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안중근(1879~1910)은 1910년 3월 26일 아침에 죄수복을 벗었다. 어머니가 보내준 한복을 입고 형장으로 갔다. 봄날이었다. 오전 10시 그는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해방되면 고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110년이 지나도록 유해조차 발굴하지 못했다.

"미래를 바꿔줄 영웅을 기다리면서 정작 오늘 우리를 있게 한 영웅은 잊고 살아갑니다."

10년 넘게 안중근과 함께 달려온 배우가 하는 말이다. 정성화(45)는 2009년 10월 26일(하얼빈 의거일) 뮤지컬 '영웅' 초연부터 지난해까지 300회가량 안중근으로 무대에 올랐다. 뮤지컬 시상식 남우주연상과 티켓 파워 1위 기록을 안겨준 배역이다. 관객의 가슴과 머리에 '안중근'을 배달해온 이 배우의 마라톤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 코스는 뮤지컬 영화 '영웅'. '국제시장'(2014)으로 1426만 관객을 모은 윤제균 감독의 신작이다.

지난 25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정성화는 굉장히 홀쭉해 보였다. "영화 촬영을 준비하면서 10㎏ 이상 감량했다"고 했다. 쌀 10㎏을 들고 집으로 걸어온다고 상상해보라. 그가 뺀 살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올여름 개봉할 뮤지컬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을 연기한 배우 정성화. 그는 “안중근 의사가 영웅으로 기억되는 까닭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서가 아니라 감옥과 법정에서 보여준 의연함 때문”이라며 “코로나 사태로 힘겹지만 우리 국민은 슬기롭게 이겨내고 더 단단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스무 살에 개그맨 합격

1975년생인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홍콩영화(비디오)에 빠졌다. 주인공인 양 착각하며 쌍절곤을 돌렸다. 중국어 대사까지 욀 정도였다. 정성화는 친구들 사이에 '찡숑와'라 불렸다. 주윤발도 좋아해 날마다 밀키스를 마셨단다.

―그러다 개그로 갈아탔군요.

"중학교 시절 소풍 가서 선생님 성대모사를 했는데 반응이 빵빵 터졌어요. 인천 대건고 2학년 때 교내 축제 사회를 보면서 확실히 깨달았죠. 이것이 내가 나아갈 길이구나. 교장 선생님이 예능 장학금까지 만들어주셨어요."

―예능 장학금?

"앞길을 열어주자 생각하신 겁니다. '개그맨이 되려면 연극영화과에 진학해야 한다'며 동문회에 요청해 학원비를 대주셨어요. MTM 연기학원을 다녔지요."

―노래도 잘했나요.

"제가 교회 성가대로 활동했어요. 지금 노래 솜씨의 바탕이에요. '세상의 모든 음악은 찬송가에 다 들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요. 우리 교회에서 베이스를 커버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고요."

―서울예대 연극과 93학번인데.

"대학 가자마자 개그 서클에 들어갔어요. 오디션을 거쳤는데 제가 수석이었습니다. 그 무렵 SBS가 개국해 젊은 개그맨이 많이 필요하다고 신동엽 선배가 알려줬어요. 방송국에서 방청객 바람잡이를 하다 공채에 지원했는데 1학년 때 뽑힌 겁니다. 'X세대 개그맨'이라 불렸지요."

―스무 살에 꿈을 이뤘네요.

"어쩌면 그래서 초년 시절에 망한 거예요. 비트박스를 잘해 1995년쯤 '틴틴파이브'에도 들어갔어요. H.O.T와 동급이었죠(웃음). 홍록기 선배가 독립하면서 빈자리를 제가 채웠어요. 형들 따라서 행사에 가면 100만원을 받았어요. 통장에 돈이 꽂히는 쾌감도 느꼈고 인기에 취했지요. 밤마다 나이트클럽에서 놀았습니다. 몇 개월 만에 참다못한 표인봉 선배가 '틴틴파이브는 너한테 잘 안 맞으니 그만 빠지라'고 했어요. 도피하듯이 입대했지요."

―어디서 복무했나요.

"저는 사실 문선대로 갈 줄 알았는데 도착해보니 강원도 양구 21사단이었어요. 자대에서 처음 본 풍경이 잊히질 않아요. 초병이 야외에서 소변을 보는데 오줌 줄기가 90도로 꺾였어요. 바람이 심하게 부는 험지라서(웃음)."

―취사병이었다고 들었는데.

"요리 솜씨 때문은 아니고 '말을 잘 듣게 생겼다'며 취사병을 시켰어요. '똥국(된장국)'깨나 만들었지요. 1년 뒤에 바라던 문선대로 뽑혀갔는데 군악대로 편성되는 바람에 드럼부터 트롬본까지 악기를 죄다 익혔습니다. 그러다 말년 휴가를 나왔는데 송은이 선배가 '마침 자리가 하나 비었다'며 대학로로 저를 호출했어요. 그게 지금 개그콘서트의 모체가 된 공연이에요."

