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희 서울대 교수가 14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위안부, 욱일기, 강제징용자 배상 판결, 그리고 레이더 갈등까지.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우리 법원은 지난 8일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한 압류 신청을 승인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을 위한 강제 집행을 허용한 것이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은 "가까운 시일에 (한·일청구권) 협정에 따른 협의를 한국 정부에 요청할 방침"이라면서 "극히 유감"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지금의 갈등은)한국 정부가 만들어낸 문제들이 아니다. 과거의 불행했던 오랜 역사 때문에 만들어지고 있는 문제"라면서 "일본 정부가 조금 더 겸허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일본 정치인, 지도자들이 자꾸 정치 쟁점화해서 문제를 더 논란거리로 만들고 확산시키려고 만들어나가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라면서 "피해자들의 실질적인 고통을 치유해주는 문제에 대해서 한·일 양국이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하고 진지하게 지혜를 모아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본 정부는 문 대통령의 발언에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스가 장관은 "한국의 책임을 일본에 전가하려는 것"이라며 "매우 유감"이라고 했다. 외교가에선 한․일 냉각기가 장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과 일본의 현 관계에 대해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14일 "서로에 대한 존중이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어졌다"며 "전략적 제휴 관계에서 상호 전략적 방치 상태로 후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 전문가인 박 교수는 이날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일본에서도 한국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만, 한국에서도 일본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박 교수는 "일본은 우리의 외교·안보 영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나라다. 대한민국 안보의 버팀목 역할"이라면서 "동맹회의론자인 트럼프 대통령을 대함에 있어서도 한·일이 서로 당기면서 ‘동맹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데, 그런 걸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지나치게 남북관계 진전에 함몰되어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의 적정한 역할과 관여를 이끌어내는 지혜를 망각하고 있다"면서 "일본이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대해 가진 레버리지를 지나치게 경시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어 "한·일관계가 벌어지면 북한과 중국이 가장 많은 이익을 공유한다"면서 "한국과 일본을 갈라놓으려는 북한과 주변국의 전략에 휘말리는 자충수를 두어서는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한․일 간 레이더 갈등에 대해선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기본적으로 신뢰부족과 소통의 부재에서 기인한다"며 "서로가 군사적 우호국이라기보다는 적대국에 가까운 대응"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한·일 관계가 좋을 때라면 (레이더 갈등은)군당국간의 소통만으로 충분히 마무리 지어졌을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선 "정부간 협상으로 강제징용자 문제는 해결됐다고 보는 게 정확한 입장"이라면서, 문재인 정부가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는 데 대해선 "눈치를 보고 있다"고 촌평했다. 그는 "일본과 타협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행정부가 하루 빨리 제시해야 한다"면서 "청구권 조약을 인정하는 바탕위에서 사법판결의 대상이 된 일본기업과 한·일 청구권 자금의 수혜를 받은 한국 기업들이 공동 출자하는 재단을 설립하여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방안 등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일 위안부 협정과 관련한 현 정부의 대응에 대해서는 "합의가 마음에 안든다면 파기를 하고 재협상을 하면 되지 않나. 그런데 파기는 못하고 재협상도 못한다"면서 "이전의 합의보다 더 잘 만들 자신이 없어서 재협상을 하자고 말을 안하는 것이다. 부시는 것은 잘하는데 대안이 없다"고 꼬집었다.

박 교수는 "과거사 척결은 감정을 만족시킬 수는 있지만 현실적 이익을 축소시킬 수 있다"면서 "과거사 해결만이 한·일관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대국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과의 협력은 한국의 안보를 담보하고 미국, 중국 등 강대국에 대한 외교적 레버리지를 높여주며 국제국가의 활로를 넓혀줄 수 있다"고 부연했다.

다음은 박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

지난달 20일 동해 중간수역에서 광개토대왕함에 접근한 일본 초계기

-새해 들어 한·일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위안부 협정 파기,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이어 '레이더 조사·위협비행' 갈등으로 극에 이른 상황이다. 현재 한·일 관계 국면을 어떻게 평가하나?

"한·일은 전략적 제휴 관계에서 상호 전략적 방치 상태로 후퇴하고 있다. 서로에 대한 배려는 사라지고 자국중심주의적인 정치적 움직임들이 선행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전략적 판단보다는 반일무드에 편승한 동조적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역사문제로 불거진 한국에 대한 피로감이 정치적 반발로 표출되고 있다."

