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히 홀로 떠난 마광수 교수 영결식 현장 & <즐거운 사라> 발행인 장석주 시인의 추모 인터뷰.
지난 9월 5일 예기치 못한 부고로 세간이 들썩였다. 1990년대 음란물로 낙인 찍힌 소설 <즐거운 사라> 저자이자 전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인 마광수가 동부이촌동 자택 베란다에서 목을 매 숨진 채로 발견된 것. 시신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복 누나 조모 씨(74세)가 발견했다. 마 교수는 시신 처리와 유산을 누나에게 맡긴다는 유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향년 66세, 한때 윤동주 시인 연구의 권위자이자 28세에 홍익대 교수에 임명된 천재 학자로 유명했던 고인은 그렇게 홀로 빈집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인생의 첫 시련,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
마 교수는 1977년 월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다. 이후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1989), 수필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89) 등을 펴내며 음지의 것으로만 여겨지던 성 담론을 거침없이 언급해 화제를 모았다.
1991년 그가 펴낸 소설 <즐거운 사라>는 한 여대생이 교수와 성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으로 출간되자마자 외설 시비에 휘말렸다. 이듬해 마 교수는 <즐거운 사라>를 출간한 출판사 대표인 장석주 시인과 검찰에 구속돼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그는 연세대에서 강의하던 학기 중이었고, 거주도 명확한데다 유명인이었음에도 영문을 모른 채 긴급 체포됐다. 판결은 1995년 열린 3심에서도 바뀌지 않았고, 마 교수는 결국 유죄 꼬리표를 달게 됐다.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은 마 교수 인생의 가장 큰 시련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이 사건으로 몸담고 있던 연세대에서 교수 자리를 위협받으며 해직과 복직을 반복했고, 교수 사회에 섞이지 못하고 따돌림당했다. 그리고 훗날, 이런 억울함이 쌓이고 쌓여 자살 원인으로 추정되는 우울증까지 심하게 앓았다.
입원 제안받을 정도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마 교수는 죽기 전 극심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연세대 학보인 <연세춘추>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너무 우울해서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고 밝히며 본인의 우울증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경찰은 그가 최근까지 병원에서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복용해왔으며, 증상이 점점 악화돼 입원 제안까지 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마 교수는 끝내 입원을 거부하고 약만 복용했다. 마 교수 측근들은 그가 지난해 8월 정년 퇴임한 뒤로 병세가 더욱 심각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으로 해직된 탓에 퇴임 후 명예교수 직위도 얻을 수 없었다. 세상의 외면은 점점 마 교수의 마음을 병들게 했을 것이다.
조촐했지만, 통곡으로 가득했던 영결식
마 교수 빈소는 그의 자택에서 차로 10여 분 떨어진 순천향대학병원에 마련됐다. 1천여 명에 달하는 조문객이 마 교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망 이틀 후인 7일, 마 교수의 영결식이 열렸다. 병원 한편에 마련된 조그마한 영결식장엔 마 교수의 유가족인 이복 누나 조 씨와 조 씨의 딸인 한 씨가 참석했다. ‘가족’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두 명이 전부였다. 나머지 참석자는 대다수가 고인의 중·고등학교 동창이거나 연세대학교 제자들이었다. 영결식은 20~30여 명의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작됐다. 고인의 유명세에 비해 영결식은 조촐했다. 문학계 인사들의 모습도 뜸했다.
영결식 진행은 마 교수의 대광고 동기인 심강인 씨가 맡았다. 그는 “광수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와 소설을 짓고, 고등학교 땐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대의 천재였습니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그는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그의 작품과 정신은 살아있을 것입니다”라고 언급하며 중간에 몇 번이나 잠기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어 연세대 제자들의 추도사가 시작됐다. 유성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즐거운 사라>의 영화화를 추진했던 임장미 영화감독 등이 추도사를 맡았다. 특히 임 씨는 추도사 대신 즉석에서 마 교수의 억울함에 대한 울분을 토해냈다. 그가 격앙된 목소리로 마 교수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표현하자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즐거운 사라’ 발행인 장석주,
‘함께 옥고 치른 ‘그가 기억하는 마광수
지난 9월 15일, 파주의 한 카페에서 <즐거운 사라>를 발행한 당시 청하출판사 대표였던 장석주 시인을 만났다. 그에게 이번 인터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 시인은 고인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친구이자,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 당시 함께 옥고를 치른 동지였던 마 교수를 위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역시 마 교수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표현했다.
