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향한 칼'이자 '권력의 시녀' 중수부
大檢, 직접 수사 줄이면서 반부패부와 강력부 통합
충격에 휩싸인 검사들 "이젠 뭘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난 2013년 4월 23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10층.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라고 적힌 현판이 벽에서 떼어졌다. ‘검찰총장의 직속부대’로 불린 대검 중앙수사부(중수부)가 공식 폐지된 순간이었다. 그날 서초동 주점가(街)는 통음(痛飮)하는 검사들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지금 그 현판은 검찰 역사박물관에 있다.
7개월쯤 뒤 검찰은 대검 반부패부를 출범시켰다. 특별수사를 지휘·감독·지원하는 역할만 하겠다고 했다. 중수부처럼 직접 수사 기능이 없었는데도 곳곳에서 “중수부가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이어 검찰은 2016년 1월 검찰총장 직속 수사팀인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을 만들었다. ‘미니 중수부’로 불렸지만, 사실상 대검 중수부의 역할과 기능이 부활한 것이었다.
이처럼 ‘중수부’는 숱한 논란을 부르며 영욕의 길을 지나왔다. 전직 대통령에서부터 대기업 총수, 정치인, 고위 공무원 등이 연루된 굵직한 대형사건을 전담해온데다 수사 때마다 하명(下命)수사, 표적수사, 별건(別件)수사 등 정치적 중립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때로는 ‘권력을 향한 칼’로, 때로는 ‘권력의 시녀’로 불려오며 검찰을 지탱한 뿌리이기도 했다.
검찰은 최근 반부패부를 강력부와 통합했다. 명칭도 ‘반부패·강력부’로 바꾸었다. 부패범죄와 강력범죄에 대한 수사 지휘를 단일화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검찰 내부는 물론 법조계에서는 “검찰의 상징이던 중수부가 진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明暗 뚜렷한 '검찰총장의 칼' 중앙수사부
대검 중앙수사부의 뿌리는 1949년 12월 20일 제정된 검찰청법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법안 29조에는 '대검찰청에 서기국과 중앙수사국을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 중앙수사국은 수사과, 사찰과, 특무과를 산하에 둔다고 돼 있다.
하지만 중앙수사국은 '서류상 기구'에 불과했다. 당초 1950년 4월 발족할 예정이었지만 6.25전쟁이 나면서 미뤄졌다. 중앙수사국이 실제 발족한 것은 1961년 4월 9일이었다. 이것이 중수부의 전신이다. 이후 1973년 1월 특별수사부로, 1981년 4월 ‘중앙수사부’로 이름을 바꿨다. 2013년 현판을 내리기까지 짧게는 32년, 길게는 64년 역사다.
중수부는 '거악(巨惡) 척결'의 상징이었다. 1980년대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을 비롯해 1990년대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수사했다. 2002년 '최규선 게이트' 수사를 맡아 고(故)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홍업·홍걸)을 구속하기도 했다.
안대희 전 대법관을 ‘국민 검사’로 만든 것도 2003년 중수부장 때다. 여야 대선자금을 수사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두 번이나 쳤다. 당시 노 대통령으로부터 “문지방을 두 번이나 넘어왔다”는 질책도 들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중수부를 성원했다.
1981년 출범 이래 중수부장은 ‘최고의 칼잡이’가 맡았다. 역대 중수부장 31명 중 이종남·김두희·박종철·김태정·박순용·이명재·김종빈 등 7명이 훗날 검찰총장이 됐다. 이중 이종남·김두희·김태정 전 중수부장은 법무부장관도 지냈다.
중수부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2009년부터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 불씨였다. 그해 5월 노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자 정치권에서는 “권력의 시녀”라고 퍼부으며 중수부 폐지를 요구했다.
2012년 한상대 검찰총장은 결국 ‘중수부 폐지’ 카드를 빼들었지만 검사들의 항명으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검란(檢亂) 사태’까지 맞았다. 이때부터는 여야 할 것 없이 한목소리로 중수부 폐지를 주장했다. 버틸 힘이 없었던 검찰은 이듬해 4월 결국 중수부 간판을 내렸다.