(사진 오른쪽)배우 정성화가 단지(斷指) 동맹으로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가 없는 안중근 의사와 흡사한 포즈를 취했다.

고생 끝에 발견한 뮤지컬 제대하고 우연히 방송국 PD를 만났는데 '시트콤을 하자'고 했다. 여성 작가 앞에서 개인기를 다 보여줬는데 캐스팅이 됐다. 드라마 '카이스트'(1999)의 송지나였다.

―정만수라는 배역으로 뜨자 CF가 밀려들었지요.

"다시 인기에 대취하고 말았어요. 혈기왕성한 때였고 또 나이트클럽에 갔습니다. 철이 없었던 거예요."

―인기가 영원할 줄 알았나요.

"그때는 그랬어요. 소속사도 없던 시절이에요. 2002년이 되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이 뚝 끊어졌어요. SBS 근처 아파트에 전세로 살던 때였는데 막막했지요. 아끼던 그랜저 자동차도 팔아야 했어요. 1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절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저런.

"지금 생각해보면 정성화를 대체할 만한 배우가 많아진 거예요. 경쟁이 치열할수록 남들보다 유니크(unique)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어요. 1년 내내 집에만 있었는데 급기야 전기마저 끊어졌습니다. 집을 내놓고 인천 본가로 들어올 땐 빈털터리였어요."

―그러다 어떻게 뮤지컬로 건너갔나요.

"어느 날 전화를 받았어요. '너 그렇게 살지 마라'고 했던 표인봉 선배였지요. 표 선배가 대학로에 공연장을 열었는데 연극 '아일랜드'를 할 배우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 2인극을 제작자 설도윤 설앤컴퍼니 대표가 보고 뮤지컬 2004년 '아이 러브 유'에 저를 캐스팅한 겁니다."

―그 공연에서 남경주를 만났다면서요.

"제게는 스승과도 같아요. 남경주 선배가 '성화야, 치약공장 사장은 치약에 대해 많이 아는 게 당연하잖아. 넌 지금 배우인데 연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니?' 묻는데 대답을 못 했어요. 부끄러워서 그제야 연기 공부를 시작했지요. '아이 러브 유'가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어요. 첫 공연이 끝나고 저를 향해 깊은 중저음의 박수가 나오는데 눈물이 막 쏟아졌지요." ―박수는 많이 받아봤을 텐데.

"전에는 여고생들이 꺅~ 하는 소리에만 익숙해져 있었어요. 박수에 우열이 있겠냐마는 중년 관객이 치는 우렁찬 박수를 그날 처음 받은 거예요. 대중의 환호가 오랜만이었고 진심처럼 느껴졌어요. 배우는 참 즐겁고 행복한 직업이구나, 나는 노래와 연기가 어우러질 때 힘을 발휘하나 보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이제야 만났구나…."

뮤지컬 영화 ‘영웅’을 촬영 중인 배우 정성화(왼쪽)와 윤제균 감독.

돈키호테에서 안중근으로

정성화에게는 '아이 러브 유' 이후 점점 더 큰 배역이 주어졌다. 뮤지컬 '올슉업'을 거쳐 '맨 오브 라만차'에서는 당시 최고의 뮤지컬 배우 조승우와 함께 주역(돈키호테)을 나눠 맡았다. 제작자는 당초 산초를 제안했는데 정성화가 대뜸 "돈키호테를 하고 싶다"며 역제안을 했다.

―그때 제작자 표정은?

"눈빛이 흔들렸어요(웃음). 하지만 저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돈키호테는 희극과 비극이 합쳐진 인물이니까. 전부 제 안에 있으니까."

―오디션 준비는 어떻게 했나요.

"공연장 근처에 단기로 방을 빌렸어요. 대본을 치밀하게 분석했습니다. '임파서블 드림(불가능한 꿈)'을 비롯해 삽입곡은 노래방에 가서 연습했지요. 오디션에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제가 뽑혔어요. 주인공 꿈을 이룬 겁니다."

―그다음 뮤지컬인 '영웅'(2009)을 앞두고 뤼순 감옥에 다녀왔지요.

"서예 도구가 남아 있는 독방, 고문 기구들, 교수대 등 안중근 의사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아왔어요. 인물에 다가갈 때 지도로 삼았지요. 배우가 역사적인 인물을 연기할 경우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그때 배웠어요. 간접 경험도 굉장히 중요해요."

―하얼빈역 의거 현장에 다녀온 뒤에는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비효과'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당시 독립운동에 군자금을 보태준 사람들, 그런 마음이 모이고 펄럭여서 안중근이 등장한 거예요. 또 하얼빈 의거가 불을 지펴 독립운동이 더 활활 타올랐고, 마침내 해방돼 오늘의 우리가 있구나…."

―내일이 순국일인데.

"순국일이면 아침에 잠깐이라도 묵념을 해요.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는 사람으로서 그 숭고함은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대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떻게 공포를 이겨냈을까. 창창한 서른한 살이었잖아요. 그 나이에 나이트클럽에서 논 제 과거를 반성하기도 합니다."

