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8월 2일 새벽, 남태평양 바다 위를 항해하던 온두라스 국적 254톤(t)급 참치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 15호에서 선상(船上)반란이 벌어졌다. 승선인원은 모두 24명. 선장을 포함한 한국인은 8명, 그 외에 인도네시아 국적 선원 9명, 조선족은 7명이었다. 조선인 선원들이 뭉쳐 반란을 일으켰다. 수로는 열세였지만 ‘각개격파’로 한국인 선원부터 처리하기로 계획했다.
우선, 선장 김택근(가명·당시 33세)씨도 "타 선박에서 호출이 왔다"고 꾀어낸 뒤 참치잡이 작살로 살해했다. 나머지 선원들은 깊은 새벽 "선장님이 부르신다"는 말로 깨운 뒤 하나씩 조타실로 데려갔다. 조타실에는 도끼, 몽둥이, 칼 등으로 무장한 조선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인 선원 6명은 흉기에 의해 살해되거나, 산 채로 바다에 내던져졌다.
비명을 듣고 잠에서 깬 인도네시아 선원은 3명이었다. 조선족 선원들은 이들을 공범(共犯)으로 만들었다. 해양고 실습생 최모(18)군을 살해하라고 강요한 것.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조선족이 시키는 대로 최군을 남태평양 아래로 던졌다. 페스카마호가 머물던 곳은 상어가 출몰하는 해역이었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조선족도 한 명 있었다. 그는 선내(船內) 냉동고에 갇혔다가, 이내 같은 조선족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고 숨졌다. 나머지 인도네시아 선원 3명도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해됐다. ‘페스카마호 선상 반란’으로 모두 11명(한국인 7명·인도네시아인 3명·조선족 1명)이 숨졌다. 망망대해(茫茫大海)에 내던져진 시신은 훗날 단 한 구도 수습되지 못했다.
반란세력(조선족 6명)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선원은 1등 항해사 이인석(32)씨와 반란에 동참한 인도네시아 선원들이었다. 항해 기술이 없던 조선족들이 이씨만은 살려둔 것이었다. 이씨는 도망갈 곳 없는 어선 안에서 절치부심 재탈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사건 "36년 5개월 경찰생활 중 가장 잔학무도"
페스카마호는 1996년 6월 7일 부산 남항에서 출항했다. 최초 승선인원은 17명이었다. 조선족 선원들은 일주일 뒤인 6월 14일 사이판 인근 티니안섬에서 합류했다. 범행이 일어난 장소는 파푸아뉴기니 동쪽 4500km 부근 해상이다.
갈등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초보 선원들은 모든 부분에서 미숙했고, 초보 선장은 이런 상황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김 선장은 찍어 누르는 방법을 택했다.
"경찰 생활 36년 5개월 동안 본 가장 잔학무도한 범죄였습니다. 지금도 가끔 먼지 쌓인 사건일지를 들춰보면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은 은퇴한 배재규(63) 전 부산해양경찰서 장비관리 과장(총경)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그는 부산해경 형사계장이었다.
Q.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사건의 원인은 뭔가.
"그때는 뱃일이 지금보다 훨씬 험했다. 간부들은 어획량에 따라 성과급이 있었지만, 선원들은 정해진 봉급만 받았다. 이 때문에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간부들이 조선족 선원들을 다그친 측면이 있다. 일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족 선원들의 수면시간은 2~6시간에 불과했다. "
Q. 그저 '일이 힘들어서' 11명이나 살해했다는 말인가.
"뱃일이 버겁자, 조선족 선원들은 승선 46일 만에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김 선장은 '하선으로 발생하는 비용은 하선자들이 부담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내밀었다. 조선족 선원 입장에서는 평생을 일해도 못 갚을 액수였다. 조선족 선원들이 뒤늦게 '다시 일하겠다'고 매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태평양 위에서 궁지에 몰린 조선족들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반란은 성공하는 듯했다. 선장을 포함한 11명을 살해했고, 나머지 인도네시아 선원 6명은 반란세력 쪽에 붙었다. 항해를 위해 살려둔 1등 항해사 이씨는 묵묵히 항해할 뿐이었다. 페스카마호는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다. 배를 장악한 조선족 선원들은 이곳에 밀항할 계획이었다.
