으로 즐겁게 행복하게 일하다 떠나자.' 그러려면 역설적이게도 아무 때나 내킬 때 사표를 쓸 수 있어야겠더라고요. '회사가 날 언제 자를까' 전전긍긍하면서는 결코 마음껏 즐겁게 일할 수 없고, 원하는 삶을 살 수도 없는 거죠. 그때부터 준비했던 것 같아요. 언제든지 사표를 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준비 말이죠."
―말이 쉽지 그게 보통 샐러리맨에게 가능한 일인가요. 아이도 없고 결혼도 안 한 독신이라서 가능했던 것 아닙니까.
"독신이건 아니건 쉽지 않은 일이죠.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고는 불가능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전 소비의 노예였어요. 매달 옷에 화장품에 구두를 사야만 스트레스가 풀렸고, 집엔 온갖 물건이 들어찼죠. 맛집을 탐방하면서 월급을 탕진했고요. 그게 도시에서 내가 사는 방식이라고 믿었어요. 근데 사표를 쓸 준비를 시작하고 나니 이게 다 부질없더라고요. 가구를 싹 정리했어요. 옷을 둘 데가 없어져서 남들에게 다 나눠줬고요. 어느새 화장을 안 하게 됐고, 밥은 손수 지어 먹게 됐어요. TV·에어컨·냉장고를 없애고 나니 전기세가 1500원 정도만 나오게 됐고요. 예전엔 퇴근하고 집에 가면 TV부터 켰는데, 이 무렵의 나는 퇴근하고 어두컴컴한 집에 가만히 앉아 창밖의 별을 보고 있더라고요. 그때 깨달았던 것 같아요. '아, 나 지금 뜻밖에도 참 행복하구나' 하고요(웃음)."
죽어라 뛰면서 놓쳤던 것들
에미코는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치러진 직후 태어났다. 일본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하던 시기였다. 회사원이었던 아버지는 야근에 치여 살았다.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는 아이 교육에 매달렸다. 에미코는 “엄마는 밥 먹듯 ‘공부해라’ ‘출세해라’고 하셨다. 나는 그런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애쓰는 모범생이었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손꼽히는 대기업·신문사·방송사·광고회사에 모두 시험을 쳤다. 에미코는 “특별한 의식이 있어서 기자가 된 게 아니라, 아사히신문사가 워낙 인기 있는 회사여서 시험을 쳤을 뿐이다. 운 좋게도 합격했고 그때 나는 ‘이 회사를 평생 다녀야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1970~1980년대 한국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
“일본이나 한국이나 급속한 경제성장을 겪었으니까요. 지금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매달 엄마가 새 가전제품을 들여놓던 풍경부터 떠올라요. 어떤 날은 세탁기를, 어떤 날엔 새 텔레비전을, 또 다른 날엔 디지털 전축을 들여놓으셨죠. 살림이 하나둘 늘어가는 걸 보면서 부모님은 흐뭇해하셨어요. 저 역시 그 덕에 성장과 소비가 곧 미덕이라고 은연중 믿고 살아왔고요. 부모님이 못 샀던 물건을 내가 번 돈으로 사들일 때면 ‘그래, 나도 이만하면 성공한 거야’라고 도취되곤 했죠(웃음).”
―그렇게 벌어들이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일했고요?
“일종의 악순환이랄까. 처음 회사에 입사할 때만 해도 기자들이 그렇게까지 허덕이진 않았던 것 같아요. 다들 점심 저녁은 챙겨 먹고 일할 시간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지면을 늘리고 마감시간을 늦춰 속보를 하나라도 더 찍어내는 경쟁이 시작되면서 삶이 피폐해졌어요. 다들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고 밤늦게까지 일하고, 야근을 마치고 나면 그제야 그날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노동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여기저기 돈을 써댔던 거죠(웃음).”
에미코는 서른여덟 살이 되던 해에 처음 입사했을 때 근무했던 다카마쓰 지국으로 다시 발령받았다. 남들은 ‘좌천됐다’고 놀렸고 에미코도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책상을 옮겼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에미코는 인생의 전환점을 찾게 됐다.
―어떤 전환점이죠.
“그곳에선 돈을 쓸 수가 없었어요(웃음). 워낙 시골이니 뭘 사려야 살 게 있어야죠. 처음으로 통장에 돈이 팍팍 쌓이더라고요(웃음). 살 수 있는 거라곤 시장에 막 나온 무 같은 채소뿐이었어요. 그 무를 하나 사서 집에 가서 국을 끓이고 반찬으로 볶아서 먹으면서 깨달았어요. ‘아, 무 하나만 있어도 이렇게 풍요롭구나’ 하는 걸요. 봄엔 산에 벚꽃이 지천이었는데, 그 벚꽃길을 한참 걷다가 또 알았죠. ‘돈을 쓰지 않고도 이렇게 충만할 수가 있구나’ 하는 걸요. 그때부터 ‘퇴사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차츰차츰 생겼고요(웃음).”
에미코는 이 무렵 ‘아사히신문을 바꾸는 모임’이라는 1인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전국 지역판의 기사를 읽고 재미있는 기사를 발굴해 칭찬하는 리포트를 써서 회사에 돌렸고, 새로운 형식의 기사를 소개해 사원들에게 메일로 보내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퇴사를 결심하면서 그런 일을 비로소 할 수 있게 됐다는 건가요.
