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이 도움을 청하기 전에 미국이 한·일 갈등 해결을 위해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 규제를 예고한 직후인 지난 2일 만난 트럼프 행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비롯해 미국이 악화한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해 막후에서 역할을 할 때는 한·일 양국이 모두 미국이 조력자 역할을 해주길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고 했다. 이 관리는 "이번 갈등은 한국과 일본이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대한(對韓) 수출 규제를 예고한 지난 1일 미 국무부가 한·일 갈등에 대해 보인 공식 반응은 "미국은 한·일과의 3자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관리가 털어놓은 트럼프 정부의 속내는 "한·일이 원치도 않는데 미국이 굳이 나설 필요가 있느냐"였다.
한·일 관계가 악화했는데도 미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상황은 예외에 속한다. 지난달 초 워싱턴 싱크탱크 CSIS(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서 토론에 나선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은 "내가 멀리서 관찰한 바는 미국 외교가 늘 해왔던 것, 즉 뛰어들어서 조용히 합의를 권고하는 역할을 우리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한·일 갈등에 대해 침묵을 지키기보다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중국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블룸버그통신도 4일 트럼프 행정부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한·일 불화가 위험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니얼 스나이더 스탠퍼드대 교수는 블룸버그통신에 "동북아에 있는 미국의 두 주요 동맹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미국 국가 안보 이익에 대한 위협임을 미국은 항상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트럼프 정부는 그 책임을 저버렸다"고 했다.
미국이 과거와 달리 중재 역할을 주저하는 배경엔 '동맹'과 '다자 외교'에 의미를 두지 않는 '트럼프식 외교'가 있다. 워싱턴 전문가들에 따르면 트럼프에게 외교는 '양자 관계'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트럼프는 '다자 접근'을 선호하지 않아 G20이나 나토(NATO)에도 관심이 없다. 트럼프는 동맹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한·일이 불화를 겪든 사이가 좋든 관심이 없다. '다자 구조'인 한·미·일 3국 협력의 필요성도 중시하지 않는다.
조셉 윤 전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겸 한국·일본 담당 부차관보는 7일 "트럼프는 동맹이나 동맹국 간의 단합에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그간 미국이 한·일 사이에서 막후 역할을 할 수 없었다"면서 "미국이 전통적으로 해오던 조정자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일 관계가 더 악화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윤 전 대표는 "트럼프 행정부에선 정상 회담이든 고위급 회담이든 한·미·일 3자가 만나 진지하게 논의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 틀이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워싱턴의 한 아시아 전문가는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각각 국내 정치적인 이유로 이번 한·일 갈등을 굳이 빨리 해결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그래서 조속한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미·북 비핵화 실무 협상 재개를 앞둔 상황에서 현재의 한·일 관계는 미국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미국이 나서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