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울푸드(Soul food)'는 본래 미국 흑인들의 전통 음식을 뜻하는 말이지만, 우리에겐 '영혼을 위로하는 음식'이란 의미가 강하다. 에서는 문학이나 영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울푸드'를 찾아 그 기원과 매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에서 엿장수는 주인공의 역마살(驛馬煞)을 상징한다. 화개장터의 주막에서 일하는 옥화의 아들 성기는 역마살을 타고난 인물이다. 그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전국 어딘가에서 떠돌이 삶을 산다. 옥화는 아들이 그런 삶을 물려받지 않게 하기 위해 한 여자와 맺어주려 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성기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엿판을 메고 떠난다.

실제로 과거 엿장수들은 집이 없었다. 가위 하나 들고 전국을 누비다가 해가 지면 '엿 방'이라 불린 엿 공장에 가 잠을 잤다. 떠돌이의 삶이었기에 가정을 이루기도, 한 곳에 정착하기도 어려웠다.

추창민 감독의 영화 '광해'에는 왕(광해군, 이병헌)이 밤참으로 엿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광해군은 허균(류승룡)과 대화를 나누던 중 야식이 들어오자, 친히 엿을 하나 집어 그에게 권한다. "엿 드시라"며… 현대의 '엿 먹으라'는 용어와 오버랩 되며 일부 관객은 웃음을 터뜨렸겠지만, 조선시대에는 '엿 먹으라'는 게 욕이 아니었다. 오히려 엿은 왕의 밤참에도 오를 만큼 좋은 음식이었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는 하루 다섯끼(새벽상, 아침상, 점심상, 저녁상, 밤참)를 먹었는데, 밤참 메뉴는 주로 엿, 약과, 경단, 차(茶) 등이었다.

엿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1241년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있다. 이규보는 '당(餳)은 단단한 엿이고 낙(酪)은 감주의 일종'이라는 문장을 통해, 당시에도 엿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린다. 이웃 나라인 중국에서는 훨씬 오래전부터 '엿'이라는 용어가 존재했다.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업기술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 6세기 중반)'에 '싹이 푸른 엿기름은 검은 엿을 만들고 싹이 흰 엿기름은 흰엿을 만든다'고 쓰여있다. 중국을 통해 한국에 엿이 전해졌다고 추정할 수도 있으나 정확한 근거는 없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엿이 상당히 보편화 되었고, 여러 문헌과 풍속화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 생활 지침서라 할 수 있는 '규합총서(閨閤叢書, 1809)'에는 엿 고는 방법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궁중에서는 왕세자에게 공부시간 전 조청(물엿)을 두 숟가락 먹였고,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선비들은 허리춤에 엿을 매달고 걸었다고 전해진다. '당(糖)' 떨어지는 것을 막고 두뇌회전을 빠르게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참고로 조선시대에 설탕과 꿀은 귀했으며, 엿만이 서민들이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달콤한 간식이었다.

엿장수 이야기
(좌) 조선 후기에 그려진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씨름'. 한켠에 앳된 얼굴의 엿장수가 보인다. (오) 조선시대 엿장수의 모습.

엿장수는 주로 평민의 남아들이 많았다. 여자 아이들이 5~6세부터 집안일을 배웠다면 남자 아이들은 농사를 돕거나 장사를 했다. 제 몸집만한 엿목판과 '철컹철컹' 소리를 내는 엿가위를 들고 사람을 불러모았다. 이때 엿장수가 내는 소리를 '엿단쇠 소리' 또는 '엿불림'이라고 한다. 당시엔 화폐로 엿을 사는 게 아니라 '물물교환'이었기 때문에 엿장수는 고물을 싣고 다닐 손수레도 끌었다. 고물이나 빈 병 같은 것을 받고 엿을 팔았는데, 이때 엿을 떼어주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관용어가 생겨났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엿장수는 천대받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거지도 엿장수에겐 반말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투사들이 거리의 엿장수로 위장해 다녔다. 이 때문에 일제가 한국 전통음식인 엿을 더욱 천대했다는 설도 있다.

엿의 매력은 무엇일까. 이에 쩍쩍 달라붙는 식감과 달짝지근한 맛도 그런데, 생김새도 독특하다. 엿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나 외국인이 본다면 '이게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고' 할 것이다. 여기에 설탕이나 꿀이 단 한 숟가락도 들어가지 않은 것을 알면 더 놀랄지도 모른다.

엿 만드는 법

엿의 주재료는 찹쌀이나 멥쌀(일반적으로 밥을 지어 먹는 쌀), 또는 옥수수, 고구마 등의 서류(薯類·덩이줄기나 덩이뿌리 작물)다. 지역마다 사용하는 재료는 조금씩 다른데, 기본적으로 주재료에 엿기름을 섞어 당화(糖化)시키는 방식이다. 당화란 녹말·섬유소 같은 탄수화물에 산 또는 효소를 작용시켜 당류·포도당·과당 등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보통 엿은 '만든다'가 아닌 '고다'라는 표현을 쓴다. 졸아서 진하게 엉기도록 끓이는 일이 '고는' 것이다. 어감이 비슷해서일까. 엿을 만드는 일은 오랜 시간과 정성을 요하는 '고된' 일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희고 길쭉한 엿은 만들어지는 동안 크게 네 단계를 거친다. 식혜 → 조청 → 갱엿(강엿) → 흰엿이 그 과정이다.