마광수 교수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제가 운영하던 출판사인 '청하'에서 마 교수의 초기 저작들을 발행한 것이 계기였어요. 마 교수가 지인을 통해 책을 내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고, 소개를 받아서 친해졌지요. 마 교수는 당시에도 유명했지만, 그의 책을 흔쾌하게 내주는 출판사는 많지 않았어요.
마 교수의 부고 소식을 듣고 많이 놀라셨겠어요. 카페에서 원고를 쓰고 있는데, 오후 2시쯤 아는 기자한테 전화가 왔어요. 마 교수가 죽었다는 속보가 들어왔는데, 아마 자살인 것 같다고. 그 뒤로 일간지 기자들에게 전화가 계속 오더군요. 너무 갑작스러웠고 당황스러웠죠.
마 교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사회적 타살이란 말은 앙토냉 아르토라는 프랑스 작가가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이에요. 고흐는 자살했지만 사실은 사회적 타살이란 거죠. 고흐의 자살이나 21세기 마 교수의 자살은 똑같아요. 자살 형식을 빌렸지만 이것은 한 사회가 그 예술가에 대한 냉대와 몰이해로 공모해서 죽인 거예요.
최근에 마 교수를 만난 건 언젠가요? 몇 년 됐어요. 마 교수가 새 책이 나오면 꼬박꼬박 책을 부쳐줘서 한 번씩 전화를 했어요. 그때마다 만나서 식사를 하자고 했는데, 건강이 안 좋아서 밖에 잘 안 나간다며 거절했었죠. 건강이 좋아지면 보자고 했는데, 이미 우울증에 대인기피증까지 앓고 있었어요. 의사는 조금 심각한 상태로 봤고, 나중에 알고 보니 입원을 권유하기도 했대요. 본인이 입원은 원하지 않아서 집에서 약을 타다 먹었다고 들었어요. 그러던 중에 일이 터진 거죠.
마 교수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알고 있었어요. 본인은 얘기하지 않았지만, 아는 사람 편에 전해들은 얘기로는 고립돼 있어 외롭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더군요. 생활고도 좀 있었고. 연금만으론 입주 가정부의 월급을 주고 나면 생활비가 모자랐다고 해요. 그래서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팔려고 했었다는데 마 교수가 죽기 전까진 아무도 그에게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미친 사람 취급을 했잖아요? 화랑에 그림을 내놨는데도 안 팔렸다고 해요. 그림 값이 크게 비싸지도 않았어요. 실력이 좋아서 아마추어 수준을 넘는 그림이었는데 안타깝죠.
시인께서도 <즐거운 사라> 발행인이라는 이유로 마 교수와 함께 옥고를 치르셨죠. 1992년 10월 29일 새벽에 검찰청 직원 서너 명이 집 앞에 와서 갑자기 연행됐어요. 그날 종일 조사 받고 아마 저녁 8시쯤에 법원 영장이 떨어져서 서울구치소에 함께 들어간 걸로 기억해요. 설마 했어요. 이걸로 사람을 구속시킬까. <즐거운 사라>는 출판된 책이니까 증거인멸도 할 수 없고, 우린 얼굴이 다 알려진 사람들인데 일사천리로 구속까지 진행된 거죠. 처음엔 암담하고 당황스러웠고 속수무책인 상태였어요. 이후 변호인이 선임됐지만 보석 신청도 계속 기각됐고요. 재판이 진행됐어요. 두 달이 빨리 지나갔죠. 12월 30일에 1심 선고 받고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저는 그 사건으로 인해 출판사를 정리하게 됐고, 가정도 풍비박산이 났어요. 내 인생에 가장 큰 변곡점이 된 사건이었죠. 안에 분노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즐거운 사라>가 파장을 일으킬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구속까지는 예상을 못 했죠. 저는 표현의 자유와 외설이란 법적 규제가 정면으로 충돌했을 때 우리 사회의 품이 그렇게 좁진 않을 거라고 낙관적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상당히 엄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 거죠. 검찰 권력이 얼마나 막강해요. 개인이 권력에 맞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모든 걸 감당해야 했고, 거기서 생겨나는 피해와 손실은 온전히 제 몫이었죠.
