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시대에 '127시간' 근무하는 전공의들
336시간 연속으로 근무한 경우도
"양심에 걸려도 환자 떠넘길 수밖에…"
"싼 의료수가로는 '전공의' 혹사 시스템 못 막는다"
"동료 전공의 한 명이 오후 7시쯤 맹장이 터져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 전에는 ‘8시간 금식’이 원칙인데 그는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아침부터 물 한 모금 못 마셔 수술 전 금식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수술방에서 눈앞에서 담당 교수가 환자를 수술할 때도 수면 부족으로 졸 때가 있다. 전공의들이 다들 한두가지 질환을 달고 사는데, 진료받으러 갈 시간이 없어서 그냥 앓으며 산다." (수도권 소재 병원 전공의 A씨)
지난 1일 인천 가천대길병원에서 숨진 2년 차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신모(33)씨는 ‘36시간 연속당직’을 하던 중이었다. 숨지기 전 24시간 연속 근무했고, 12시간 근무를 추가로 앞둔 오전 9시쯤 당직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신씨는 특별한 지병이 없었고, 시신에 외상도 없었다.
신씨 사망 원인이 ‘과로사’로 추정되면서, 전공의 근로시간을 이대로 둬도 좋은가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숨돌릴 틈도 없는 격무… 이틀에 2시간 자며 일한다
2년 차 외과계열 전공의(레지던트) A(29)씨는 매일 오전 6시 출근해 하루를 시작한다. 출근 직후 자신이 담당하는 입원 환자 30여 명의 맥박과 혈압 등 상태를 확인하고, 병원의 아침 회의 격인 콘퍼런스(집담회)와 아침 회진을 준비한다. 회진 후에는 수술방으로 직행한다. 하루에 수술은 2~3건. 초집중 모드로 수 시간 서 있어야 한다.
오후 7시부터 다시 ‘저녁 회진’이 시작된다. 환자마다 처방을 내리고, 수술 동의서를 받다 보면 자정이 넘어야 간신히 퇴근한다. 평일·주말 당직도 서야 해서, 1주일에 2~3일 밤 새우는 것은 기본. 밤을 새운 다음날도 대휴 등 별다른 휴식시간은 없다.
A씨는 "병원 근무표에 내 근무시간은 80시간이지만, 실제론 1주일에 130시간은 일한다"며 "‘36시간 연속근무’는 기본이다. 이틀 동안 2시간 자는 경우도 흔하다"고 했다.
◇'36시간 연속근무는 일상'… 336시간 연당도 있었다
레지던트(전공의)는 내과·외과 등 전문의가 되기 위해 3~4년간 병원에서 수련 생활을 하는 의사다. '레지던트'라는 말도 '머문다(resident)'는 영어 단어에서 왔다.
전공의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수련생인 신분으로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에 있다. ‘주당 52시간’ 룰 대신 2017년부터 시행된 ‘전공의 특별법’을 적용받아 주당 80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다. 여기에 교육 명목으로 8시간을 더할 수 있다. 주당 법정 근로시간은 최대 88시간에 이른다. 레지던트들은 "주당 88시간은 6일 내내 거의 15시간씩 일한다는 뜻인데, 실제 근무 환경은 그보다 더 가혹하다"고 입을 모았다.
3년 차 외과 전공의 B(30)씨는 1년 차이던 2017년 ‘2주 연당(연속당직)’을 했다. 병원에서 336시간을 연속으로 근무한 것이다. B씨는 "다음날 졸음 때문에 쓰러지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고 했다. 새벽 응급실에 응급 환자가 왔는데도 몇 시간 후 다른 의사에게 수술받도록 미룬 적도 있다. "며칠이나 더 연속근무를 해야 할 지 모르는 상황에 새벽에 그 수술을 하면 버틸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의사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해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공의들의 살인적 근무 조건은 환자의 안전까지도 위협한다.
◇"전공의법상 주 80시간만큼은 지켜달라"
‘주(週) 80시간’으로 근무시간을 제한하는 ‘전공의 특별법’은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는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전공의법 시행 이후인 2017년 4월 전공의 1768명을 조사해 펴낸 자료에 따르면, 주 80시간을 초과해 일하는 전공의는 전체 63.6%였다. 쉬지 않고 일하는 ‘최대 연속근무 시간’은 평균 70.1시간으로, 전공의법에서 규정한 ‘최대 연속근무 36시간’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였다. 3년 차 외과 전공의 C(31)씨는 "최소한 전공의법에 규정된 근무시간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정부가 더 강력하게 단속·제재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들은 "근본 원인은 저수가(低酬價)로 운영되는 의료제도"라고 입을 모은다. 의료 수가가 낮다 보니 병원 수익성이 떨어지고, 병원이 먹이사슬 최하위인 전공의를 비상식적으로 부려먹는 악순환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외과 전공의 B씨는 "의료 수가를 높이는 매듭부터 풀어야 비상식적인 전공의 근무시간이 줄어든다"고 말했다.
전공의법 규정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안치현 대한전공의노동조합 노조위원장은 "전공의법에 따르면 36시간 연속근무는 합법이다. 그런데 36시간 연속으로 근무한다는 것이 과연 상식적인가, 36시간 연속근무한 의사에게 진료받는 환자는 안전한 것인가"라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