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은 커리어 내내 '꽃길'만 걸어온 수퍼스타, 또 한 명은 '흙길'만 걷다가 끝내 조용히 은퇴를 선택한 후보 선수. 두 사람이 선수 은퇴 후 지도자로 '우승 반지'를 놓고 맞붙는다. 프로농구(KBL) 이상민(45) 서울 삼성 감독과, 김승기(45) 안양 KGC 인삼공사 감독의 이야기다.

프로에서 엇갈린 운명

두 사람은 아마추어 선수 시절까지만 해도 미래가 창창한 '특급 유망주'였다. 이상민은 홍대부고 시절 '천재 가드'라는 별명을 얻었고, 연세대 재학 중엔 우지원·서장훈을 이끌고 실업팀들을 제치고 농구대잔치 우승(1993-94 시즌)까지 일궈냈다. 곱상한 얼굴로 농구계 '오빠 부대'를 처음 만들어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올 시즌 프로농구 패권을 다툴 김승기(아래 왼쪽) KGC인삼공사 감독과 이상민(아래 오른쪽) 삼성 감독. 위는 2001~02 시즌 김 감독(당시 원주 삼보)과 이 감독(전주 KCC)이 현역으로 활동할 때 모습이다.

용산고-중앙대를 나온 김승기도 이때는 이상민에 뒤지지 않았다. 이상민이 코트 위의 사령탑이라면, 김승기는 돌격대장에 가까웠다. 182㎝, 86㎏의 체격인 그는 가드이면서도 직접 공을 몰고 돌파한 뒤 골을 넣는 플레이를 즐겼다. 그래서 별명도 '터보 가드'였다. 이상민은 1년 먼저 학교에 들어간 김승기를 형으로 부른다. 이상민은 "승기 형은 워낙 힘이 장사라 좀처럼 뚫기 어려운 상대였다"고 기억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상무 소속이던 1995-96, 1996-97 시즌 농구대잔치 준우승을 함께 이끌었다.

그러나 1997년 프로리그가 출범하면서 둘의 운명은 달라졌다. 이상민은 여전히 전국구 스타였다. 데뷔 시즌 MVP를 비롯해 2년 연속 챔피언 반지를 차지했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영광도 누렸다. 2010년 선수에서 은퇴할 때까지 9년 연속 올스타전 투표 1위에 오른 전설적 기록도 남겼다. 이상민의 팬클럽 '이응사'(이상민을 응원하는 사람들) 회원은 전성기 때 2만명을 넘겼고, 은퇴한 지금도 1만명이 넘는다.

반면 김승기는 열성 농구팬 정도만 그의 선수 시절을 기억한다. 주로 백업 가드 역할에 그친 탓이다. 외국인 선수들이 뛰는 프로 무대에선 그의 장점인 돌파가 잘 통하지 않았다. 그는 "상무 때만 해도 스타였기 때문에 프로 진출 이후 아내와의 화려한 결혼식을 약속했다. 그러나 정작 프로 무대에서 부진해 한산한 결혼식을 해야 했다.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다"고 했다. 원주 TG엑서스 소속으로 우승을 차지했던 2002-03 시즌에도 그의 역할은 '허재의 후보'였다. 김승기는 2006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했다.

감독으로 운명 뒤집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의 감독 경력은 2~3년 정도다. 이상민은 선수 은퇴 후 해외 연수를 받고 곧바로 감독에 취임하며 '스타 대접'을 제대로 받았지만, 김승기는 10년 가까이 코칭스태프에 머물렀다. 전창진 전 KGC 감독이 승부 조작 혐의로 사임한 뒤에야 그 팀 감독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올 시즌 KGC는 시즌 내내 탄탄한 전력으로 상위권을 유지한 끝에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삼성은 초반 선두를 달리다 중반 이후 고전, 3위에 오르며 6강 플레이오프부터 치러야 했다. 시즌 상대 전적은 삼성이 4승2패로 앞선다.

두 사람은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 20일 열린 미디어데이에서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다. 김 감독은 "삼성은 플레이오프 6강, 4강 모두 5차전까지 가는 혈전을 치렀다. 3차전에 끝내고 푹 쉬었던 우리가 유리하다. 이번 기회에 선수·코치·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차지하는 기록을 세울 것"이라고 선제공격을 했다. 이에 대해 이 감독은 "농구는 체력만 갖고 하는 게 아니다. 정신력·집중력은 삼성이 더 유리하다고 본다"고 맞섰다. 꽃길과 흙길의 운명이 뒤집힐 수 있을까. KGC와 삼성은 22일 오후 안양체육관에서 7전4선승제 챔피언전에 돌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