-상호 전략적 방치 상태라 한다면, 현 상황이 벌어진 것은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다는 의미인가?

"우선 서로에 대한 존중이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어졌다. 서로를 ‘그냥 내버려 둬도 된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에선 ‘일본이 딱히 필요하나’라고 생각하고, 일본에선 ‘한국은 우리를 못살게 굴 뿐, 도움이 안된다. 미국과 동맹 관계가 있으니 버릴 순 없으니 그냥 두는 게 낫겠다’고 보고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이 나온 뒤, 일본 산케이신문은 외무성 고위 간부의 말을 인용해서 ‘한국은 그냥 무시하면 된다’며 ‘전략적 방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대일 관계에 있어서 우리 정부의 기조는 과거사와 현재와 미래를 위한 협력을 구분한다는 ‘투트랙’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이게 지금 꼬인 상태다.

"‘투트랙’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무시 또는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위안부 합의 검증에서부터 치유재단 해산, 욱일기를 이유로 제주도에서 열린 관함식에 일본 해군함이 들어오지 않은 일까지 벌어졌다. 만약 상대방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까진 안한다."

-현 정부가 대일 관계를 ‘포퓰리즘’적으로 접근한다는 지적이 많다.

"일본에서도 한국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만, 한국에서도 일본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듯 하다. 어쨌거나 일본에 대해선 전국민전인 ‘반일 감정’을 갖고 있지 않나. 청와대나 정치권에선 일본과의 관계가 나빠져도 정치적으로 특별히 잃을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감정적으로 접근해도 손해볼 게 없다는 거다."

-그래서인지 현재 문재인정부가 추진하는 ‘한반도 평화 외교 프레임’에 일본이 보이지 않는다.

"미북 간 협상이 잘 진행되는 가운데 남북관계도 진전하고, 이 과정에서 중국이 지원하고 일본이 적극 관여하는 ‘선순환 관계’가 최상의 경로다. 하지만 이렇겐 안될 것 같다. 지금 상황은 남북미 관계는 어느정도 진전하는 데 중국은 떨떠름하고 일본은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이게 미북 간 협상이 진전이 없으면서 남북관계도 발전이 안되고 중국은 한·미·일 간의 고리를 약화시키려고 한국을 압박하는데, 한·일 관계도 악화되면 모두가 뒤죽박죽이 되버린다. 가장 최악은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고, 일본도 여기에 동조해 아시아 전략을 미·일 동맹을 중심으로 하자고 상황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올까 우려된다."

-작년 하반기부터 ‘한미동맹’ 약화에 대한 우려가 많이 나오고 있다. 동맹회의론자인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문정인 교수를 비롯한 현 정부의 관계자들은 작년에 주한미군 주둔과 관련해 한국의 주체성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미동맹에 대한 선택권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다. 문제는 ‘한미동맹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외교’에 대해 현 정부는 전혀 준비가 안돼있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모든 외교 전략을 고려할 때, ‘한미 동맹’을 상수로 삼고 있었다. 이 상수가 올해엔 변수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평화체제라는 이름 아래에 우리의 대북억지력을 상당히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 상태에 주한미군마저 흔들린다면 북한만 좋아진다. 어떤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주국방’이라는 단어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한미동맹이라도 강화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주한미군이 줄었을 때를 대비해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이라도 키워야하는데 그런 움직임이 하나도 없다."

일본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 기지의 모습.

-트럼프 대통령이 2차 미북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를 북한 비핵화 대가로 내놓을 수 있다는 관측이 많다.

"올해 대한민국의 가장 큰 전략적 과제가 ‘주한미군 감축 혹은 철수론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라고 본다. 이게 비핵화보다 더 큰 과제일 수 있다. 가장 큰 리스크는 트럼프 대통령이다. 트럼프는 전략적 판단이 아니라 상업적 안보관으로 주한미군 문제를 다룰 수 있다. ‘한국이 우리를 위해 해준게 뭐가 있냐’며 ‘방위비 협상도 결렬된 마당에 군대를 빼자’고 하는 트럼프 발 ‘주한미군 감축 내지 철군론’이 나오는 게 가장 큰 리스크다. 트럼프 대통령의 주한미군 감축 요구를 문 대통령이 ‘수용할 수 있다’는 듯한 태도로 나오는 게 세컨드 리스크다."

