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전체가 타들어갈 것 같은 폭염이 2018년 여름을 휩쓸고 지나갔어. 생후 9개월인 소담이는 엄마 아빠와 함께 먼 나라 네덜란드에서 그 여름을 잘 견디고, 이제 소담이 인생의 첫 가을을 맛보고 있단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 세 가족에게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지 기억하지 못할 너를 위해서 아빠가 몇 자 기록을 남겨. 소담이가 자라서 엄마의 나이가 되었을 때, 어른이 된 소담이가 삶에 지칠 때 지금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되돌아보면서 잠시라도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라.
◇아빠 육아휴직 보는 시선 곱진 않지만…
평일에 아빠가 소담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갈 때면 네덜란드 사람들이 소담이를 쳐다보면서 "모이(Mooi)!"라고 해. '모이'는 예쁘다는 뜻이라 아빠는 늘 기분이 좋아. 근데 네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얼른 모르시더라(사실 아빠가 봐도 아들같이 생기긴 한 것 같아).
네덜란드는 남녀 모두 육아휴직이 자유로운 곳이지만, 그래도 외국인 남자가 평일 오전에 아이와 산책하는 모습이 생소한지 지나는 할머니들이 아빠보고 뭐 하는 사람인지 물어보시기도 하고, 아이 봐주는 사람으로 오해하시기도 해. 그럼 아빠는 뭐 하는 사람이길래 네덜란드에서 평일 낮에 소담이랑 같이 있을 수 있냐고?
결혼 후 엄마가 네덜란드에 발령이 나서 엄마 아빠는 서로 떨어져 살게 됐어. 그런데 그렇게 산 지 2년 만에 고맙게도 소담이가 엄마 아빠에게 와 줬어. 2018년 대한민국은 아직 남자 직장인이 육아휴직 하겠다고 손을 들 때 꼭 좋게만 바라보지는 않아. 그래도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용기를 얻었어. 아빠는 엄마가 네덜란드 근무라는 드문 기회를 최대한 누릴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 환경이 좋은 곳에서 소담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 그래서 엄마 대신 아빠가 육아휴직을 하고 서울에서 네덜란드로 왔어. 낯선 곳에서 우리 가족이 오히려 더 똘똘 뭉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
◇낯선 땅에서 소담이를 키운다는 것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낮선 땅에서 초보 엄마 아빠가 소담이와 함께 사는 것이 꼭 수월하지는 않아. 한 달 전에는 소담이가 열이 많이 났는데, 엄마 아빠가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열이 40.1도까지 올라갔어. 다행히 다음 날 열이 내렸지만 엄마 아빠는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 주변에 조언을 구할 사람이 없어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에 의지하는 게 참 쉽지 않더라.
그렇지만, 반대로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엄마 아빠의 방식대로 소담이를 키우고 있어. 예를 들면 엄마 아빠는 짠순이·짠돌이거든? 그래서 소담이 유모차도 중고로 사고, 소담이 옷이랑 장난감도 대부분 다른 사람들한테 물려받았어. 이렇게 아낀 돈으로 매달 5만원씩 차곡차곡 모아서 소담이가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주기로 했어.
지난달에는 9일 동안 자동차로 3080㎞를 달려 오스트리아·체코·헝가리를 여행했는데, 그 이야기를 한국에 있는 사람들한테 말했더니 다들 미쳤다고 하더라? 돌도 안 된 아이를 데리고 그렇게 먼 거리를 운전하면 어떡하냐고.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엄청 재미있었어. 소담이가 울기도 했지만, 중간중간 쉬어가며 호수에서 수영도 하고, 아빠가 운전하는 동안 엄마가 소담이랑 2~3시간씩 눈을 마주치며 같이 놀기도 했어. 소담이도 즐거워 보였어. 우리 세 가족의 첫 여행은 정말 성공적이었단다.
◇"아빠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인 줄 아니?"
소담이가 세상에 나오기 전 아빠는 아빠 인생의 전성기가 20대였다고 생각했어.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재밌었던 시기였거든. 그런데 소담이가 태어난 뒤로는 '지금 이 순간'이 아빠 인생의 황금기야(옆에서 엄마가 자기도 그렇다고 전해달래). 처음으로 소담이를 본 순간부터 소담이가 엄마 아빠에게 보여줬던 첫 하품, 첫 뒤집기 그리고 처음으로 이유식을 오물오물 먹던 모습까지 얼마나 기쁘고, 웃기고, 또 행복했는지 몰라. 지난 9개월은 이제까지 느껴봤던 어떤 종류의 행복과도 견줄 수 없는 그야말로 아빠 인생의 황금기였어. 그리고 앞으로 소담이가 보여줄 첫 걸음마, 첫 입학, 첫 남자친구, 그리고 결혼까지…. 앞으로 아빠의 황금기는 꽤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아.
엄마 아빠에게 인생의 황금기를 가져다 줘서 고마워. 행복을 줘서 고마워. 엄마 아빠가 소담이의 인생 전체를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지만, 소담이가 엄마 아빠를 보면서 행복을 배울 수 있도록 엄마랑 아빠도 열심히 노력할게.
소담이가 어른이 된 세상은 많은 사람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아이와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어. 엄마 아빠도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해 볼 테니 소담이도 따뜻하고 행복한 어른으로 자라주렴. 엄마 아빠한테 와줘서 너무 고맙고, 소담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