◇'미니 중수부' 시도했다가 개점 폐업
중수부의 후신은 '반부패부'다. 2013년 12월 대검 반부패부는 전국 특별수사를 총괄 지휘·조율하고, 중점 수사분야를 발굴하는 역할을 맡겠다며 출범했다. 초대 부장은 오세인 당시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이 맡았다. "중수부 이름만 바꿔 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지만 검찰은 "대검에서 직접 수사는 하지 않는다"면서 논란을 일축했다.
그러나 2015년 10월 검찰총장에 오른 김수남 전 총장은 취임하자마자 총장 직속의 수사팀을 만들 준비를 했다. 이듬해 1월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이하 특수단)’을 출범시켰다. 2개 수사팀을 두고, 초대 단장은 김기동 당시 대전고검 차장이 맡았다. 중수부 부활 논란을 의식해 수사인력 규모를 줄이고, 사무실 위치도 대검이 아닌 서울고검에 두었지만 특수단은 ‘미니 중수부’라고 불렸다.
하지만 특수단은 제대로 칼도 한 번 뽑지 못하고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1호 사건이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 등 경영 비리사건인데, 처음이자 마지막이 돼 버렸다. 2016년 말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지면서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한동훈 당시 특수단 수사 2팀장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특별검사팀에 차출되면서 사실상 특수단은 멈춰섰다. 문무일 총장은 작년 8월 취임 후 “특수단을 유지는 하겠다”고 했지만, 특수단장은 검사장급에서 차장급으로 격하됐고, 수사팀 인원도 확 줄었다. 올 초 단장을 맡고 있던 이두봉 차장검사가 서울중앙지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단장은 공석이 됐다.
한편, 대검 내 지휘부인 반부패부는 ‘수사 외압’ 논란으로 최근 홍역을 치렀다. 문 총장이 수사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강원랜드 채용비리 사건’ 수사를 별도 수사팀을 꾸려 맡겼지만 수사 과정에서 반부패부가 외압을 행사했다는 폭로가 나온 것이다. 수사팀은 반부패부장 등 대검 간부들을 기소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결과는 ‘외압은 없었고, 부당한 지시나 지휘도 없었다’고 결론났지만 반부패부는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나쁜 놈 잡는 검사의 시대는 갔다"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반부패·강력부'는 기존의 반부패부와 강력부를 통합한 부서다. 수사지휘과와 수사지원과, 범죄수익환수과, 마약과, 조직범죄과 등을 산하에 두고 있다. 강력부 소속이었던 피해자 인권과는 새로 생긴 인권부로 넘어갔다.
검찰 내부에서는 “특별수사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대검 중수부가 정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말이 나왔다. 정부는 지난달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발표하며 “검찰이 직접수사를 할 수 있는 영역은 한정되고, 특히 조폭·마약 등 강력 사건은 경찰이 전담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검찰은 직접 수사보다 기소와 공소유지에 집중하라는 것이 현 정부 검찰 개혁의 핵심인 것이다.
밖에서 보면 검찰이 이런 변화를 점차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적잖은 충격에 어리둥절해 하는 검사들이 적지 않다. 재경지검 한 검사는 “이제 ‘수사’라는 단어가 검찰 직제에서 사라질 것”이라며 “기관의 정체성부터 다시 찾아야 할 것 같다”고 핬다. 서울중앙지검 한 검사는 “검사가 수사를 안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과거 군사정권 때처럼 경찰 대신 기소해주고, 재판만 다니라는 거냐”고 했다.
지방의 한 부장검사는 “시대에 따라 검찰의 역할과 기능이 조정될 수는 있겠지만 지금의 변화가 자발적인, 독립적인 검찰의 선택이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며 “검찰이든 경찰이든 결국 정치권력이 마음대로 쥐고 흔드는 것 아니냐”고 했다. 검찰청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검찰의 직접 수사를 줄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검찰이 반드시 필요한 분야도 있다"며 "이번 조직개편으로 '거악을 잡는 칼'이라는 검찰의 이미지는 점점 희석될 것 같다"고 했다.
검찰 출신 한 원로 변호사는 “특수통, 특수부, 중수부 등은 다 권력이 무서워하는 칼이지 않았느냐. 그저 권력의 눈치만 봤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이런 일을 앞으로 경찰이 해도 되겠지만 경찰이라고 권력에 휘둘리지 않을 방도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