-북한 비핵화 문제와 주한미군 주둔 문제가 함께 다뤄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비핵화를 하면 주한미군을 약화시켜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주한미군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통상병력에 대응하기 위해 주둔한 것이다. 북한이 핵개발을 해서 주둔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비핵화 협상과정에서 주한미군과의 동맹을 버리는 것처럼 멍청한 일이 없다. 한국 안보이익에 완전히 역행하는 일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미사일을 완전히 버려도 주한미군은 그대로 있어야 한다."

-주한미군과 관련한 일본 정부의 입장은 무엇인가?

"일본은 지금까지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에 대해 곤란하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한·미·일 안보체제를 굳건히 해야 중국을 비롯한 대륙 세력과 대항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이 정말 우리편이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동맹회의론자인 트럼프 대통령을 대함에 있어서 한·일이 서로 당기면서 ‘동맹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데, 그런 걸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대화 구도에서 일본은 한발 물러나 있다. 일본은 비핵화 진전 국면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인가?

"지금은 일본이 수면 아래에 있는데, 좋은 시나리오로 가든 나쁜 시나리오로 가든 장대 높이뛰기를 하는 것처럼 일본 역할이 가시화되는 시점이 올 것이다. 만약 미북 간 협상이 잘 풀린다면 ‘북일관계 정상화’ 문제가 급부상 할 것이다. 북일 관계가 좋아지면 북한에 가장 많이 투자할 나라는 한국 다음 일본이다. 협상이 ‘핵보유국 북한’의 방향으로 가도 일본의 역할은 부각될 수 밖에 없다. 대북 억지력에 있어서 주한미군은 상징적이다. 실질적인 전투능력은 주일미군에 있다."

-북한 비핵화가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로 진행될 때 일본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맡게 되나?

"일본은 신고와 검증을 중시한다. 일본은 만약 검증을 한다면 필요한 비용까지 부담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신고와 검증을 배제한 비핵화는 불가능하다. 북핵 당사국으로서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한·일관계 악화로 비핵화 과정에서의 역할 분담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일본은 우리의 외교·안보 영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나라다. 대한민국 안보의 버팀목 역할을 한다. 한국의 안보를 고려할 때 일본을 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우리가 자주국방이 가능할 때까지는 미국과 일본을 잡고 있는 게 훨씬 유리하다. 비용도 덜 든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작년 8월 싱가포르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한·일관계 악화가 한반도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보나?

"일본은 한국의 안보에 대한 안전판이고 외교의 지렛대이자 국제무대에 함께 진출할 수 있는 파트너다. 현재의 정부 대응은 일본을 지나치게 경시하고 한반도문제나 동아시아 외교 대응에 있어 일본의 도움은 없다고 보는데서 출발한다고 본다. 지나치게 남북관계 진전에 함몰되어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의 적정한 역할과 관여를 이끌어내는 지혜를 망각하고 있다. 한·일관계가 나빠지면 일본은 한국의 안보위기에 개입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경제적 부담을 주는 조치들을 동원할 수 있다. 미국에도 한국 편에 서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한국의 일탈적 행위만을 지적하여 외교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 일본이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대해 가진 레버리지를 지나치게 경시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한·일 관계가 멀어진 것은 북한의 '갓끈전략' 때문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일관계가 벌어지면 북한과 중국이 가장 많은 이익을 공유한다. 북한은 한·일 간 안보협력의 갓끈을 풀어 자국의 안전을 담보하려고 하고, 중국은 한·미·일 안보협력을 약화시켜 동북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한·일이 서로 감정싸움에 매달려 치고받으면 북한과 중국은 손 안대고 코푸는 격이 된다. 한국과 일본을 갈라놓으려는 북한과 주변국의 전략에 휘말리는 자충수를 두어서는 곤란하다."

