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씨X. 학원 시간 늦겠네. 저 차는 왜 지X이야? 꺼지면 되잖아"
지난 20일 오후 6시 30분 강남 대치동 학원가. 꽉 막힌 8차선 도로에서 초등학생들을 태운 셔틀버스 운전기사는 연신 거친 욕을 내뱉었다. 강남 일대와 대치동 학원가를 오가며 어린 학생들을 실어나르는 이른바 ‘라이드 전용’ 버스다. 라이드 서비스는 맞벌이로 자녀의 학원 통학을 챙기기 어려운 강남 학부모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주요 탑승자는 초등학생 이하 어린이들이다.
◇'고속 질주' 라이딩버스 타보니… "곡예운전 중 아이들은 공부"
'오후 6시 9분 잠실 ○○정류장 승차, 대치동 ○○학원 하차'
기자가 네차례 라이딩 서비스를 직접 이용해 봤다. 방식은 간편했다. 당일 예약은 편도 9900원, 왕복 1만9800원. 결제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배차가 확정됐다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버스에는 이미 초등학생 6명이 타고 있었다. 한 학생은 고개 한번 들지 않고 도형이 그려진 문제집을 풀고 있었고, 또 다른 학생은 이어폰을 낀 채 휴대전화로 인터넷 강의(인강)을 듣고 있었다. 피곤했는지 고개를 가누지 못한 채 곯아 떨어져 있는 학생도 있었다.
다음 정류장에서 초등학생 한 명이 추가로 올라탔다. 셔틀버스는 속도를 높였다. 승하차 도우미가 "시간이 조금씩 밀려 늦을 것 같다"고 재촉하자 기사는 "최대한 빨리 가봐야지" 하면서 가속페달을 밟았다. 가끔은 신호도 무시했다. 15분 뒤 시작하는 아이들 학원 수업 시간을 맞추기에는 빠듯한 일정이었다.
잠실에서 대치동으로 진입하는 길목은 차량들로 꽉 들어차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버스기사는 경적을 몇 차례 울리며 앞 차량의 꼬리를 물고 조금씩 조금씩 차량을 움직였다. 횡단보도 앞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왔지만 슬금슬금 지나쳤다. 보조인은 연신 한숨을 내쉬면서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다.
오후 6시 15분. 운전기사는 "에이 씨X"이라며 나직이 욕을 뱉더니 골목으로 핸들을 틀었다. 제한 속도 30km/h 골목에서 두배가 넘는 속도로 곡예 주행을 시작했다. 행인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는 건 예사다. 마주 오는 차가 비키지 않으면 기사는 창문을 열고 삿대질을 하며 "옆으로 좀 빠져. 씨X놈아" 하고 고성을 질렀다. 버스가 덜컹대고, 기사의 언성이 높아져도 아이들은 익숙한 듯 코를 박고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버스 안 아이들은 "엄마를 위해 학원을 다닌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는 한 학생은 "학원 다니기 싫은데 엄마가 좋아하니까…"라며 "몇달 전부터 엄마가 이거(버스) 타라고 해서 학원 오갈 때 이 버스를 탄다"고 했다.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은 "엄마가 오면 더 좋겠는데 바빠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흰색 번호판을 달고 다니는 ‘라이딩 버스’는 사실상 불법이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에는 자가용 자동차가 유상운송을 할 수 없고, 노선 운행도 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교통지옥 학원가에선 "스카이캐슬 속 이야기는 내 현실"
대치동 학원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 45분. 잠실에서 대치동까지 약 35분이 걸렸다. 이 시간대 차량혼잡 등을 고려하면 평소 50분 이상 걸리는 거리라고 한다. 버스에서 내리자 아이들은 뛰기 시작했다. 먼저 내린 아이가 "수업 시작했다" 하고 소리치니 우르르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 시각 대치동 학원가 일대는 그야말로 교통지옥이었다. 아이들을 내려주기 위해 몰린 학부모 정차 차량이 가장자리 차선을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고, 중간중간 버스들이 뒤엉켜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4차선 도로 한 가운데서 내려 차량들 사이를 지나 학원으로 향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수업을 마칠 시간인 오후 9시부터 10시 사이 이 일대는 또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은마아파트 네거리 주변에는 도로 가장자리 2개 차선이 학원 이용 차량들로 대부분 ‘주차 전용구역’이 돼 있었다. 모범택시운전사회에서 교통정리 봉사를 나온 사람만 10여명에 달했다. 모범운전사 권기열씨는 "경찰서의 요청으로 모범기사들이 학원가 곳곳에 배치돼있긴 하지만, 여기는 매일 전쟁이 따로 없다"면서 "대치동을 향한 학부모의 교육열은 식을 줄 모른다. 출생율은 낮아진다는데 해가 갈수록 오히려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는 차들은 점점 더 느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후 10시쯤 도곡로 갓길에 차를 세운 뒤 아이를 기다리고 있던 이모(38)씨는 "초등학교 4학년이라서 가르치면 충분히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지만, 오고 가고 하는 시간에 남은 숙제나 보충 공부를 하라고 내가 직접 셔틀을 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학부모 최모(45)씨는 "드라마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이야기가 다소 과장되기는 하지만, 실제 내가 겪고 있는 일"이라며 "가끔 차를 대놓고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길거리에서 학부모들끼리 모여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