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신라시대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花郞世記)'라고 주장하는 한문 필사본(32쪽)이 부산에서 발견됐다. 1995년에는 이 필사본의 모본(母本·162쪽)이 확인됐다. 재야사학자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사진)가 일본 황실문서를 보관하는 궁내성 도서료(寮)에 근무하던 1930년대 작성한 필사본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화랑세기(花郞世紀)'란 표제의 필사본은 화랑도 우두머리인 풍월주(風月主) 32명의 전기를 담았고 신라인의 자유분방한 성(性) 풍속을 서술해 대중의 호기심을 일으켰다. 필사본은 박창화가 만든 위서(僞書)라는 주장(노태돈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우세한 가운데 진서(眞書)라는 주장(이종욱 전 서강대 총장 등)도 제기됐다.
20일 고려대 백주년기념삼성관에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소장 박대재) 주최, 남당기념사업회(회장 박종경) 후원으로 열린 '남당 박창화의 한국사 인식과 저술' 학술회의는 베일에 가려 있던 박창화의 한국사 관련 저술 활동을 살펴보며 화랑세기에 접근하려는 시도였다.
조형열 고려대 연구교수에 따르면 박창화는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고증학을 중심으로 한학을 공부한 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로 10년 가까이 근무했다. 그 뒤 만주를 답사하고 돌아온 그는 배재고보 교사로 재직하다 1923년 10월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44년까지 머물렀다. 그는 일본 역사잡지 '중앙사단(中央史壇)'에 논문을 발표했고 1933년 10월부터 궁내성 도서료의 조선 자료 담당자로 일했다. 그는 일제가 일본으로 가져간 방대한 한국 문헌을 섭렵하는 한편 일본 국학자(國學者)들의 연구 활동을 접하면서 강역(疆域) 문제와 삼국시대를 중심으로 홀로 한국사 연구에 몰두했다. '역사지리학자'로 자부했던 그는 만주가 우리 고대사 강역이라고 주장하면서 '압록강'을 송화강으로, '대동강'을 지금의 압록강으로 비정(批正)하는 등 북쪽으로 옮겨 잡았다. 광복 직전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교사로 일하며 저술을 마무리하다 세상을 떠났다.
정운용 고려대 교수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192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됐던 일본인 학자들의 화랑제 연구에 대한 대응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화랑의 시원인 원화(源花)를 일본인 학자들이 가공의 존재나 창녀로 그렸던 것을 화랑세기는 제의(祭儀)의 주관자로 설정하는 등 독자적 설명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해서는 193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다수였다. 김정배 전 고려대 총장은 "박창화의 학문적 식견이 녹아 있는 창작적 저술로 보고 사학사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화랑의 계보도인 '상장돈장(上章敦
)'을 1930년에 저술하고 이를 토대로 모본을 만들었으며 귀국 후 다시 이를 줄인 초록본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범환 서강대 교수는 "김춘추·김유신을 높이 평가한 화랑세기는 민족주의 정서가 강한 박창화의 저술과는 결이 다르기 때문에 따로 봐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