당시 청하출판사는 <즐거운 사라> 외에도 <마광수 문학론집> <상징시학> <심리주의 비평의 이해> 등 마 교수 작품을 많이 발행하셨어요. 1980년대 당시 한국 사회는 좌파 이념이 휩쓸던 때였어요.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서 편향된 사회가 되는 것을 우려했죠. 지식생태계가 건강해지려면 반대쪽에도 좀 균형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런 면에서 마 교수가 가진 문학적 혹은 이념적·사상적 위치가 대단히 독특했어요. 마광수 같은 사람도 우리 사회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마 교수 작업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회를 주는 것이었어요. 지식생태계 균형에 필요하다는 것이 당시 제 생각이었어요. 검찰에서는 내가 마 교수를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했던 게 아니냐고 했지만요.
그 시대에 성 담론을 드러내놓고 언급한다는 건 어떤 의미였나요? 운동권이 득세하던 시기였고,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시대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었죠. 그러나 저는 그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마 교수는 성 담론 해방을 거의 혼자 주창하고 나왔어요. 그것을 시로 소설로 창작해서 계속 보여줬고요. 우리 사회는 밤과 낮이 같지 않은 위선적 사회였어요. 낮은 근엄한 도덕주의자가 지배하지만, 밤은 성적으로 타락한 사회였죠. 마 교수는 그런 이중성을 폭로하고, 성 담론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 면에서 어쩌면 더 자극적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작품을 썼던 거죠.
출판사 대표로서 <즐거운 사라>를 발행하는 것이 부담스럽진 않으셨나요. 사드의 <규방철학>이나 <소돔 120>에 견줘 <즐거운 사라>의 성적 묘사가 더 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즐거운 사라>는 책으로 나오기 전에 한 여성지에 6개월간 연재했던 작품이고, 연재하는 동안 문제가 없었죠. 그걸 서울문화사에서 책으로 출판하려고 했는데,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고발이 들어와 비공식적으로 판매금지 요청이 왔다고 해요. 마 교수는 그걸 억울해했어요. 꼭 출판됐으면 좋겠다고. 사실 마 교수를 처음 만난 건 <즐거운 사라>가 아니라 그 직전에 한 신문에 연재했던 <자궁 속으로>라는 장편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얘기하던 중에 <즐거운 사라> 이야기가 나온 거죠.
가까이서 지켜본 마 교수는 어떤 분이었나요? 마 교수는 독창적인 천재였죠. 사물이나 현상을 보는 방식이 보통 사람과 굉장히 달랐어요. 특히 윤동주의 시나 이상의 시를 해석한 걸 보면 독창적인 시각이 두드러져요. 재능도 많은 사람이었어요. 가끔 함께 노래방에 가면 노래도 굉장히 잘했거든요. 자유롭고 유쾌하고 잘 노는 사람이었죠. 멋쟁이였어요.
마 교수 유고 소설집이 발간됐습니다. 마 교수가 노벨 문학상을 받고 죽어서 지옥에 가는데 그 지옥이 행복한 지옥이라는 내용이라더군요.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마 교수답다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으로 마 교수에게 미처 하지 못한 얘기가 있다면요. 조금 더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게 미안해요. 더 자주 봤어야 했는데, 고통을 혼자 짊어지게 했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어요.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