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공대생이 시(詩)를 가르치는 교수를 찾아왔다. 교수가 훌륭한 리포트를 칭찬하자 학생은 한때 문학을 꿈꿨다고 털어놨다. 혹여나 창창한 미래를 포기할까 겁이 난 교수는 학생의 손을 덥석 잡았다. "꿈은 간직하는 거야! 무슨 일을 하든 시를 잊지 말라는 것뿐일세." 그저 미소를 짓던 학생은 결국 동화 작가의 길을 택했다.
정재찬(58)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공대생을 울린 시(詩) 강의로 유명하다.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쓴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15만부 넘게 팔리며 인기를 끌었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가 시를 처음 접하는 이들을 위해 교과서에 나온 시들을 새롭게 해설했다면, 신작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인플루엔셜)에선 대중이 잘 모르는 좋은 시들을 소개한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인생의 굴곡마다 시가 있다"면서 "저는 먼저 산 시인들을 따라 그들이 본 진경(眞景)으로 모셔다 드리는 시 가이드"라고 했다.
생업·노동·아이·부모·몸·마음 등 14개 주제로 시를 소개한다. 가요와 영화 등 익숙한 콘텐츠를 버무렸다. 소박한 마을에 찾아온 프랑스 여인이 최고의 만찬을 준비하는 영화 '바베트의 만찬'과 함께 김경미의 시 '식사법'을 읽는 식이다. "콩나물처럼 익힌 마음일 것/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을/잘 넘길 것".
그는 요즘 넘쳐 나는 섣부른 위로 대신 "죽을 때까지 밥을 먹듯, 죽기까지 성실하게 사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직언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더 아프니까 오십이다! 인생 원래 아픈 거지만 그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말해 주고 싶었어요."
최근까지 한양대 입학처장을 맡았던 그는 입학설명회에서조차 시 강연을 펼쳤다. 학부모들을 앉혀 놓고 마종하의 '딸을 위한 시'를 들려줬다.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사람들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그는 시를 인용하며 "우리는 양파 뿌리를 관찰하지 않고 전과 보고 외우게 하니까, 공부 잘하는 아이는 만들어도 좋은 아이는 못 만드는 것"이라면서 "관찰은 창의성과 인성을 낳는다는 뜻이라고 풀어 주면 다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인다"고 했다.
남녀와 노소,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기에 '인생'에 대해 쓰기가 쉽진 않았다. 그래서 한 주제를 다른 관점으로 나눠 입체적으로 보여 주려 했다. 가령 '돌봄'을 얘기할 땐 자식과 부모의 입장에서 쓴 시들을 보여 준다. 아픈 부모를 돌봤던 경험을 털어놔 시가 더 애틋하게 읽힌다. "치매인 어머니께 매일 전화로 뽕짝을 불러 드렸어요. 다른 기억은 점점 꺼져 가도 노랫말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으시더라고요." 부모님을 여의고 힘들었을 때 김사인의 시 '공부'가 큰 힘이 됐다고 한다. "'다 공부지요'/라고 말하고 나면/참 좋습니다/어머님 떠나시는 일/남아 배웅하는 일/'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말하고 나면 나는/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