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오전 8시쯤 경남 양산 덕계동에 있는 15층 아파트 외벽에서 창틀에 실리콘 바르는 작업을 하던 김모(46)씨가 추락사했다. 이 아파트 15층에 사는 입주민 서모(41)씨가 작업자들이 휴대전화로 틀어놓은 음악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며 옥상으로 올라가 김씨가 매달려 있던 밧줄을 칼로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가해자 서씨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이날 새벽 일을 찾으러 밖에 나갔으나 빈손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는 길에는 술을 마셨다. 서씨는 경찰에 "집에 와서 잠을 청하려는데 음악 소리가 들려서 작업자들에게 '음악을 꺼달라'고 했다. 그래도 음악이 계속 들리자 화가 나서 밧줄을 끊었다"고 진술했다. 경남 양산경찰서에 따르면 서씨는 3~4년 전 폭력 등의 혐의로 구속됐고 이후 공주치료감호소에서 정신 감정을 받은 결과 조울증 증세를 보인 바 있다. 작년 출소하고 나서는 그러나 따로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 서씨는 지난 14일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15일에는 연세대 기계공학과 대학원생 김모(25)씨가 자신이 소속된 연구실 김모(47) 교수를 향해 사제(私製) 폭탄을 터트린 혐의로 구속됐다. 텀블러 안에 못과 전선을 넣어 폭발하도록 만든 폭탄이었다. 대학원생 김모씨는 과학고를 2년만에 조기 졸업했고 학부 과정을 마친 뒤 대학원에서도 인정 받는 학생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김씨가 최근 들어 연구결과 해석을 두고 김 교수와 이견을 빚으면서 질책을 들은 것을 못 견뎌 범행을 저지른 것 같다"고 진술하고 있다. 화를 다스리지 못한 충동 범죄였다는 것이다.
욱하는 기분을 다스리지 못해 벌어지는 소위 '분노 조절 장애형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작년 8월 전남 나주에서 세 살짜리 조카를 살해해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최모(26)씨 사례 역시 우리 사회가 조울증과 분노 조절 장애 환자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남긴 사건이다. 직장 문제로 떨어져 사는 언니 대신 홀로 조카를 돌보던 최씨는 오랜 기간 조울증과 분노 조절 장애를 앓아오며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투약 중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화가 난다'는 이유로 종종 조카를 폭행해 골절상까지 입혔다. 작년 8월엔 '아이가 대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해 침대가 더러워졌다'며 조카의 머리를 욕조에 집어넣고 호스로 물을 입에 넣는 등의 가혹 행위를 하다가 끝내 조카를 죽게 만들었다.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의 분노 지수가 이미 끓는 점에 도달했다"고 경고한다. 분노 조절 장애형 범죄에 대한 예방책을 서둘러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언제 방아쇠를 당길지 모른다
지난 7일 자정쯤 58세 남성 A씨가 부산 사하구 상가 앞에 있는 주차장을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고급 승용차 7대를 동전과 열쇠로 마구 긁어대고 훼손하다 경찰에 검거됐다. A씨를 불구속 입건한 부산 사하경찰서는 "A씨가 최근 사업에 실패하고 분노 조절 장애와 우울증을 앓아왔다"고 했다. 분노 조절 장애형 범죄는 이렇듯 누가 언제 왜 어떻게 피해자가 될지 예측할 수 없어서 더욱 두렵다. 작년 11월 경찰청이 발표한 '2015년 경찰청 통계 연보'에 따르면 2015년 발생한 폭력 범죄 중 15%(26만5129건)가 현실 불만과 우발적인 동기로 발생했다. 동국대 이윤호 경찰사법대학장은 "경쟁이 심할수록, 실직률이 높아지고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불평등하다는 피해 의식이 강해질수록, 내 말을 누군가가 제대로 들어주지 않고 있다는 자기 비하가 심해질수록 이런 종류의 범죄는 많아진다"면서 "분노 조절 장애형 범죄가 많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어렵고 각박해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2004년 1만810건이던 우발적 폭행 건수는 2014년에는 7만1036건으로 늘었다. 5배 넘게 늘어난 것이다.
