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부터 도입 논의 "시기상조, 현실성 없어" 매번 불발
독일·스위스 등 도입했지만...영국은 도입 반년만에 철회
법조계 "재산으로 형량 가르는 것은 새로운 불평등 불러"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적선현대빌딩에 꾸려진 인사청문회 준비단으로 출근하며 ‘재산비례 벌금제’ 도입 등을 포함한 정책 구상을 발표하고 있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가 26일 내놓은 ‘재산비례 벌금제’ 도입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법계 일각에선 "이미 현실성 없다는 게 검증된 미완의 정책"이라고 지적한다. 30년 넘게 도입 ‘논의’만 이뤄져 온 데다 정책도입 명분인 ‘불평등 해소’에도 맞지 않다는 취지다.

조 후보자는 이날 오전 인사청문회준비단이 꾸려진 서울 종로구 적선현대빌딩에서 기자들과 만나 2차 정책 발표를 하며 "피고인의 경제적 사정에 관계없이 적용되는 현행 ‘총액 벌금제’를 ‘재산비례 벌금제’로 바꿔 형벌의 실질적 평등을 달성하겠다"고 공약했다.

재산비례 벌금제는 범죄행위 경중에 따라 ‘벌금일수’를 먼저 정한 뒤, 피고인의 경제적 사정을 고려해 액수를 정한 뒤 서로 곱해 벌금을 산정하는 방식이다. 이른바 ‘일수벌금제’라고도 불린다. 인사청문회준비단이 배포한 자료에 담긴 예시를 보면, 가령 소득상위 1%와 70%가 혈중 알코올 농도 0.14%의 음주운전을 했을 때, 벌금일수는 동일(70일로 가정)하게 적용하지만, 1일 벌금액수는 30만원과 5만원으로 차등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일수와 액수를 곱해 소득상위 1%는 2100만원, 70%는 350만원을 벌금으로 납부하도록 하겠다는 이야기다. 조 후보자 측은 이 제도의 도입 취지에 대해 "고소득자의 경우 벌금이 별다른 제재 효과가 없는 반면, 저소득자의 경우 벌금을 납부하지 못할 경우 이를 노역장 유치 등 신체의 자유로 대신하게 되는 등 불평등한 결과가 생긴다는 반성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나 법조계 안팎에서는 ‘재산비례 벌금제’가 이미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반응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대선 때 도입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앞서 지난 1월 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은 형법 개정안에 이같은 내용을 포함해 대표발의했다. 조 후보자는 ‘(정책을)재활용 한다는 지적이 있다’는 기자단의 질문에 "법무행정의 연장선상에서 겹치는 게 있을지 모르지만, 잘 보시면 예컨대 ‘재산비례 벌금제’는 새로운 것"이라고 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전문위원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재산비례 벌금제’는 전두환 정부 때인 1986년부터 도입 여부가 검토됐다. 당시엔 ‘시기상조’를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이어 노태우 정부 때인 1992년 법무부가 도입을 검토했지만 ‘벌금액 산정을 위한 재산상태 조사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로 불발됐다. 지난 19대 국회에서도 이상민 의원 등 현 여당을 중심으로 4건의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모두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조선DB

해외 사례를 보면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유럽 몇몇 국가에서 이 제도가 시행 중이다. 프랑스도 경범죄에 대해선 ‘재산비례 벌금제’를 적용한다. 일본도 도입 논의는 있었지만 범죄인의 재산내역을 조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도입이 무산됐다.

반면 영국의 경우 1992년 10월 이 제도를 도입했다가, 재산조사의 어려움은 물론 법관이 형량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범죄인의 재산 고려가 오히려 판단을 제한한다는 이유 등으로 6개월 만에 시행을 중지했다.

법조계에서도 우려가 잇따른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형벌은 책임에 비례한다는 형사법 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주장"이라면서 "재산 조사는 어떻게 할 것이며, 재산 변동 따라 벌금을 환급·감액하기도 하겠다는 것이냐"고 말했다. 대형로펌 소속 변호사는 "재산 따라 형벌이 갖는 효과가 불평등한 것을 바로잡겠다는 것인데, 이런 논리라면 신체 능력에 따라,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형량을 따로 매기자는 주장이 나올 때 어떻게 할 것이냐"고 지적했다. 검찰 출신 변호사도 "세수 창출 해법이라면 모를까, 불평등 해소에 대한 합리적 해법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재산비례 벌금제’ 도입 목소리에 대해 행정부와 사법부도 신중한 접근을 당부해 왔다. 법사위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법무부, 법원행정처 모두 피고인의 경제능력을 정확히 조사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는 점을 우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밖에 법원행정처는 범죄와 관련 없는 ‘피고인의 재산’이 형량을 가를 주된 변수가 될 위험을 지적했고, 법무부는 재산조사 업무로 인한 사건 처리 속도 저하와 업무부담 등을 우려했다.

2018년 기준 전체 벌금사건 가운데 96.7%인 56만여 건이 ‘500만원 이하 벌금’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