①식혜

는 밥을 지은 뒤 엿기름을 넣어 삭힌 음료다. 엿기름이란 '기름(oil)'이 아니라 보리에 싹을 틔워 말린 '맥아(malt)'다.

②조청

은 식혜를 졸인 것이다. 본래 자연 상태의 꿀을 '청(淸)'이라 하는데 인공적인 꿀이라는 뜻에서 '조청(造淸)'이라 이름 붙었다. 실제로 모양새도 꿀과 비슷하다. 조청은 졸이는 정도에 따라 농도를 조절할 수 있는데, 흘러내릴 정도로 묽은 것은 주로 떡을 찍어 먹고 좀 더 진득한 것은 과자나 강정에 발라 먹는다.

③갱엿

은 조청을 오랫동안 고면 만들어진다. 이때 엿이 눌어붙지 않도록 나무주걱으로 저어줘야 하는데, 과거 솥에서 엿을 만들 때 이 과정이 쉽지 않았다. 젓다가 뜨거운 엿물이 튀어 화상을 입기도 했다. 당류의 캐러멜화로 엿이 갈색을 띠면 그대로 굳힌다. 갱엿은 짙은 색깔 때문에 '검은 엿'이라고도 한다.

④흰엿

은 갱엿이 완전히 굳기 전에 만들어야 한다. 두 사람이 국수를 뽑듯 양쪽에서 잡아당기는데, 여러 번 당길수록 엿이 더 하얗게 된다. 또 이때 엿 사이로 공기가 유입되면서 크고 작은 구멍이 만들어진다. 엿을 당기는 과정을 '엿을 켠다'라고 하는데, 어떤 집의 엿이 노르스름하면 엿을 켜는 일을 소홀히 했다고 흉을 봤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전기밥솥과 냄비를 이용해 엿을 만들 수 있다. 엿의 첫 단계인 식혜를 만들 줄 안다면 엿 만드는 과정의 절반은 한 것이니, 한 번쯤 도전해 볼 만 하다.

그래픽=이은경
엿의 효능

'동의보감'에서는 '잘 만들어진 엿은 어떤 당분보다 좋은 효과가 있다'고 소개한다. 특히 검은 엿(갱엿)에 대해서는 '허약한 기력을 보하고 오장을 윤택하게 하며 가래와 기침을 멎게 한다'고 했다. 중국에서 한약을 총정리한 책인 '중약대사전'에도 엿의 효능이 나온다. 원기 회복과 소화에 좋다는 내용이다. 이 때문에 과거 몸이 허약한 환자나 출산한 여성이 집에 있으면 엿을 고아 먹이곤 했다.

실제 엿의 주요 성분인 엿당(맥아당)은 체내에서 포도당으로 분해되는데, 이 포도당은 우리 몸의 에너지원으로 이용된다. 보리로 만드는 엿기름에도 비타민B·엽산·철분·칼슘 등의 영양소가 풍부하다. 최근에는 엿이 '긴장성 복통'에도 효능이 있는 것도 알려졌다.

엿의 의미
(왼) 한 할머니가 수능날 교문에 엿을 붙이고 있다. /연합뉴스, (오) 부진한 성적을 내고 돌아온 축구대표팀에게 호박엿이 날아들고 있다.

엿은 기원과 조롱의 상반된 의미를 지녔다.

기원

대표적인 게 시험을 앞두고 엿을 주는 풍습이다. 이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던 선비들이 엿을 들고 길을 떠나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공부하는 사람이 있는 집에서 엿 고는 냄새가 난다'는 옛말도 있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엿의 끈적끈적한 속성 덕에 '철썩 붙으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혼례가 있을 때 신부 집에서 신랑 집으로 보내는 이바지 음식 중에도 엿이 있었다. 두 사람이 엿가락처럼 붙어 백년해로 하라는 기원의 의미와, 며느리에게 잔소리하는 시댁 식구들의 입을 달콤한 엿으로 막으려는 딸 부모님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정월 초하루나 대보름에는 햇곡식으로 만든 '복(福)엿'을 나눠 먹으며 가족의 건강을 빌었다.

조롱

현대 사회에서 엿은 조롱과 욕을 뜻하는 속어로 더 많이 쓰인다. 남을 골탕 먹이거나 속일 때 '엿 먹어라'라고 하고, 마음에 안 차는 일이 있을 때 '엿 같다'고 한다. 엿이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조롱과 욕설의 의미를 띄게 되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1964년 있었던 '무즙 파동'이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의견이 다수다.