책 '분노 비용' 등을 쓴 미국의 의학박사이자 심리학자인 해리 밀리스는 "사회구조와 인간관계가 복잡해질수록 조울증, 행동 장애, 분노 조절 장애 환자가 늘어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고 했다. 실제로 행동 장애나 충동 조절 문제로 치료를 받는 환자 수 역시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09년 3720명이던 충동 조절 장애 환자는 재작년 5544명으로 불어났다.
격리하거나 모른 척하거나
화가 난다고 누구나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사람은 화가 나도 스스로 가라앉히는 법을 안다. 분노 조절 장애를 앓거나 조울증이 있는 사람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들 역시 치료를 제때 받으면 큰 문제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상황'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권일용 전 경찰청 범죄행동분석팀장은 "분노 조절 장애 범죄자의 상당수는 가족마저 등을 돌린 탓에 홀로 산다. 치료를 받다가도 이런저런 이유로 관두게 되는데, 옆에서 이를 말리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자격지심과 절망에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경찰청 조사에 따르면 충동 범죄자의 80% 이상이 혼자 있을 때 문제 행동을 일으킨다. 권 전 팀장은 "일부에서는 머릿속에 확 불이 붙는 '분노 퓨즈'가 범죄의 원인이라고 하지만, 이조차 옆에서 누군가가 안아주고 달래주면 가라앉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재빨리 이들의 문제점을 알아차리고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는 제도와 시스템"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러나 분노 조절 장애나 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병원에 보내기가 쉽지 않다. 정신과 치료 자체가 아직까지 '문제자로 낙인 찍히는 행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법무부 등이 스마일센터를 운영하면서 치료 감호를 한다고 하지만, 끝까지 제대로 치료를 받는 경우 역시 많지 않다.
이윤호 학장은 "한국 특유의 인식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여전히 우리나라에선 정신과 치료 자체를 아예 '필요없는 것'으로 부정하거나 아니면 '병원에 보내 버려야 하는 사람' 같은 극단적 대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들을 포용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이다. 지난 5월말 정신보건법이 개정되면서 정신 질환자를 강제 입원시키는 행위가 남용되지 않도록 바뀌었지만, 정신 질환자를 여전히 격리해야 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이 남아 있는 것도 문제다. 권 전 팀장은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나라 분노 조절 장애 환자들이 OECD 다른 나라 환자들보다 치료 기간이 보통 10배가량 길다. 병원에 아예 가지 않거나 너무 늦게 가서 치료 기간이 길어지는 것"이라면서 "정신 장애 환자들을 국가가 철저히 관리해줘야 하는 필요성 또한 여기에 있다"고 했다.
외상 후 울분 장애, 감기처럼 관리하자
울분은 축적된다. 범죄자는 하루아침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안용민 교수는 "이제는 외상 후 울분 장애를 국가가 나서서 조기 관리해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마치 전 국민의 대사증후군이나 당뇨병 등을 보건복지부가 관리하듯 외상 후 울분 장애를 관리·감독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안 교수는 "화를 다스리는 것과 해소하는 것도 교육이고 훈련이다. 어릴 때부터 이를 나라가 관리해주고, 어떻게 다스리는지 알려주면 큰 산을 넘을 수 있다"고 했다.
일부에선 지역 커뮤니티의 재건을 대안으로 이야기한다. 변호사협회 사무처장인 오은경 변호사는 미국·호주 등의 사례를 설명했다. 이 나라들에선 동네마다 의사·변호사·경찰·법무관·사회복지사가 참여하는 반상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이 모임에서 '요즘 우리 동네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는지'를 논의한 다음 이들을 찾아가 강제적으로 치료나 상담을 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오 변호사는 "가족이나 친구가 없는 사람들, 사회적 기반이 없는 사람들, 이들의 불만 에너지를 완충할 수 없는 방법도 여기에 있다"고 했다.
법무부의 치료 감호를 강화시키는 것도 숙제다. 미국이나 뉴질랜드 등에서는 범죄자들이 제대로 치료 명령을 이행하면 면소나 공소 기각 등의 혜택을 줌으로써 치료를 제대로 받게끔 유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