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옥 각색, 한태숙 연출로 최근에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소포클레스의 비극 ‘엘렉트라’. 여주인공 엘렉트라가 아버지(아가멤논)를 죽인 어머니(클뤼타임네스트라)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다. 배우 장영남·서이숙·예수정 등이 출연했다.

나이가 들었음을 느끼고 있다. 기피하던 것들을 즐기고 미워하던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변한 것이다. 아이들이 예전만큼 부담스럽지 않고, 여름이 좋아졌다. 생각해보면, 아이나 여름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그 엄청난 생명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급류의 유속보다 빨리 흐르는 피의 속도가 무서웠다. 이와 연장선상에서 내가 도저히 좋아할 수 없던 게 연극이었다. 연극이라는 장르. 뜨겁고, 끈끈한 장르. 어쩌다 연극을 보고 나면 말들에 얻어맞는 느낌이 들었다. 어떨 때는 몸이 아팠다. "나는 연극이 부끄럽고 무섭다. 그러므로 연극을 거의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여행을 싫어한다고 말했을 때만큼이나 연극을 보지 않는다는 말을 재미있어했다." 이런 이상한 전개로 시작되는 글을 쓴 적도 있었다. 용감하게도 국립극단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실었다.

그랬던 내가 '엘렉트라'를 보고 나서 엄청난 식후감에 시달리고 있다.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고연옥이 각색하고, 한태숙이 연출한 작품이다. 마지막 공연 날인 5월 5일에 봤다. 연극을 보면서 한 메모를 보고 또 보고, 언젠가는 읽겠거니 하고 사두었던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을 뒤적거렸고, 배우들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았다. 또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특히나 엘렉트라의 계부 아이기스토스 역을 한 박완규에게.) 연극이든 공연이든 보고 나서 그렇게 박수를 세게 쳐본 적은 그전에는 없는 것 같다. 그 와중 이 연극이 다른 어떤 연극과도 다른 점을 발견했다. 의례 마지막으로 주연배우가 인사하고 연출자가 등장해 관객들로부터 박수를 받게 되는데, 한태숙 연출은 무대로 나오지 않았다. 신선했다. 신상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지만, '무대의 주인공은 배우이고, 나는 배우가 아니다'라고 그녀는 생각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등장하지 않아 그녀가 더 궁금해졌고, 그녀의 인터뷰를 찾아 읽었다.

엘렉트라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머니를 죽일 수밖에 없는 여자 이야기다. 왜? 어머니가 자신의 아버지인 아가멤논을 죽였기 때문에. 그러니까 엘렉트라의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자기 남편을 죽인 여자다. 클뤼타임네스트라는 항변한다. 남편을 죽인 이유는 자기 딸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아가멤논은 엘렉트라의 언니이기도 한 이피게네이아를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아버지는 딸을 죽이고, 그래서 어머니는 딸을 죽인 아버지를 죽이고, 그래서 딸은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죽이려 한다. 비극이다. '엘렉트라'의 원작자 소포클레스는 이 비극이라는 장르를 확립한 사람이다. 배우도 겸했지만 목소리가 작아 배우는 그만두었다. 비극경연대회에서 18번이나 우승한 놀라운 전력의 소유자기도 하다. 그와 함께 3대 비극작가로 꼽히는 아이스퀼로스는 15번, 에우리피데스는 5번을 우승했다니 소포클레스의 화력을 가늠할 수 있다.

내가 이번에 본 '엘렉트라'가 이 위대한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각색한 거다. 고연옥이 각색한 '엘렉트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여자의 대결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여자(엘렉트라) VS 자식을 잃은 여자(클뤼타임네스트라).' 아버지를 잃은 여자인 엘렉트라가 어머니를 지하 감독에 가둔 채로 연극은 시작되고, 모두가 죽는 채로 끝났다. 소포클레스 원작은 많이 달랐다. 엘렉트라의 성격도, 구조도, 플롯도, 중심인물도. '각색이 이런 거구나!'라고 놀랐다. 원래 '엘렉트라'에서는 엘렉트라의 남동생인 오레스테스가 돌아오면서 이야기가 진전되고, 오레스테스가 어머니의 계부를 처단하고 왕위에 등극한다.

하지만 고연옥 작 '엘렉트라'에서 오레스테스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고 중반 이후 죽어버린다. 그리고 엘렉트라의 동생인 크뤼소테미스와 엘렉트라의 계부이자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정부인 아이기스토스를 입체감 있는 인물로 만들면서 극에 미묘함을 더했다. 클뤼타임네스트라의 공식적인 남자가 되기 전 아이기스토스와 엘렉트라와의 연사(戀事)를 슬쩍 흘리고, 아이기스토스가 크뤼소테미스를 희롱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러면서도 아이기스토스를 단지 모리배가 아닌 그럴 수밖에 없는 인물로 그리는 게 너무 좋았다. 원작에 아이기스토스의 존재는 희미하니 내가 본 아이기스토스는 고연옥 작가의 창조물일 터. 크뤼소테미스는 원작에도 꽤 비중 있게 등장한다. "그토록 긴긴 세월이 지났건만 언니는 왜 쓸데없이 무익한 원한을 품지 않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으세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보통 대사가 아니다. 원한은 쓸데없으며, 무익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쓸모없는 원한을 품지 않아야 하는데, 그건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배워야 한다는 거다.

이에 엘렉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나더러 행동하지 말라고 하는구나. 그렇게 하면 우리는 비참한 데다 비겁하기까지 한 거야. 내가 비탄을 그친다고 내게 무슨 덕이 되는지 네가 가르쳐다오. 아니면 내가 가르쳐줄까?" 이 역시 대단하다. 비참하지만 비겁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비탄뿐이며, 비탄을 그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아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비탄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며, 또 비탄을 그칠 이유가 내게는 없다. 그러면서 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영리한 것은 부럽지만, 네가 비겁한 것은 밉구나." 여기에 동생. "언니가 나를 칭찬하더라도 나는 차분할 거예요." 언니. "네가 내게서 칭찬받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다시 동생. "내가 옳은지 그른지는 두고 봐야지요."

나는 연극을 볼 때도 그랬지만,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읽을 때도 엘렉트라보다는 크뤼소테미스에게 거듭 놀랐다. 엘렉트라의 말대로 영리하기도 하거니와 어떻게 보면 비겁하지 않다. 크뤼소테미스가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다. 엘렉트라처럼 감정을 드러내면 위험해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그렇기에 '쓸데없이 무익한 원한을 품지 않는 법'을 배웠다. 엘렉트라에게 비겁하다고 비난받아도 동요하지 않고, 칭찬받더라도 무심할 것만 같다.

고연옥 작가는 이 크뤼소테미스에게 칼을 쥐여준다. 그 칼로 그녀는 자신을 희롱하던 아이기스토스의 지저분한 몸을 찌른다.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되돌려 주면서. '성공하는 사람은 적당한 순간이 올 때까지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라 그랬죠?'라면서 칼로 찌른다. 자신을 감추기도 어렵지만, '적당한 순간을 안다'라는 건 정말이지 고차원이다. 이번에도 연극의 말들에 제대로 얻어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