-북한의 교묘한 전략에 끌려가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여기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협상을 통해 북한을 바꾸자는 것은 좋은 방향이다.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부분과 될 수 없는 부분을 확실히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두 번째로는 원칙을 확실히 지켜야 한다. 북한을 도와주는 걸 반대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균형을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는 것에 걸맞은 것을 북한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은 ‘비대칭적 상호주의’를 이야기했는데, 이를 더이상 용인해선 안된다. 특히 군사적인 부분은 균형있게 해야 한다. 서로 약속을 지켜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약속한 건 지킬테니, 너희도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라고 요구해야 한다. 먼저 주고서 북한의 반응을 살펴보겠다는 ‘햇볕정책’ 방식은 안된다. 따뜻하게 만들고 우리가 옷 벗고 있으면 저쪽도 옷 벗고 나올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일단 문재인정부는 남북관계를 비핵화의 촉진제로 삼겠다는 구상인데.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비핵화 촉진제가 된다? 신뢰조성은 될지 모르지만 비핵화까지 어떻게 견인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보장이 없다. 남북관계가 비핵화에 미치는 영향을 너무 높게 보는 게 아닌가 싶다. 문재인정부가 한반도 운전자론을 이야기했는데, 지금 풀어가는 양상을 보면 초보운전자가 북한이라는 앞차만 보고 쫓아가기 급급한 모습이다. 지금 옆차선에선 중국이나 일본이 끼어들려고 계속 엿보고 있는데 앞만 보고 가다보면 결국 사고가 날 수 밖에 없다. 능숙한 운전자는 뒤에서 쫓아가면서 주변 차량 흐름을 보며 빨리갈 땐 빨리 가고, 방어 운전도 적절히 한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 외교’ 전략은 어떻게 보나?

"외교 전략에 있어서 ‘평화’를 반대하는 사람이 어디있겠나. 외교의 목적은 당연히 평화다. 비핵화 하자는 것 당연히 오케이다. 문제는 그 길을 가는 방향에서 로드맵, 또 그 길로 가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핵심 가치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과 제대로 해보자며 협상으로 돌파구를 마련한 점은 평가한다. 그런데 지금 계속 초심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 시작은 비핵화였다. 그런데 지금은 ‘평화 게임’으로 흘러가고 있다. ‘핵있는 평화’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건 ‘위장 평화’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가 14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일 관계와 관련한 현안을 살펴보자. 먼저 최근에 벌어진 ‘레이더·위협비행’ 갈등을 어떻게 봤나?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기본적으로 신뢰부족과 소통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한·일 군사당국이 긴밀한 소통을 통해 이견을 해결할 여지도 있고, 서로 양해할만한 사정도 있는데 공개적으로 갈등을 증폭시키면서 여론전을 벌이는 상황이다. 서로가 군사적 우호국이라기보다는 적대국에 가까운 대응이다."

-레이더 갈등은 두가지 경우로 가정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의 주장대로 우리 함정이 '사격통제 레이더(STIR)'를 일본 초계기에 조사했다면 일본 정부가 이렇게 반발하는 게 당연한 수순인가? 만약 한·일관계가 괜찮았다면 해프닝으로 끝났을까? 두 번째로는 우리 국방부의 주장대로 우리 함정이 조사하지 않았는데, 일본 초계기가 위협비행을 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위의 두 가지 문제는 군 당국과 전문가들에 의한 사실 규명과 진상 조사를 하고 필요하다면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으로 수습이 가능한 문제라고 본다. 우리 함정은 북한 선박 구조작전 중이었고 일본 자위대는 초계 감시 중이었다. 위기에 대한 충실한 대응이 서로에 대한 오해로 증폭되었다고 본다. 서로에 대한 적대적 의사표시는 아니었다고 본다. 한·일관계가 좋을 때라면 군당국간의 소통만으로 충분히 마무리 지어졌을 사안이다."

-결과적으로 동해상에서 한·일간의 군사적 긴장 상황이 벌어졌다. 역사·영유권 문제로 외교 갈등만 벌어졌던 양국이 군사적으로도 충돌할 수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향후 한·일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할 것 같다.

"한·일 간 군사적 협력이 당분간 후퇴할 공산이 크다. 현실적으로는 한·일 군사당국 간 정보공유와 긴급시 공동 대응에 대한 필요성을 증가시켜 줄 것이다. 서로를 적대적으로 인식하는 인식불일치(cognitive dissonance)는 하루 빨리 해소해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 한미일 3각 구도를 구상하는 미국의 입장에선 이 문제가 빨리 매듭지어지길 바랄텐데.

