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울푸드(Soul food)'는 본래 미국 흑인들의 전통 음식을 뜻하는 말이지만, 우리에겐 '영혼을 위로하는 음식'이란 의미가 강하다. 에서는 문학이나 영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울푸드'를 찾아 그 기원과 매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접시에 놓인 붉은 홍시를 보면 어쩐지 떠오르게 되는 시조다. 조선시대 문인 박인로가 지었다. '반중(盤中·쟁반 가운데) 조홍(早紅·일찍 익는 홍시의 한 종류)감'을 보고 이를 품어오고 싶다고 느끼지만, 이내 품어와도 줄 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내용이다. 여기서 '반길 이'는 평소 홍시를 좋아했던 돌아가신 어머니다. 홍시를 보고 어머니를 떠올린 사람은 현대에도 있다. 가수 나훈아다. 그가 직접 가사를 쓴 노래 '홍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가사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중략)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시골집에서 '호랑이가 왔다'는 말에도 울던 아기가 '곶감 줄게'라는 말에 울음을 뚝 그친다. 밖에서 엿듣던 호랑이는 정체 모를 '곶감'이란 놈에게 두려움을 갖게 된다. 때마침 들어온 소도둑이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호랑이는 이를 곶감으로 착각하고 줄행랑을 친다.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의 내용이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전래동화 '호랑이와 곶감'으로 개작돼 교과서에 실렸다. 원작자가 없는 전래동화인지라 내용 전개상 여러 버전이 있으나, '호랑이', '아기', '곶감'과 같은 주요 소재는 동일하다.

실제 과거 시골집의 서늘한 다락이나 부엌 찬장에는 긴 막대기에 꽂힌 곶감이 들어있곤 했다. 어른들은 어린 아이를 달래기 위해, 혹은 간식용으로 이 곶감을 하나씩 빼 주었다.

한류열풍을 낳은 드라마 '대장금' 속 명대사에도 '홍시'가 나온다. 어린 장금이가 수라간의 최고 상궁인 정 상궁 앞에서 하는 말이 그것이다. 고기를 맛본 뒤 '홍시 맛이 난다'는 장금이에게 정 상궁은 그 이유를 묻고, 장금은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이라는 현답(賢答)을 내놓는다. 정 상궁이 어린 장금이의 타고난 미각을 깨닫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수라간에서 실제 행한 것처럼 묘사됐듯, 홍시를 한식 요리에 활용할 수 있다. 특히 고기 요리에 설탕 대신 쓰면 좋다. 홍시를 갈아 만든 양념장으로 불고기를 만들면, 장금이처럼 '고기를 씹었더니 홍시 맛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겠다. 배추 겉절이를 할 때 넣기도 한다. 설탕이 낼 수 없는 깊은 단맛이 매운 맛과 잘 어우러져 달큼한 겉절이가 된다.

홍시와 곶감은 한 배에서 나온 형제 같은 관계이기 때문에 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단감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 녀석은 태생이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감을 오랫동안 따지 않고 놔두면 익으면서 단감이 될 거라는 건데, 이는 틀렸다. 단감은 일본에서 유입된 품종이며, 우리나라 토종 감은 모두 떫은 감이다. 그리고 이 떫은 감으로부터 탄생한 것이 홍시와 곶감이다. 이 기사에서는 단감은 제외하고 홍시와 곶감을 주로 다룰 예정이다.

홍시나 곶감을 언제부터 만들어 먹었느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바, 감나무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로 한다. 감은 한국·중국·일본을 원산지로 하는 동아시아 특유의 과수다. 이 세 국가에서 생산되는 감이 전세계 생산량의 90%가량 되며, 또 이 중 70%는 중국산이 차지한다. 6세기(501~600년) 전반 쓰인 중국의 최고(最古) 농업기술서 '제민요술(齊民要術)'에 감에 대한 얘기가 있다. 한국의 문헌 중에는 고려시대에 쓰인 의약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1236)'에 감을 재배한다는 내용이 있으니, 이 땅에서 식용 과일로서 감나무를 취급한 게 적어도 800년 가까이 됐다는 뜻이 된다.

