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광장시장에서 조윤선·이수환 모자(母子)가 마주 보고 웃었다. 전업주부이던 어머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시장 노점에서 칼국수를 팔았다. 아들은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특급 호텔 셰프가 됐다. 시장에 자리를 알아봐 줘 생활에 숨통을 열어준 건 시댁, 맛있는 칼국수 요리법을 전수해준 건 친정어머니였다. 삶은 때때로 우리에게 고난을 던져준다. 그걸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건 언제나 가족이다.

"아들 왔어?"

지난 15일 흰색 셰프복 차림의 아들이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으로 들어서자 칼국수를 삶던 어머니가 반색했다. 아들은 당연한 듯 앞치마를 하고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환호하며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어머니는 사인해 달라는 성화에 시달리기도 했다. 노점 30석을 꽉 채운 손님 80% 이상이 외국인 관광객. 누군가 "여기 대사관 차려도 되겠어"라며 웃는다.

지금 이 요리사 모자(母子)는 글로벌 TV 스타다. 어머니는 넷플릭스 인기 다큐멘터리 '길 위의 셰프들'의 한국편 주인공인 '고향 칼국수' 사장 조윤선(58)씨. 아들은 서울 광화문의 특급호텔 포시즌스호텔서울 중식당 '유유안'의 이수환(30) 셰프다.

세계 1위 동영상 스트리밍 기업 넷플릭스는 지난 4월 '길 위의 셰프들' 방영을 시작했다. 선정 이유를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내부에서는 "한국 길거리 음식의 맛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광장시장'이고, 한국인의 정서인 한(恨)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조씨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넷플릭스는 조씨의 칼국수를 소개하며 "지극히 평범한 음식을 수준 높은 음식으로 격상시켰다. 그녀의 음식에서는 집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녀의 칼국수에는 어떤 힘이 있을까. 그리고 칼국숫집 아들은 어떻게 특급 호텔 셰프가 된 걸까.

엄마의 칼국수

조씨는 매일 아침 7시면 시장에 나온다. 펑퍼짐한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진홍색 앞치마를 걸친다. 보라색 토시를 하고 베이지색 모자 겸 두건을 쓰면 준비가 끝난다.

―칼국수 장사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나요.

어머니 : "원래는 순대 장사부터 시작했어요. 남편의 자동차용품 대리점 사업이 망하면서 큰 빚을 지게 돼 11년 전 시장으로 나왔지요. 그 자리가 전에 순댓집이어서, 처음 5년을 따라 했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어떤 점이요?

어머니 : "순대는 술 손님이 많았어요. 그런데 손님 중에 술을 마시면 돌변하는 사람이 많았죠. 점잖은 분들도 취하면 거칠게 말하고 욕도 하고. 텃세와 시샘도 힘들었어요. 아침에 나오면 못 보던 쓰레기가 제 집 앞에 있어요. 자기들 쓰레기를 우리 집 앞에 다 모아 놓은 거예요. 그러곤 '네 쓰레긴데 왜 안 치우고 가느냐. 너 때문에 시장이 지저분하다'는 말을 해요. 기가 막히죠. 처음 한두 번은 제가 치웠는데, 자꾸 그러니깐 오기가 치밀었어요. 쓰레기를 뒤집으니 누가 주인인지 다 표가 나는 거예요. 증거 들이밀고 따지니까 그제야 겨우 그쳤어요. 매일 몇 번씩 그만두고 싶었지만, 전 가족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후에는 이왕 장사할 거면 '내가 좋아하는 걸 하자. 그래야 성공도 하고, 우리 가족이 다 잘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칼국수를 시작했습니다."

―칼국수를 좋아했나 봅니다.