"역사문제로 한·일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라 미국의 개입이 어렵다. 어느 한쪽 편을 드는 것은 동맹국에 대한 불신을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상업주의적 안보관을 가진 트럼프 행정부는 돈도 안 되고 칭찬도 받기 어려운 동맹국간의 갈등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2018년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 씨(가운데)가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위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열리는 대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도 중요한 문제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는 청구권 협정’으로 끝난 문제라는 입장이다. 우리 정부는 공식 입장을 아직 밝히지 않은 상태다.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에 대한 배상 책임은 일본 기업에 있다고 보나, 아니면 한국 정부에 있다고 보나?

"1965년 청구권조약에 징용노동자에 대한 항목이 명시되어 있다. 정부간 협상의 대상으로 강제징용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일본정부의 입장에 일리가 있다. 한국 정부가 개인 피해자를 대신하여 청구권 자금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책임질 여지가 있고 과거 실제로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일부 배상하기도 했다. 다만, 1990년대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피해자 개인의 보상청구권을 인정하는 국제법적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 청구권은 살아있다고 하지만 배상을 강제 집행할 수 있는 실효적 방법은 한국 국내에 있는 일본기업 자산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일본이 주장하는 '강제징용자에 대한 배상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정리됐다'는 판단이 맞다는 건가?

"저는 그렇게 본다. 협정 전문에 써있다. 정부간 협상으로 강제징용자 문제는 해결됐다고 보는 게 정확한 입장이다. 그리고 이 입장에 대해선 현 정부를 제외하곤 모두 인정해 왔다. 심지어 노무현정부 때는 TF를 구성해 우리 정부 입장을 내놨다. 당시 TF는 위안부 문제, 원폭피해자, 사할린강제이주자 문제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바꿔 말하면 강제징용자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가 그동안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전력 투구해 온 것이다."

-정부는 현재 대법원의 개인청구권 배상 판결에 대해 ‘사법부를 존중한다’면서 공식적인 입장을 안내놓고 있다. 왜일까?

"정부가 눈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온 대법원 판결은 한국 정부가 그동안 취해온 정책에 반한다. 일본 정부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다보니 정부가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해결책을 못내놓고 있다. 이걸 관리하려면 한·일 관계를 더좋게 만들어서 이 문제를 동승시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 문제만 딱 드러나 있다. 정치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관련한 질문에 일본 정부에 ‘겸허한 태도’를 요구했다. 문 대통령의 답변을 어떻게 봤나?

"일본 정부가 겸허한 자세를 갖고 과거사 사과 반응을 요구하는 것은 괜찮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어떻게 할지에 대해선 전혀 안나왔다. 일본에게 사과하라는 요구만 있었지 지금 얽혀있는 한·일 관계를 어떻게 풀 지에 대한 방향성은 전혀 설명하지 못했다. 결국 비판으로만 끝난 셈이다. 반쪽짜리 답변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한국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일본과 타협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행정부가 하루 빨리 제시해야 한다. 총리를 중심으로 한 민관합동위원회가 적절한 대책을 조속히 제시하길 바란다. 청구권 조약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사법판결의 대상이 된 일본기업과 한·일 청구권 자금의 수혜를 받은 한국 기업들이 공동 출자하는 재단을 설립하여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방안 등을 고려할 수 있다. 단, 한국이 자꾸 일본 측에 대해 반복적으로 돈만 요구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곤란하다.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아베 총리가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의 자산 압류를 신청한 것과 관련해 매우 유감이라면서 내각에 구체적 조치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구체적 조치가 무엇을 말한다고 보나?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제3국을 포함한 중재 협의를 신청하거나 한국이 응한다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이 문제를 회부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본다. 나아가 일본이 일방적으로 취할 수 있는 보복조치들도 논의 중이다. 비자면제의 취소나 한국상품에 대한 관세보복조치 등도 가능하지만 일본 정부의 외교적 부담이 클 것이다."

-혹시 정부가 위안부 협정처럼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해서도 재검토를 말하며, 과거 협정을 부인하는 자세를 취하진 않을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일단 일본이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국제법에 따라서 가자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자고 할 것이다. 우리 정부가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한 상황에, 일본이 ‘제3국을 낀 중재위원회를 구성하자’고 해도 우리는 ‘안하겠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결국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라 가자고 할텐데 우리는 역시 ‘안한다’고 할 거다. 그러면 도대체 뭘 할 것인가. 협상도 안되고 중재도 안되고 판결도 안되고, 우리는 결국 요구만 하는 국가가 되버린다. 이렇게 됐을 때 우리가 얻을 실익은 무엇인가."