Q. 배가 재탈환되는 반전이 있었다.
"1등 항해사 이씨는 은밀히 페스카마호 재탈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조선족들 감시가 허술할 때마다 생존한 인도네시아 선원들에게 '스탠바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재탈환을 준비하라는 신호였다. 페스카마호가 조선족 선원 손에 넘어간 지 22일째 되는 날, 이씨가 배를 급선회했다. 조선족 선원들은 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모두 어창(漁倉·어획물을 저장하는 창고)에 우르르 들어갔다. 이 순간 이씨 등은 바깥에서 어창 문을 닫아걸었다. 재탈환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출항 79일째인 8월 24일,일본 해상보안청이 도리시마 남쪽 해상에서 페스카마호를 발견해 우리 해경에 알렸다. 이후 ‘페스카마호 선상 반란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Q. 당시 여론 분위기는 어땠나.
"11명이나 살해된 잔인한 범죄였다. 남태평양 한복판에서 벌어진 '선상 반란', 그것도 조선족들이 합심해서 한국 선원들을 살해했다는 점이 사회에 충격을 줬다. 수사 지휘하던 내 책상에 직통전화가 설치됐다. 청와대 안보수석에 직보(直報)하는 용도였다. 매일 아침마다 수화기 들어 청와대에 보고했다. '범행무대'인 페스카마호가 부산에 입항했을 때 취재진이 까맣게 몰려들었다."
Q. 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렸나.
"부산지법은 1심에서 범인 전원(6명)에 사형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2심에서 주범(主犯) 전재천(44)을 제외한 나머지 5인방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2심에서 조선족 선원 편에 서서 변호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 5명의 감형을 이끌어낸 것이다.
당시 문 변호사는 '전재천은 주범이 아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던 2007년 12월 노무현 정권 말기에 '우연의 일치'인지 전씨마저 무기징역으로 특별사면됐다. 이것을 두고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다."
Q. '문재인 대통령' 말처럼 전씨는 주범이 아닌가?
"수사를 지휘한 내 생각은 다르다. 전씨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라 본다. 조선족 일당은 돋보기 들고 다니며 선상의 핏자국을 없애기도 했다. 치밀한 증거인멸이다. 반란을 일으킨 다른 조선족들은 중졸이 최고 학력인데 반해 전씨만 대학을 졸업했다. 전씨는 중국에서 학교 교사를 하던 인물이다. 나이 또한 다른 범인들보다 열 살 이상 많았다. 조사받으면서도 그는 진술을 여러 번 바꾸면서 교묘히 거짓말을 했다. 수사에 혼선이 올 정도였다. 살인 방법, 역할 부여, 시신 처리, 일본 밀항 계획까지 모조리 전씨가 주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주범이다."
Q. 결과적으로 조선족 반란세력은 전원이 감형됐다.
"감형됐단 얘길 듣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국인 선원들에게 '당한 것'이 있지만, 배 위에서 동료 11명을 살해한 것은 그야말로 광기(狂氣)였다. 물론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도 변호인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래도 유족들 마음은 어떻겠는가. 수사 지휘하면서 이렇게 짐승 같은 인간들은 하늘을 보며 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Q. 요즘도 선상폭력 사건이 터지고 있다.
"사건 이후 선원 간부들인 해기사(海技士)들과 경찰을 상대로 해상폭력 근절에 관한 강의에 나서왔다. 100% 근절됐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페스카마호 사건 이후 해경이 접수하는 폭행 사건이 차차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배 전 과장 장남 배창인(38) 경장은 대(代)를 이어 해경에서 근무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