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 소지 자유를 보장하라! 수정헌법 2호를 수호하자!"
20일(현지 시각) 미국의 인권운동가이자 평화주의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리는 ‘마틴 루터 킹 데이’임에도, 역설적으로 2만명이 넘는 시위대가 총기로 무장하고 시위를 벌였다. 총을 든 시위대가 크게 목소리를 높이면서 경찰과 날카롭게 대치하는 초긴장 상황이 한때 벌어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폭력 사태나 정도를 넘어서는 대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버지니아 시민 방위대같은 총기 옹호론자들은 이날 버지니아주가 추진하는 새 총기 규제 법안 추진에 반대해 아침 일찍부터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AP에 따르면 오전 7시가 되기도 전에 행사가 예정된 버지니아주 의회 광장 바깥 쪽으로 전국에서 모여든 수백명이 줄을 섰다.
이들이 광장 안 쪽으로 들어서지 않고 바깥 쪽으로 둘러 선 이유는 버지니아 주 정부가 17일 저녁부터 21일 저녁까지 주 의회 의사당 인근에서 모든 종류 무기 소지를 금지했기 때문.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 안쪽에도 참가자로 가득 찼다. 참가자 수가 절정에 이른 오후 1시 무렵에는 무기를 들고 들어갈 수 없는 광장 안쪽 행사장에 선 사람만 6000명을 넘어섰다. 버지니아주 행정 당국은 총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광장 외곽 거리를 행진하며 시위한 이들도 수천 명을 넘어섰다고 추정했다. 주 의회가 추산한 시위 참여자는 2만2000여명.
이들 중 상당수는 손에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전했다. 대부분은 백인이자 남성이었으며, 총기를 들지 않은 시위 참여자들은 손에 총기 규제에 반대하는 피켓을 든 경우가 많았다.
텍사스에서 버지니아까지 차로 20시간이 넘는 거리를 넘어왔다는 시위 참가자 테리 혼은 미국 스미스앤웨슨사가 만든 소총과 40구경 권총을 들고 단상에 올라 "버지니아에서 추진하는 일들이 중단되지 않으면, 이내 다른 주까지 번져 나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로이터가 전했다.
아칸소주에서 14시간을 운전해 왔다는 아벨 커닝햄 역시 "나는 총에 미친 사람은 아니지만 헌법에 (총기소지권리가) 있지 않느냐"라고 토로했다.
2만명이 넘는 시위 인파가 몰렸지만, 주 정부가 우려했던 '샬러츠빌 폭동'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샬러츠빌 폭동은 2017년 8월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열린 백인우월주의 시위 도중 한 참가자가 차를 타고 반대집회 인파를 향해 돌진해 1명이 숨지고 36명이 다친 사건을 말한다. 시위 일주일 전부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무장 경찰 세력을 동원해 시위 전후로 삼엄한 경비를 펼친 덕이라고 외신은 평가했다.
버지니아는 전통적인 공화당 우세지역으로 그동안 총기소지에 관대한 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뒤, 같은 민주당 소속 랄프 노덤 버지니아 주지사를 중심으로 주의회가 뭉쳐 총기 구매 이력자 확인과 위험인물이 총기를 소지 못하게 하는 '적기법(red-flag law)’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작년 5월 31일 발생한 버지니아비치 총기난사 사건으로 10여명이 숨진 사례에서 보듯 ‘헌법상 무장 권리’를 무제한으로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 명분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 버지니아 주의회 상원은 지난 16일 오후 10발 이상이 들어가는 탄창 판매를 막고 한 달에 1개 이상 총기 구매를 금지하며, 지역 정부가 공공건물이나 다른 장소에서 무기 소지를 못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반면 시위대는 미국인에게 총기가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식되는 점을 들어 최소한의 규제에도 반대한다. 18세기 미국 헌법과 수정헌법 2조엔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고 돼있다.
여기서 인민(people)은 주별 치안을 맡은 민병대 구성원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었으나, 1970년대부터 '모든 개인'으로 해석이 확대됐다. 2008년 전과자의 총기 소지 금지가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결 이래 '헌법상 무장 권리' 견해가 더 굳어졌다.
총기옹호론자들의 지지를 받는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이날 집회를 거들며 지지층을 모으고 있다. 그는 17일 트위터에 "버지니아에서 수정헌법 2조가 심각한 공격을 받고 있다"며 "민주당을 뽑으면 이런 일이 생긴다. 그들은 당신의 총을 빼앗아간다"고 비판했다. 이어 "2020년 버지니아에선 공화당이 승리하겠다. 민주당원들, 고맙다!"고 비꼬았다.
미 전역에서 총기 규제 여론을 들끓게 한 총기 난사 사건은 올해 내내 미국 곳곳에서 끊이지 않았다. 지난 한해 미국에서는 한 번에 4명 이상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는 총기류 대량살상 사건이 모두 33차례 일어났다. 통계를 집계한 이래 역대 최다 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