“맞아요(웃음). 나 스스로 내가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게 됐어요. 사람들이 ‘재밌다’ ‘잘했다’ ‘멋지다’ 칭찬해주면 그걸로 행복했고요. 더는 월급이 오르지 않아도, 인사고과가 잘 나오지 않아도 괜찮았죠(웃음). 저는 모든 사람에게 저처럼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회사를 다니면서도 ‘회사 의존도’를 조금씩 낮춰보라고 말하는 거죠. 일요일에도 집에 있기 싫고 할 일도 없다면서 회사에 나와 앉아 있는 선배들을 많이 봤어요. 일에 중독되다 보니, 회사를 벗어나선 살 수가 없게 된 거죠. 회사 밖에서도 내가 설 곳을 찾아나서야 해요. 그래야 회사가 하루아침에 나를 내쫓아도 견딜 수가 있어요. 회사에만 기대어 사는 삶을 끊어야, 비로소 회사와도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가 있는 거죠.”
―내가 회사와 거리를 둘 때, 회사도 건강해진다?
“바로 그거예요. 회사 조직원들이 무조건 시키는 대로만 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할 때 회사도 더 많은 생산을 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려면 사원들이 회사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살아야 해요. 개인의 삶, 개인의 시간을 찾아야 하는 거죠. 그게 바로 ‘회사 사회’에서 ‘인간 사회’로 바뀌는 길이죠.”
돈, 그 미묘한 존재
에미코는 “지난 10년 동안 열심히 돈을 모은 덕에 사실 죽을 때까지 먹고살 걱정은 없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요즘 내 걱정은 아무리 써도 돈이 줄어들지 않는 것”이라며 웃었다.
―돈이 줄어들지 않는다고요?
“맞아요(웃음). 돈이란 게 참 미묘해요. 남녀관계와도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집착할 때는 손에 쥐어지지가 않아요. 쓰고 싶은 곳이 많고 자꾸 벌어들이고 싶을수록 돈은 잘 안 모아지거든요. 그런데 반대로 돈에 관심이 없어지면 돈이 슬슬 모여요. 제 옆에 차곡차곡 쌓이는 거죠.”
―그래도 생활비라는 게 늘 정해져 있지 않나요.
“생각을 바꾸면 달라진다고 했잖아요. 퇴사한 뒤 아주 싸고 작은 집으로 옮겼어요. 33㎡(약 10평)짜리 집이에요. 집이 좁으니 뭘 들여놓을 수가 없어서 아무것도 안 들였어요. 집에 있는 것이라곤 전등, 라디오, 노트북, 휴대전화뿐이에요. 도시가스 신청을 안 했어요. 필요할 때만 휴대용 버너를 써요. 옷은 열 벌쯤인가 그렇고 화장품도 거의 없죠. 책도 다 읽고 나면 근처 북카페에 갖다주니 제 집엔 쌓아놓은 게 없고요.
목욕은 집 근처 공중목욕탕에서 하고 운동은 동네 공원에서 합니다(웃음).”
―그럼 돈을 거의 안 쓰고 사는 건가요.
“아뇨, 아주 열심히 쓰려고 노력해요. 제가 사는 곳 근처엔 제가 응원하고 싶은 가게가 참 많아요. 가령 지금은 일본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손두부 가게, 혹은 집 근처 아주 맛있는 빵 가게, 아주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놓는 작은 카페…. 그런 곳에서 투자하듯 돈을 써요. 두부나 빵을 많이 많이 사서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부쳐주고… 그러면 친구들도 그 가게에 찾아오고 그러죠.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풀뿌리 운동, 들불 운동 같은 것이랄까(웃음). 나의 이웃에게 돈을 아낌없이 투자해서 그들이 잘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거죠. 그렇게 내가 가진 걸 다 쓰고 죽는 게 꿈이에요. 일본의 총리는 아베 신조이지만, 저는 내 이웃과 우리 동네의 총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살거든요(웃음). 내가 내 이웃의 주인이고 대장인 거죠. 신나지 않나요?”
책 ‘퇴사하겠습니다’에서 에미코는 “인도 사람들은 은퇴 이후의 삶을 두고 ‘임주기(林住期·숲에 머무른다는 뜻)’라고 부른다고 한다”고 썼다. 에미코에게 “당신도 그럼 지금 숲에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에미코는 “퇴사한 지 이제 1년밖에 안 됐으니, 봄 숲에 머무르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기왕이면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다니며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새로 살고 싶다”고도 했다.
―이제 그럼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가요. 10년 후, 20년 후엔 뭘 하고 있을 것 같은가요.
에미코는 빙그레 웃었다. “전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전 그걸로 됐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뭔가’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났거든요. 그저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왕이면 더 가볍게, 더 자유롭게 주위 사람들을 돕고 살다 가고 싶어요.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죽을 때까지 제 인생을 살아낼 거예요.”
인터뷰를 마치고 지하철을 탔다. 도쿄 지하철은 퇴근길 걸음을 재촉하는 회사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들의 표정을 한참 바라봤다. 다들 참 열심히 일한 얼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