중학교 입시 경쟁이 치열하던 당시, 시험에 엿을 만들 때 엿기름 대신 쓸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문제가 나왔다. 실제 정답은 다이어스테이스라는 효소였지만, 보기 중에 있던 '무즙'이 말썽이었다. '무즙'을 고른 학생의 학부모들은 무즙도 정답이 될 수 있다며 실제 무즙으로 만든 엿을 들고 교육청에 찾아갔다. 이 때 '(무즙으로 만든) 엿 먹어라'고 했던 것이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는 설이다.

엿도 김치나 떡처럼 지역마다 특색이 있다. 주로 제 지역에서 나는 토종 농산물을 이용해 만든 게 유명하다. 먹을 게 변변치 않던 시절엔 엿을 통해 육식을 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엿은 지금 거의 사라졌다.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엿들과 전통있는 엿 마을을 소개한다.

그래픽=이은경, 사진=농촌진흥청·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무엿

: 흡사 조청과 생김새가 비슷하여 떠 먹는 엿이다. 충청도 지방에서 늦가을 서리맞은 무로 만들었다. 엿을 만드는 과정에 무를 납작하게 썰거나 채를 썰어 함께 넣어 곤다. 무엿은 겨우내 보관하면서 기침이나 천식이 날 때 약처럼 먹었다.

-창평 쌀엿

: 조선시대 양녕대군이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 지역에 낙향하여 지낼 때 궁녀들이 전수해 준 엿이다. 이에 달라붙지 않고 바삭바삭한 게 특징. 엿을 길게 늘이는 과정을 두 번 행한다. 특히 두 번째(첫 번째는 '초벌늘림', 두 번째는 '두번늘림'이라고 함)에는 솥에 젖은 삼베 수건을 덮은 위에서 엿을 늘리는데, 이때 수건에서 증발한 수증기가 엿에 들어가며 세로결 무늬가 형성된다.

-고구마엿

: 고구마가 많이 나는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유명한 엿이다. 고구마를 삶아 으깬 것에 엿기름을 넣어 만든다.

-돼지고기엿

: 과거 제주도 서귀포 지역에서 보양식으로 만들어 먹었다. 육류가 흔치 않았던 시절, 마을 사람들끼리 계를 통해 돼지고기엿을 만들고 이를 겨우내 보관하며 먹었다고 전해진다. 1980년대 이후 돼지고기가 흔하게 되면서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삶은 돼지고기를 찢어서 넣은 돼지고기엿은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해 열량 보충에 좋다.

-닭엿

: 돼지고기엿과 함께 제주도 서귀포에서 유래한 엿이다. 꿩으로 만드는 '꿩엿'도 있다. 닭을 삶아 살을 잘게 찢어 엿을 만들 때 함께 넣는다. 환자나 노인, 어린아이 등의 기력 보충을 위해 먹었는데, 딱딱한 갱엿이 아닌 숟가락으로 떠 먹는 엿이다.

-옥수수엿

: 마른 옥수수를 주재료로 만드는 엿으로 경상북도와 강원도에서 유명하다. 경상북도에서는 '강냉이엿', 강원도에서는 '황골엿'이라 한다. '황골엿'은, 옥수수엿이 유난히 황색을 많이 띤다는 의미다. 마른 옥수수를 맷돌에 갈아 죽처럼 쑨 다음 엿기름을 넣어 만든다.

-호박엿

: 울릉도 특산물로 '호박엿'이란 이름이 붙게 된 유래는 몇 가지가 있다. 실제 호박이 아니라 엿의 색깔 때문에 호박엿으로 불렀다는 것, 약용으로 후박나무의 껍질을 넣었는데 그것이 육지로 나오면서 '호박엿'으로 와전됐다는 것 등이다. 현재는 실제 울릉도 호박을 30% 이상 첨가하여 엿을 만든다.

전북 임실 '박사골 엿마을'
▲ 박사골에 있는 학정마을. 2분 45초부터 이 곳에서 직접 엿을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북 임실군 상계면에는 인구 1,600명 중 160여 명의 박사를 배출한 '박사골'이 있다. 면 단위로 전국 최고 수준이다. 본래 낙향한 선비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이 곳이 언제부턴가 엿으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박사와 엿. 언뜻 보면 상관없어 보이지만 엿이 대학 합격을 염원하는 상징물이라는 걸 떠올려보면 오묘한 상관관계가 있다.

박사골에서는 김장철이 지난 겨울부터 엿을 만든다. 박사골에서 엿을 가장 오래 만들었다는 한규채씨는 이 마을 엿의 특징을 '사글사글하다'고 표현한다. 딱딱하지 않고 이에 들러붙지 않으며 맛있다는 뜻이다. 이에 붙지 않는 노하우는 엿을 잡아당기는 과정에서 수많은 공기구멍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엿을 들어 태양에 비춰보면 햇볕이 그대로 통과할 정도로 구멍이 많고 가벼운 것을 상품(上品)으로 친다.

[자식은 박사되고, 부모는 엿 만드는 마을… '박사골 엿마을']

엿은 그 옛날 고물 주고 바꿔먹고 싶었던 군것질거리였고, 시험 보는 날 엄마가 주머니에 넣어주던 '부적'이었다. 이런 엿이 이제는 욕으로 먼저 받아들여진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