-현 정부가 한·일 위안부 협정과 관련해 취한 태도는 어떻게 보나?

"위안부 합의도 위안부 합의가 마음에 안든다면 파기를 해버리지, 그리고 재협상을 하면 되지 않나. 그런데 파기는 못하고 재협상도 못해. 자기들도 파기를 해서 우리의 외교적 부담이 크고, 파기를 하면 재협상을 해야하는데, 이전의 합의보다 더 잘 만들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파기를 하고 재협상을 하자고 말을 안하는거다. 부수기만 하고 대안이 없다. 그러니 ‘아마추어’라는 말이 나오는 거다. 비판만 하지 뭘 하나 만들어 낸 게 없다"

2018년 11월 17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파푸아뉴기니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APEC 지역 기업인 자문회의(ABAC)와의 대화'에 입장하고 있다. 왼쪽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는 진정한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일본에 재협상 요구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피해자 지원을 위한 화해·치유 재단에 출연한 10억엔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선 일본측과 논의한다고 한다. 이러한 정부 방침을 어떻게 평가하나?

"위안부합의는 사실상 형해화됐다. 위안부합의가 불가역적이라는 표현과 국제적으로 일본을 비난하지 않겠다는 부분은 한국민의 자존심을 건드린 측면이 있다. 하지만, 한국이 정상간 합의한 약속을 적폐대상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외교관례에 어긋난다."

-특히 이번 위안부 협정 후속 조치와 관련해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신뢰도를 떨어뜨렸다는 비판이 많다.

"한·일 간 이견이 있을 때는 상호 소통과 협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통해 관계를 진화시켜왔다. 혁명적 변화나 일방적 파기는 선진국적 일처리 방식이 아니다. 약속은 파기하는 쪽이 늘 부담이 크다. 국제적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도 약속을 파기하는 쪽이다."

-일본관계 악화는 우리 정부의 외교력 부재도 있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정부도 ‘진정성 있는 사과’를 잃어버렸다. 일본은 ‘위안부 합의’라는 문서에다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끝났다고 썼다. 상당히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태도다. 우리 쪽에서 ‘거기에 쓴대로 말로 해달라’라고 하면, 말로는 안하겠다고 한다. 편지를 써달라고 해도 안하겠다.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본 지도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진정성있게 사과하는거냐 반성하는거냐라고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사과 부재에 대한 피로감이 강하고, 일본은 사과 요구에 대한 피로감이 큰거다."

-과거사에 대한 양국의 생각 차이가 지금의 상황까지 왔다.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일본 게이오대 명예교수는 한·일 관계에 대해 '복합골절'이라고 진단했다. 이제는 이 수준을 넘어섰다. 지금은 '반신불구' 또는 '신경부전' 상태에 이르렀다.
한국과 일본이 동시에 역사에 사로잡혀 있다. 이걸 넘어서야 한다. 일본어에 좋은 표현이 있다. '노리코에루(乗(り)越える)' '타고 넘다'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잊어버리자'는 게 아니다. 타고 넘어서자는 뜻이다. 극복하고 전진하자는 의미도 담겨 있다. 역사의 포로가 돼서 그걸 넘어섰을 때 얻을 수 있는 전략적 이익을 포기한 상태다. 너무 안타깝다."

-한·일 관계와 관련해 문재인정부에 제언을 하자면?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는 처칠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과거사 척결은 감정을 만족시킬 수는 있지만 현실적 이익을 축소시킬 수 있고 미래 협력을 상쇄시킨다. 과거사 해결만이 한·일 관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대국적 판단이 필요하다. 한·일 관계는 과거에만 묶이지 말고 현재의 실용적 이익과 미래의 협력여지를 여는 발전적 진화를 지향해야 한다. 일본과의 협력은 한국의 안보를 담보하고 미국, 중국 등 강대국에 대한 외교적 레버리지를 높여주며 국제국가의 활로를 넓혀줄 수 있다. 군사, 경제, 문화협력과 인적 교류를 높이는 게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 :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학 조교수, 외교안보연구원 조교수를 역임했다. 컬럼비아대, 일본 게이오대, 일본 고베대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2012~2016년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소장, 2017년 현대일본학회 회장, 2016~2018년 서울대 국제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5년 일본연구 및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제1회 나카소네 야스히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