어머니 : "제가 어렸을 때 친정어머니가 잘해주시던 음식이에요. 그때는 밀가루를 국가에서 지원해주던 시절이죠. 어머니가 그거로 칼국수나 수제비를 늘 해주셨지요. 밀가루 만질 때 촉감도 아기 엉덩이 만지는 것 같아 좋아하고. 새우로 육수를 내는 거, 김치 담그는 거 다 어머니에게 배운 거지요. 제가 꾸미로 당근이랑 부추 등도 올리는데, 시장에서는 잘 안 그러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냥 제 식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바꾸고 나니 손님들이 더 많이 와주시더라고요. 순대 할 때는 시장 입구 작은 곳에서 했는데, 칼국수 하고 나서는 안으로 들어오고, 자리도 커지고. 칼국수 시작한 지 2년 만에 빚을 다 갚았어요."

―빚을 다 갚았을 때 기분은요.

어머니 : "진짜 환호성을 질렀어요. '이제 됐어. 아무것도 없어.' 이 소리가 저절로 나왔어요. 그제야 제 삶을 찾은 기분도 들고. 제 아이들도 빚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제가 살면서 자부하는 것 중 하나가요, 장사하면서 애들 대학 다 보낸 거예요. 장사 시작하고 제일 먼저 한 게 큰아이 학자금 대출 갚은 일입니다. 큰아들은 학교 선생님으로, 작은아들은 셰프로 훌륭하게 성장한 것도 제 자부심이지요."

―지금은 어떤 자부심으로 일하나요.

어머니 : "제가 지금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딱 하나, 그만두고 나서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살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들들 결혼할 때 집은 못 사주더라도 전세자금까지는 부모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몸이 허락하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아들의 베이징덕

아들 이수환 셰프가 일하는 '포시즌스호텔서울'의 중식당 유유안은 국내 중식당 중 유일하게 미슐랭 별을 받은 곳이다. 이 셰프의 근무복은 흰색 조리복과 흰색 모자. 그 위에 검은색 줄무늬 앞치마를 착용하면 준비가 끝난다.

―어릴 때부터 꿈이 셰프였나요.

아들 : "어릴 때는 딱히 없었어요. 그런데 중3 때인가 어머니께서 '요리학원 갈 생각 없느냐'고 권하시더라고요. 저희 집은 외식을 거의 안 했거든요. 어머니가 집에서 요리할 때 제가 옆에서 간도 제법 잘 보고 하니까,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아들 이수환 셰프는 호텔 동료들과 종종 서울 광장시장 어머니 칼국숫집에서 회식을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일하는 호텔에 거의 못 온다. 어머니 조윤선씨는 “한 달에 하루밖에 못 쉰다”며 “나뿐만 아니라 시장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산다”고 했다. 사진은 올해 초 어머니가 넷플릭스 방송을 위해 포시즌스호텔을 처음 방문했을 때 기념으로 찍었다.

―요리학원은 즐거웠나요.

아들 : "조금 힘들었어요. 내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시간 맞춰 재료를 크기에 맞게 딱딱 잘라야 하는데 크기가 안 맞는다고 혼도 나고요. 그래서 마트에서 무를 사와 칼질 연습을 많이 했어요. 그때 무생채를 매일 먹었어요. 지금은 무생채는 쳐다보지도 않아요.(웃음)"

―그런데 언제부터 적성이라고 생각했나요.

아들 : "군대 갔을 때요. 취사병을 했는데 거기서 칼질이 많이 늘었고요. 뭐든 산처럼 쌓아놓고 써니깐. 칭찬도 많이 들었어요. 간부 식당이 따로 있었는데 간부들이 일부러 저희 식당을 찾아와요. 저희 부대가 산에 있었는데도. 장교들이 밥 시간 아닐 때 냉이 같은 거 캐 와서 된장국 끓여달라고도 하시고. 저희 높으신 분이 오리 고기를 되게 좋아하셨는데, 직접 잡아서 오리 구워달라고도 하시고. 그러고 보니 지금 하는 일(베이징 덕 요리)과도 겹치네요.(웃음)"

―중식당 경험은 언제부터?