얘야, 감이 떫구나
(왼쪽) 조선시대 그려진 '책거리 10곡병 감나무 그림'. 우리 조상들은 감이 7가지 덕(德)을 갖추고 있다고 믿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오른쪽) 10월~11월은 감 수확 적기다. 떫은 감은 그대로 딴 뒤 후숙하거나 말려서 홍시 또는 곶감으로 먹는데, 사진처럼 가지에 매달린 채 홍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앞서 밝혔듯, 한국에서 재배되는 토종 감은 모두 떫다. 이 떫은 감을 '땡감'이라고 한다. '떫다'는 건 텁텁하면서 쓰고 그 기운이 입에서 잘 사라지지 않는 것인데, 먹어본 사람이라면 쉽게 알 테지만 글만으론 설명이 어렵다. 이 '떫은맛'은 우리 혀에 있는 부드럽고 끈끈한 막이 오그라들면서 느껴진다. 감 뿐 아니라 덜 익은 과일, 차, 오래된 건어물 등에서도 떫은맛이 난다.

사실 단감도 익기 전에는 떫다. 모든 품종의 감이 가진 '타닌(tannin)' 성분 때문이다. 이 타닌이 우리 입 안에 들어와 침에 녹으면서 떫은맛을 내는데, 감이 익을수록 타닌은 물에 녹지 않은 불용(不鎔)성을 띄게 된다. 침에 녹지 않으면 우리는 그 맛을 느낄 수 없다. 즉, 떫은맛을 내는 성분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못 느끼는 것이다. 단감의 경우 타닌이 불용성으로 바뀌는 현상이 빨리 일어난다. 반면 떫은 감 품종은 함유된 타닌의 양도 많을 뿐더러 불용화 과정이 길다. 이 타닌을 의도적으로 불용성으로 만들어 떫은맛이 나지 않도록 하여 먹는 것이 바로 홍시와 곶감이다. 아마도 땡감을 그냥 먹기 힘들었던 조상들의 지혜가 만든 결과물일 것이다. 가을철 수확하는 감을 겨우내 두고 먹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감의 매력은 이처럼 다양한 변신에 있다. 말하자면 감은 생과일 → 후숙 → 건조의 모든 단계에서 먹을 수 있다. 간혹 말리거나 후숙하여 먹는 과일이 있긴 하지만, 이 세 단계를 모두 거치며 우리에게 '아낌없이' 영양분과 맛을 주는 과일은 흔치 않다. 후숙과 건조의 정도에 따라 불리는 이름도 다양하다.

(왼쪽부터) 단감, 홍시(연시), 반건시, 건시(곶감).
●땡감타닌

성분이 많이 들어있는 떫은 감.

●홍시(紅枾):

말랑말랑하게 무르익은 상태의 감. 색깔이 붉다는 뜻에서 '홍시'라 한다.

●연시(軟枾):

홍시의 다른 말. 질감이 말랑말랑하다는 뜻에서 '연시'라 한다.

반건시(半乾柹):

반(半)만 말린 감. 건시가 수분이 전혀 없는 상태인데 반해, 반건시는 촉촉하다.

●건시(乾柹):

곶감. 껍질을 벗기고 꼬챙이에 꿰어 말린 감.

누구나 만들 수 있다

간혹 단감으로 홍시 만들기를 시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단감은 웬만하면 단감 그대로 먹길 권한다. 단감도 홍시가 될 수는 있지만 맛이 덜하다. 참고로 홍시는 떫은 감 품종인 대봉감이나 둥시감으로 만드는 게 가장 맛있다.

전통 방식은 항아리 속에서 감을 익히는 것인데, 종이상자를 이용해도 상관없다. 다만 가장 아랫줄에 놓는 감은 꼭지가 밑으로 가도록 하여 놓는다. 따뜻한 곳에 두면 더 빨리 익고 추운 곳에선 느리게 익는데, 홍시가 되기까지 통상 열흘 정도 걸린다. 그 후부터는 1~2일에 한 번씩 들여다보는 게 좋다. 홍시가 된 것들은 꺼내 냉장 보관하고, 덜 익은 것들은 위쪽으로 옮긴다.

알코올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앞서 말했듯, 홍시는 타닌을 불용성으로 바꾸는 과정이 핵심이다. 떫은 감의 표면에 알코올을 묻히거나 95%의 고농도 이산화탄소에 담가두면 타닌의 불용화 작용이 촉진된다.

곶감은 홍시보다는 만들기가 조금 까다롭다. 무엇보다 말리는 시기가 중요하다. 전통적으로는 한로와 입동 사이에 있는 상강(霜降·10월 말경) 무렵을 가장 좋게 본다. 하지만 집에서 말린다면 이보다 늦은 시기도 괜찮다. 밤 온도가 물의 어는점(0℃) 이하로 내려가기 시작하면 적합하다. 충분히 쌀쌀하지 않을 때 말리기 시작하면 감이 물러져 모양이 잘 안 잡힌다. 습기는 쥐약이다. 늘 바람이 잘 통하도록 창문가에 두며, 비가 오거나 습도가 높은 날은 선풍기를 틀어서라도 말리는 게 중요하다. 3주~한 달 정도 지나면 반건시, 두 달 이상 되면 건시(곶감)가 된다.

