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현지 시각) 미국 전역이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백악관과 워싱턴 기념탑 앞의 분수대에서는 초록색 물이 뿜어져 나왔고, 일리노이주(州) 빌딩 숲 사이로 흐르는 시카고강에도 친환경 천연염료가 풀어져 온통 녹색으로 물들었다. 시민들도 녹색 옷을 입고 녹색 물결에 동참했다. 이날은 아일랜드에 처음 가톨릭을 전파한 수호 성인(聖人) 패트릭(386~461년)이 사망한 '성 패트릭 데이(St. Patrick's Day·3월 17일)'로, 그를 기리는 축제가 벌어진다. 축제 때 쓰이는 초록색은 아일랜드 국기에 들어간 토끼풀 색에서 유래한다. 패트릭은 3장의 잎으로 이뤄진 토끼풀을 활용해 아일랜드 원주민들에게 가톨릭의 삼위일체 개념을 설명했다고 한다.

미국 일리노이주 빌딩 숲 사이로 흐르는 시카고강이 17일(현지 시각) 성 패트릭 데이를 기념해 초록색 염료로 물들어 있다.

성 패트릭 데이는 아일랜드의 명절이지만 미국에서 오히려 요란하게 열린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미국 인구의 10분의 1 정도인 3300만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전체 인구(약 500만명)보다도 많다. 단순히 숫자 문제만이 아니다. 미국 사회, 특히 워싱턴 정가(政街)의 아일랜드계 '소프트파워'는 막강하다. 주미 아일랜드 대사 존 헌이 1952년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에게 토끼풀 상자를 보내면서, 토끼풀 전달 행사는 미국 대통령들이 챙기는 전통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성 패트릭 데이를 앞두고 지난 14일 백악관에서 녹색 넥타이를 맨 채 리오 버라드커 아일랜드 총리로부터 토끼풀 화분을 선물 받았다.

유력 정치인 중에서도 아일랜드계가 많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조부모가 아일랜드 출생이다. 믹 멀베이니 비서실장 대행, 존 켈리 전 비서실장, 트럼프 대통령 보좌관이었던 스티브 배넌과 켈리앤 콘웨이 등 백악관과 행정부 내 고위직에 아일랜드계가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다. 의회에선 케빈 매카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전 하원의장 폴 라이언이 아일랜드계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편이다.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보스턴에서 열린 성 패트릭 데이 행사에 영상을 보내 "우리는 아일랜드인이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항상 미래를 향해 향수(鄕愁)를 품고 있는 유일한 민족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