아들 : "중학교 때 학원에서 자격증을 딴 걸 빼면 사실은 지금이 처음이에요. 제가 대학도 요리학과를 갔는데 중식이 없었어요. 그러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1년 갔는데 거기 차이나타운에서 베이징 덕을 처음 접했어요. 먹었는데 아주 맛있는 거예요. 좋아하게 됐죠. 지금까지 이 일 저 일 많이 했어요. 이자카야 주방에서도 일했고, 호주에 있을 때는 시드니 한인 카페에서 파스타부터 부대찌개까지 다 만들어보고. 퍼스에서는 빵도 굽고 샌드위치도 만들고."

―(웃으며) 그런데 왜 당신을 뽑았을까요.

아들 : "저도 제가 나이도 많고 해서 안 될 줄 알았는데 처음 면접 때부터 'BBQ(구이) 담당으로 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열정도 있어 보였고, 팀 분위기와도 잘 맞아 보였대요. 질문도 특별한 건 없었어요. '중식에 대해 뭘 아느냐' 이런 거 물으시길래, '호주에서 베이징 덕 맛있게 먹어 봤다'고 했고. 그렇게 면접만 다섯 번을 봤어요. 그런데 출근한 다음 날 우리 레스토랑이 미슐랭에 선정됐어요.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여기서 정말 열심히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한 번은 제 위에 있던 중국인 셰프가 갑자기 그만둬서 제가 BBQ 총괄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수셰프(부주방장)가 '고생 많다. 지금 너무 잘하고 있으니 무리하지 마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 들으니 정말 힘도 나고. 참, 호텔 사람들이 저희 어머니 칼국수도 좋아해요. 저희 회식도 여기 시장에 와서 자주 했어요."

아들은 겸손했지만, 호텔 측은 "중학교 때부터 요리학원을 다니며 한식·중식·양식 자격증을 모두 보유하고 대학교 때까지 꾸준히 요리 공부를 하는 등 기본기가 탄탄했다. 유유안이 국내 중식당과는 메뉴 등이 다르기 때문에 경험보다는 기본기와 열정, 성실함, 팀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유연한 사람인가를 보고 선발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넷플릭스 촬영하면서 아들의 호텔을 처음 방문했다면서요.

아들 : "어머니가 한 달에 딱 한 번 쉬세요. 매일 아침부터 자정까지 일하죠. 제가 '내가 일하는 데 와서 밥도 좀 드시고 갔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잘 안 오세요."

어머니 : "원래 여기 쉬는 날이 한 달에 한 번이에요. 저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 시장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요. 정말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 한 일하러 나와요. 여긴 전쟁터예요."

넷플릭스 음식 다큐 ‘길 위의 셰프들’에 출연한 조윤선 광장시장 고향 칼국수 사장. 진행자는 조씨에 대해 “가게가 늘 가족 같은 느낌이 들죠. 단연 시장 최고라 할 수 있어요”라고 했다.

가족이라는 이름

"한국 속담에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라는 말이 있어요. 포기하지 말라는 거죠. 조윤선씨는 완벽한 사례입니다." (길 위의 셰프들 중)

―살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가 언제인가요?

어머니 : "남편이 고속버스를 타고 출장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어요. 1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하고, 퇴원할 때쯤 IMF 외환 위기가 오면서 회사까지 나와야 했어요. 그때 받은 퇴직금 1억원으로 대리점 사업을 시작했는데 수금이 잘 안 되는 거죠. 그래도 물건은 깔아야 하니 가족·친척 돈 이렇게 끌어들이다 사채까지 손을 댔죠. 밤에 전화가 오면 애들 아빠가 깜짝깜짝 놀라요. 사채 업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독촉을 하는지."

―이런 상황을 알았나요?

아들 : "몰랐어요. 한 번도 '우리 집 가난하다'라고 생각 안 했어요. 웬만한 건 거의 다 해주셨어요."