누가 먹으면 좋을까
(왼쪽) 오가네 농원 제공. (오른쪽) 위키미디어 커먼스.

'동의보감'에서는 홍시가 숙취를 풀어주며 심장과 폐를 튼튼하게 하고, 소화 기능을 돕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홍시의 타닌 성분은 알코올의 흡수를 지연시키고 위장 속 열독을 제거해 술이 빨리 깨도록 한다. 비타민A와 비타민C가 면역력도 높여 주어 감기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변비가 있는 사람은 홍시를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한다. 타닌 성분이 위장의 수분을 빨아들여 대변이 더 딱딱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곶감은 수분이 빠져나가 당분이 극도로 높아진 음식이다. 곶감 표면에 있는 하얀 가루가 당분이 농축된 것으로, 곶감의 맛을 좌우한다. 혹 상하거나 곰팡이가 슨 것으로 생각하여 털어내기도 하는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 곶감은 설사나 기침, 가래에 좋다고 알려진다. 단점이 있다면 높은 열량. 100g을 기준으로 단감이 44kcal, 홍시가 66kcal인데 곶감은 약 240kcal에 달한다. 곶감 3개를 먹으면 밥 한 공기를 먹은 것과 같으므로, 다이어트 중이라면 적게 먹는 게 좋겠다.

[감, 즐기는 법에 따라 효능도 달라져 ]

전설의 감나무

경상북도 상주시 외남면 소은1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가 살고 있다. 수령(樹齡) 750년, 이름은 '하늘 아래 첫 감나무'다. 세월의 무게를 보여주듯 줄기 가운데가 괴사해 둘로 갈라진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 나무는 매년 5천여 개의 탐스러운 열매를 맺으며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나무 앞에는 '지금 곶감의 진상을 상주에 나누어 정하였다(1468년 11월 13일)'라는 '예종실록' 속의 한 문구가 적힌 비석이 서 있다. 상주시는 지난 2005년 이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했다. 소유자는 따로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천연기념물' 감나무도 있다. 수령 450년으로 추정되는 이 감나무는 키가 20m를 훌쩍 넘으며 가슴높이 둘레도 4m나 된다. 학술·문화·경관의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이 됐다. 다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현재는 사방에서 지주목들이 받치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왼쪽) 상주의 '하늘 아래 첫 감나무' /상주시 홈페이지, (오른쪽) 의령에 있는 천연기념물 감나무.

이러한 '전설의 감나무'는 아니더라도, 각자의 마음속에 '추억의 감나무' 하나쯤은 있을 터다. 한국의 시골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친근한 나무가 감나무이기 때문이다. 감나무는 오래 살고 벌레가 잘 먹지 않아 조상들에게 사랑받았다. 참고로 감나무와 비슷한 종류 중에 '고욤나무'라는 것도 있다. 감과 비슷한 열매가 열리는데 크기가 작고 씨가 많아 식용으로는 부적합하다. 이 고욤나무 가지에 감나무 가지를 접붙여 한 두해가 지나면 감 열매를 맺는다. 이 때문에 고욤나무는 감나무를 만드는 '어미 나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감 따는 전통마을

감나무는 연평균 기온 11~15℃인 곳에서 잘 자란다. 우리나라의 중부 이남지방에선 대부분 재배가 가능하다. 단, 단감 품종은 추위에 약해 남쪽 지방에서 주로 재배한다. 우리나라 감 주산지는 충청 남·북도, 경상 남·북도에 골고루 퍼져 있다.

예로부터 감은 철없는 아이들이 감나무에 올라 따먹는 간식이자, 아들이 어머니를 떠올리는 추억의 음식, 그리고 딸을 시집보낼 때 폐백상에 올리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어디에 있어도 잘 어울리는 감이란 과일을 우리 조상들은 아끼고 사랑했다. 감의 무한한 변신은 현재에 와서 더 놀랍다. 한정식당에서는 '아이스 홍시나 '홍시 샤베트'를 후식으로 내놓고 길거리 카페에선 '홍시 스무디'를 판매한다. 곶감 또한 고급 선물용이나 간단한 간식까지 다양하다.

올가을 감은 이미 익을대로 익어 홍시나 곶감으로 태어났을 시기. 감의 매력을 하나씩 발견하며 즐겨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