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해냈습니다."
아들의 전화에 아버지 강희남(69)씨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부자(父子)가 함께 20년 가까이 미국 전역을 누빈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한다.
"낯설고 광활한 미국 땅에서 아들을 대회에 참가시키려 50시간씩 운전하면서 왔다갔다하던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참 많이 고생했어요. 아들이 이룬 꿈이 이젠 위안이 되네요. 저 잘 안 우는 사람인데요, 눈물이 절로 납니다."
◇159번째 만에 든 우승컵
아버지를 울린 주인공은 프로 골퍼 강성훈(32)이다. 강성훈은 13일 미국 텍사스주 트리니티 포리스트 골프클럽(파71·7371야드)에서 열린 PGA(미국프로골프)투어 AT&T 바이런 넬슨(총상금 790만달러)에서 최종 합계 23언더파 261타로 우승했다. 공동 2위인 맷 에브리(미국)와 스콧 피어시(미국)를 2타 차로 제치며 우승 상금 142만2000달러(약 17억원)의 주인공이 됐다.
158전 159기. 8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따낸 PGA투어 첫 우승이다. 한국 국적 선수로선 최경주(49·8승), 양용은(47·2승), 배상문(33·2승), 노승열(28·1승), 김시우(24·2승)에 이어 여섯 번째 PGA투어 우승이다.
강성훈과 에브리의 명승부가 이날 필드를 달궜다. 두 선수는 대회 마지막 날, 전날 일몰로 소화하지 못한 3라운드 잔여 홀과 4라운드 18개 홀 등 하루에 27개 홀을 돌았다.
3시간만 자고 나온 강성훈이 이날 오전 3라운드 남은 홀에서 2타를 줄여 에브리에게 3타 차 앞선 채 4라운드에 돌입했다. 엎치락뒤치락하던 둘은 12번 홀(파3)에서 동타를 이뤘다.
승부의 분수령은 15번 홀(파4). 안전하게 그린을 노린 두 번째 샷으로 핀 7m 지점에 볼을 떨어뜨린 강성훈은 긴 내리막 버디 퍼트에 성공했다. 반면 에브리는 무리하게 핀을 공략하다 2온에 실패한 뒤 3m 파 퍼트마저 놓쳤다. 2타 차로 재역전한 강성훈은 16번 홀(파4) 버디를 잡아 3타 차로 달아나며 사실상 승부를 결정지었다.
◇꿈을 위해 미국을 누빈 아버지와 아들
강성훈은 3라운드에서 일몰로 경기가 중단되자 최경주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했다. 최경주는 "너 자신의 골프를 해라. 지금까지 보여 준 골프의 반만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한 라운드에 4타씩만 줄이려고 해봐"라고 조언했다. 신기하게도 그 말처럼 강성훈은 1·2라운드에서 줄인 타수의 절반만큼 3·4라운드에서 줄여 우승했다. 최경주는 "강성훈이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을 믿고 편안하게 경기에 임하라는 뜻에서 한 말"이라고 했다.
강성훈은 2부 웹닷컴 투어에서 뛰던 2013년에도 최경주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KPGA(한국프로골프) 대회인 '최경주 CJ 인비테이셔널'에 자신을 초청해 달라고 부탁한 인연이 있다. 한창 부진하던 그는 그 대회에서 최경주의 대회 3연패(連覇)를 저지하고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당시 최경주는 강성훈을 꼭 안아주며 격려했다. 강성훈은 AT&T 바이런 넬슨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최경주 선배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강성훈은 잊지 않고 아버지에게도 영광을 돌렸다. 서귀포에서 횟집을 운영했던 아버지 강씨는 아들이 골프에 소질을 보이자 양어장을 팔고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다. 강씨는 아들을 PGA투어에 보내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방학이 되면 미국으로 함께 건너갔다. 그는 "레슨과 훈련에 영어 수업까지 하다 보면 밤 11시가 되어야 하루가 끝났지만 한창 놀고 싶을 나이인 사춘기 아들도 '못하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데 내가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었다"고 했다.
아마추어 시절 KPGA투어 롯데스카이힐 오픈 우승 등 화려한 시절을 보낸 강성훈에게도 PGA의 벽은 높았다. 몇 차례 도전 끝에 2011년 PGA투어에 데뷔했지만, 성적 부진으로 2년 만에 2부 투어로 밀려났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2016년 PGA투어로 복귀했다.
이번 대회가 열린 트리니티 포리스트 골프클럽은 강성훈의 자택이 있는 댈러스 서부 지역과 차로 30분 거리에 있다. 덕분에 강성훈은 아내 양소영씨, 돌이 갓 지난 아들 유진군과 함께 우승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아버지 강씨는 "투어가 끝나고 돌아갔을 때 아무도 없는 집이 싫다던 아들이 결혼하고 나선 책임감도 생기고 안정을 찾은 것 같다"고 했다.
대회 진행자가 우승 직후 "가족과 갈비 파티를 할 계획이냐"고 묻자 강성훈은 "아니다. 사실 내일 아침 6시에 트레이너를 보기로 했다"며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작은 체격(172㎝)의 강성훈은 꾸준한 웨이트트레이닝 등 특유의 성실성으로 비거리를 늘리며 한계를 극복했다. 그의 올 시즌 평균 드라이버샷 거리는 297야드로 PGA투어 64위다. 강성훈은 오는 17일 막을 올리는 시즌 두 번째 메이저 대회 PGA챔피언십에 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