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석배 논설위원

서울대 교수들과 저녁 자리가 있었다. 한 교수가 말했다. "이런 얘기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1학년 수업 중 한 학생이 '교수님, 보불전쟁이 뭐예요'라고 질문하더라고." 옆에 있던 교수가 말을 받았다. "그 정도면 다행이네. 내 수업에선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구분 못 하는 학생이 있어." 같이 있던 사람들이 "설마~" 하자 입시 업무를 담당했던 교수가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고교에서 세계사를 공부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 수능에서 문과 학생은 사회 두 과목을 선택해 시험을 본다. 9개 사회 과목 중 하나가 세계사인데 학생들은 대체로 이 과목을 싫어한다. 외울 것 많고 점수 받기 어려워서다. 아예 가르치지 않는 학교도 많다. 올 수능에서 세계사를 선택한 학생은 2만명에 못 미친다. 전체 수험생(54만명)의 3.7%다. 점수 잘 받는 게 중요한 학생들에게 세계사를 선택하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 됐다. 그러니 대학에서 사회과학과 인문학 공부하겠다는 학생이 로마사, 프랑스혁명, 명예혁명을 모른 채 입학한다. 중학교 역사 시간에 세계사를 잠시 접한다고 하지만 극히 제한된 내용이다.

몇 년 전엔 한국사 논란이 있었다. 고교생들이 우리 역사를 너무 모른다는 거였다. 이유를 보니 역시 입시 정책이 있었다. 당시 서울대가 한국사 선택을 요구하자 상위권 학생들이 대거 한국사를 택했다. 그러자 나머지 학생들은 이들을 피해 다른 사회 과목으로 몰렸다. 상대평가 시험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과 같은 과목을 선택하면 불리하다. 서울대 때문에 아이들이 한국사를 공부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왔다. 논란 끝에 작년부터 한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이 됐다.

12일 오전 2018년 대입 수능 성적표가 배부된 가운데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성적표를 살펴보고 있다.

영국 철학자 존 로크는 "역사만큼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학문이 없고, 역사만큼 재미있는 학문도 없다"고 했다. 역사 교육이 왜 중요한지 강조할 필요도 없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우리와 세계 역사를 두 눈으로 더 냉철하게 봐야 한다. 그런데 정책 따라 오락가락한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우리와 거꾸로다. 미국은 고교 세계사 시간에 '한강의 기적' 단원을 가르치기로 했다. 미국대학입시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6·25전쟁 이후 한국의 고속 성장과 초고속 발전을 이룬 정보·기술을 세계사 교과서에 수록하기로 한 것이다. 호주는 내년 새 교육과정에서 역사·영어·수학·과학을 4대 교과로 정하고 초·중등 역사 교육을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입시 철마다 화제가 되는 뉴스가 있다. 아랍어 시험을 보는 학생이 점점 늘어나는 기현상이다. 올해는 제2외국어 학생 중 74%가 아랍어다. 대단한 붐이다. 조금만 공부해도 점수 잘 받을 수 있어서란다. 그런데 전국에 아랍어를 가르치는 고교는 6곳뿐이다. 모두 독학으로 공부하는 거다. 올해 아랍어에서는 정답을 3번으로만 찍어도 4등급을 받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로또인가 입시인가.

정권마다 바꾸고, 손대고, 없애고, 덧붙이면서 우리 입시제도는 누더기 그 자체가 됐다. 1980년대 학력고사 땐 17개 과목까지 봤다. 너무 많았다. 학생들 부담 줄여준다며 조금씩 줄여 이제는 5개다. 그런데 아이들이 점점 편협하게 배운다. 한 건축학자는 "학창 시절 배운 지리와 세계사가 일하는 데 도움 됐다"고 하는데 지금 교육으론 불가능하다. 이제는 고교 때 역사 공부하지 않고 역사학과에 가고, 물리 선택 안 하고 물리학과에 진학한다.

모두가 입시생 부모가 돼서야 흥분한다. 수천 명이 모인 체육관 설명회장에 걸터앉아 '고차방정식 입시'를 접하고 한숨을 쉰다. 그러다가 자기 자식이 대학 가면 잊어버렸다. 나라의 미래를 실은 열차가 이렇게 고장 난 채 몇 십 년을 달리고 있다. 중간중간 승차한 승무원과 승객은 잠시 웅성거리다 내려버린다. 열차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데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