어머니 : "제가 아이들 바람막이가 돼 주려고 애를 많이 썼죠. 학교 급식소도 나가고, 주말에는 음식점 가서 일도 하고. 새벽에 우유도 돌렸고. 애들은 모르죠. 제가 새벽에 나가서 애들 깨기 전에 들어오고 했으니깐."

―처음에는 시어머니가 광장 시장에 장사 자리를 봐 주셨다면서요.

어머니 : "저희 시어머니가 젊어서부터 칠순 넘어까지 여기서 장사하셨어요. 그땐 다 어려운 시절이라 적당한 직업이 없을 때니깐 아버님이 살림하시고 어머니가 8남매 먹여 살리기 위한 경제 활동을 하셨지요. 여기 창신동 사셨거든요. 광장시장이 가깝고 하니깐 처음에는 떡 만들어서 보따리에 싸서 나와서 쭈그려 앉아서 팔고 하시다가 조그만 노점 하나 잡아서 대야 놓고 떡볶이 팔고 하신 거지요. 지금은 시누이들이 물려받아서 하고 있고요. 저희가 너무 어려워하니깐 어머니가 누님들에게 '쟤네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데려다 장사라도 가르치면 좋겠다'라고 하셨다더라고요."

―그때 기분은요?

어머니 : "제가 겁을 많이 냈어요. 장사를 안 해봤기 때문에. 번듯한 가게도 아니고 노점에서 사람을 불러가면서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컸죠.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일한다는 게 너무 부끄러웠죠. 그런데 공과금도 밀리고, 얘네들 대학도 보내야 하고."

―창피했나요?

어머니 : "제가 살면서 다행으로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눈물이 고이며) 저희 친정어머니 돌아가시고 시장에 나온 거예요. 생전이었다면 정말 많이 속상해하셨을 거예요. 어렸을 때 이런 일이 있어요. 학교 다닐 때 비를 좀 맞고 집에 가도 되잖아요. 그런데도 꼭 우산을 가지고 오셨어요. 저희 집이 수유리인데, 정릉까지 우산을 가지고 오신 분은 우리 어머니밖에 없었어요."

―특급호텔 셰프로서 시장에서 칼국수를 만드는 엄마를 보면 어떤가요.

아들 : "호텔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지만 시장은 여름엔 진짜 덥고 겨울엔 진짜 춥습니다. 그걸 버텨내는 어머니를 보면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워요. 어머니가 시장에 일하러 가신다고 할 때도 부끄럽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친구들에게도 '돈 벌러 서울 가셨다. 시장에서 장사하고 계신다'고 말했고요. 어머니 가게를 물려받는 생각도 해봤는데, 제가 물려받으면 장사가 안될 것 같아서(웃음) 저는 지금 하는 일을 좀 더 열심히 배우려고요."

―시장의 어머니는 특급호텔 셰프 아들이 어떤가요.

어머니 : "정말 뿌듯하지요. 이렇게 큰 호텔에서 이렇게 멋진 옷을 입고. 잘하고 있나 걱정도 되고."

―두 분에게 요리는 어떤 의미인가요?

아들 : "저를 행복하게 해주는 수단인 것 같아요. 제가 만든 음식을 먹고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도 좋고. 물론 셰프로서의 저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고요."

어머니 : "저희 가족을 지켜주는 보호막이지요. 시장에서 칼국수를 만든 덕분에 저희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살게 됐고. 남편은 저보고 '구세주'라고 부르고요. 앞으로도 이렇게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구세주'라는 표현에서 '고향 칼국수' 맛의 비결을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평범하다면 지극히 평범한 사연. 그 연배 어머니들 중에서 이만큼의 곡절 없는 이가 있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칼국수로 가족을 구했고, 지금은 넷플릭스를 보고 찾아온 외국인에게까지 탄성과 지지를 끌어내는 중이다. 가족은 힘이 세다. 맛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