―인스타그램을 보니 작년에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갔더군요.

"공연 앞두고 한 번씩 가요. 그곳에 안중근 의사의 큰 동상이 있어요. '영웅'이라는 작품을 향한 책임감과 태도를 만드는 저만의 의식입니다. 힘들 때도 가끔 찾아가는데 정신무장이 돼요."

―혹시 '국뽕'이라는 말 아나요?

"뮤지컬 '영웅'을 할 때 종종 들었어요. 애국심에만 호소한다는 비판이죠. 그렇게 볼 수도 있구나 해요. 생각은 자유니까. 동시에 '안중근 의사가 저렇게 치열하게 살다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애국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도 '영웅'을 국뽕이라고 한다면 뭐 어쩔 수 없지요."

풀코스 마라톤의 출발점에 서다

후반 작업 중인 뮤지컬 영화 '영웅'은 올해 여름 개봉 예정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쓰러뜨린 하얼빈 의거, 당당한 법정 장면과 죽음까지 안중근의 마지막 1년을 그린다. 줄거리며 노래는 원작 뮤지컬과 동일하다. 윤제균 감독은 "영화 '국제시장'이 아버지의 이야기라면 '영웅'은 어머니의 이야기일 수 있다"고 했다. 배우 나문희가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 김고은이 명성황후의 궁녀 설희를 연기한다.

―촬영하다 노래방에 가곤 했다면서요.

"저는 노래방에서는 절대 100점이 안 나와요(웃음). 기본적으로 빵빵 터지는 성량형 배우라서. 노래방은 발표하러 가는 곳이 아니라 즐기러 가는 곳이잖아요. 그랬더니 윤제균 감독님이 농담으로 '아이고, 정성화는 노래가 별로네' 하셨어요. 하하하."

―김고은 노래는 어떤가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제가 쪼그라들 정도로 훌륭해요. 뮤지컬 배우를 해도 충분한 실력자예요. (나문희 선생님은?) 대본 읽으실 때 감독님과 배우, 스태프가 다 울었어요. 공연에서도 어머니가 마지막에 아리아를 부를 땐 관객이 어김없이 훌쩍여요. 그 정서만 잘 전해도 영화는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체중이 많이 줄었는데 장단점이 있나요.

"보기는 좋은데 역시나 체력에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작년 여름에 '영웅' 공연하다 크게 다칠 뻔했어요. 마지막 교수형 장면에 2층 높이에서 '장부가'를 부르다 지쳐 쓰러지는데 다행히 앞에 있는 올가미를 잡았어요. 사형 도구가 저를 살린 셈입니다(웃음)."

―'정성화는 관객을 안중근에게 데려가는 배달부'라고들 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향기를 저를 통해 느낄 수 있다면 영광이죠. 사실 저는 의심과 싸우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뮤지컬을 보지 않는 분들은 저를 개그맨으로 기억할 테니까요. 영화에도 가끔 출연했지만 웃기는 조연이나 악역으로만 소비됐지요. 윤제균 감독님은 저를 반대하는 투자자들을 '정성화보다 이 작품을 잘 아는 배우가 없고 노래 실력은 대체 불가능하다'고 설득하며 밀어붙이셨어요."

―뮤지컬 영화에 대한 편견도 있는데.

"연기와 노래 사이에 이물감이 없어야 해요. 노래가 나오기 전에 감정을 충분히 끌어올려야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1900년대 초 블라디보스토크를 재현할 만한 장소를 찾다가 라트비아까지 가서 촬영했는데, 현장에서 노래를 100%에 가깝게 녹음했어요. 하얼빈 의거 장면은 국내 세트에서 찍었고요."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도 연기했는데, 노래 중에 '브링 힘 홈(Bring him home)'이 있습니다. 안중근은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만.

"당연히 유해를 찾아 모셔와야죠. 그런데 정반대 생각도 들어요. 그 결핍과 미안함이 안중근 의사를 잊지 못하게 하는 포인트 아닐까 하는."

이 배우는 그동안 무대와 스크린에서 40여 인물에 세들어 살았다. "연기 인생에서 안중근이 차지하는 비중이 5할"이라고 했다. 정성화가 정성화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아이 셋을 키우다 보니 걱정이 많아져요. 일감이 뚝 끊어질 수도 있는 직업이잖아요. 코로나 사태 터진 뒤로는 다들 먹고살기 힘드니까 '배우는 그들이 찾는 마지막 사람이 되겠구나'라는 불안도 있어요. 그런 제게 하고 싶은 말은 '평안하자, 침착하자'예요."

음악은 말로 담을 수 없는 것, 그렇다고 침묵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한다. 오늘 우리를 있게 한 영웅을 정성화는 노래로 되살린다. 영화 데뷔는 ‘황산벌’(2003)에서 신라 병사2. 하얼빈역의 안중근 의사로 우뚝 서기까지 인생은 긴 마라톤과 같았다. “영화로는 아직도 신인”이라는 이 배우는 오늘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