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라지면 누가 찾아주기나 할까요. 요즘 '이것'이 많이 떨어져서 너무 힘들어요."
"절 좋아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요즘 들어 자신감과 '이것'이 떨어지네요. 주변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인기 많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남자친구와 함께 있으면 제 '이것'이 너무 낮아져서 고민입니다. 이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요?"
최근 대학 익명게시판에는 ‘이것’이 부족해서 힘들다는 사연이 종종 목격되고 있다. 바로 ‘자존감’이다. 자존감이란 ‘자아존중감(self-esteem)’의 준말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만족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표를 나타낸다. 심리학 전문가들은 자존감이 낮을수록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열등감을 느끼며 자괴감에 빠지기 쉽다고 보고 있다.
20대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이들의 상당수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올 1월 알바천국이 전국 20대 남녀 616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자존감이 낮다’ 고 응답한 경우가 40.6%였다. ‘높다’고 응답한 사람(24.4%)보다 월등히 많았다. 자존감이 낮아졌다고 느끼는 순간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지인들의 소셜미디어를 볼 때(27.6%)’와 ‘취업이 되지 않을 때(22.7%)’,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21.9%)’가 꼽혔다. 그 밖에 ‘친구나 직장상사와 갈등이 생길 때(11.9%)’, ‘외모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11%)’도 주요 이유로 꼽혔다.
낮은 자존감을 안고 사는 청춘들의 고민을 반영하듯 대형서점에서도 관련 도서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정신과 의사 윤홍균씨가 쓴 책 ‘자존감 수업’은 4월 기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인문 부문 1위, 종합 2위를 기록 중이고,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 허태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의 ‘어쩌다 어른’ 등도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이 밖에 ‘외모는 자존감이다’, ‘자존감 없는 사랑에 대하여’, ‘자존감의 여섯 기둥’,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등 관련 도서들이 인문코너 판매대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최근 젊은 소비자들이 자존감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찾다 보니 인문코너 판매대의 눈에 띄는 곳에 관련 책을 많이 배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심리학 용어로써 주로 정신과나 심리상담소에서 사용되던 이 개념이 최근 시선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존감 수업’의 저자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운영하는 윤홍균 원장에게 직접 들어봤다.
-왜 요즘 들어 자존감이라는 개념이 주목을 받을까
경기 불황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취업난이 말해주듯 노력해도 성취하기 어려운 사회적 상황에 놓이면서 무기력에 빠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아예 근면성실한 삶을 포기하고 개인적인 행복을 찾겠다는 움직임 속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평가하면서 자존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국 사회에서는 IMF 외환위기가 사람들의 가치관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예전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공식이 어느 정도 통했지만, IMF 이후로는 근면성실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 자신이 원하는 게 뭔가’, ‘꿈은 뭔가’, ‘나는 누구인가’ 등 자신을 돌아보며 평가하기 시작했다.
―왜 자존감에 관한 책을 썼나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녀와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법’에 대한 글을 남기고 싶었다. 정신의학과 의사로 살아오면서 인간이 행복하기 살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자존감’이라고 생각했다. 행복은 감정적 쾌락을 좇는 게 아니라 능력과 사랑, 인간관계의 바탕이 되는 자존감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낮은 자존감에 대한 고민이 많은 것 같다
요즘 청년들은 어릴 때부터 서로 경쟁하면서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습관이 몸에 뱄기 때문이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을 평가하고 열등감에 빠지면 자존감이 낮아지기 십상이다. 지금의 우리 청년세대는 엄청난 입시 경쟁률을 뚫고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에서는 취업문을 뚫기 위해 1학년 때부터 학점관리를 하고 있다. 성적뿐만 아니라 외모, 성격 등 모든 조건이 살아남기 위한 경쟁 요소가 됐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자괴감에 빠지고 있다.
소셜미디어도 자존감을 낮추는 데 한몫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주변 사람들이 잘 먹고, 잘 놀고, 잘 꾸미는 등 좋은 모습만 보여주니 나만 불행하게 산다고 느끼는 것이다. 즉, 소셜미디어 때문에 비교 성향이 더 강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인터넷에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이 매일 잘 먹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인생에서 가장 최상의 순간을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보는 사람은 그 이면을 생각하지 않고 비교를 하며 열등감에 빠지곤 한다. 몸매가 좋은 연예인들도 그 사진 한 장을 찍기까지 얼마나 고된 노력을 했겠는가.
―자존감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게 철저히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말인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그렇다. 우리보다 앞서 저성장을 겪은 일본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저성장 시대가 오고 불황이 길어지면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경쟁을 포기하고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소박한 삶이 유행했다. 성취욕을 해소할 수 없는 사회에서 개인적인 행복을 찾겠다는 생각이 커지고, 그럴수록 나를 돌아보게 된다.
서구권도 마찬가지다. 자존감이라는 개념이 우리보다 앞서 발전했다. 우리보다 전쟁과 불황으로 인한 혼란을 먼저 겪었기 때문이다. 집단적 가치관이 혼란에 빠지면 개인의 삶에 천착하게 된다. 그 이후에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다양한 삶의 방식이 공존하는 상태가 된다. 지금 서구권이 그 상태다. 결국, 이런 현상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 일시적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경제 흐름이 좋아지면 부의 양극화도 해소되고, 경쟁도 완화된다. 비교를 덜 하게 된다.
―기성세대라고 자존감에 대한 고민이 없었을까
과거에는 대가족이나 마을 공동체가 존재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법이나 내 자아에 대해 크게 고민할 일이 없었다. 나만 해도 큰 누나가 소개팅 가기 전날 가슴 졸여하는 모습을 보고, 둘째 누나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2주 동안 앓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아 원래 헤어지면 가슴이 아프구나’ 이런 걸 주변 사람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공동체 구조가 무너지고 개인이 파편화되면서 힘든 일이 닥치면 ‘나만 힘들구나’ 하면서 자괴감에 빠지고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이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개인 간 감정을 공유하고 소통할 기회가 줄어들면서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훈련’을 스스로 하기 어렵게 되고, 그러다 보니 책에서 답을 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커지는 것 같다.
10여년 전부터 성장기에 있는 아이의 내면을 살펴보려는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우리 부모가 달라졌어요’ 같은 프로그램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자존감에 대한 관심도 많고 이게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는 지’ 그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아마 육아나 자신의 자아에 관심이 많은 20~30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방법을 알고 싶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관련 책을 찾게 되면서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책과 프로그램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자존감이 낮을 땐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자존감이 낮다고 해서 억지로 높이려고 노력하면 더 안 된다. 자존감이 낮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금의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려고 노력하면 자연스럽게 자존감이 높아진다.
직장 스트레스나 가족, 친구 때문에 힘들어서 자존감이 낮아졌다면 환경을 바꾸는 것도 도움이 된다. 주변에는 분명 자존감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피하는 일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괴롭다면 벗어나는 것도 자신을 위하는 일이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하고 힘든 것과 즐거운 것을 같이 나눠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그런데 가족 구성원 중에서도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럴 경우 서로 떨어져 지내는 것도 오히려 관계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