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4월 19일, 미국 보스턴의 하늘은 맑았다. 세계 최고 기록을 보유한 핀란드 선수, 직전 대회에서 우승한 그리스 선수 등 8개국 150여 명의 선수가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출발선에 섰다. 아침으로 주먹밥 2개를 먹고 나온 서윤복(당시 24세) 선수는 첫 비행기 여행에 뒤이은 불면증으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감독으로 함께 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은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윤복아, 조국을 위해 뛰어라!" 베를린에서 동메달을 땄던 남승룡(당시 35세)이 페이스메이커로 서윤복을 도왔다.
서윤복은 경기 도중 코스에 뛰어든 개에게 놀라 선두를 뺏기고 운동화 끈이 풀려 고전하면서도 뛰고 또 뛰었다. 2시간 25분 39초. 세계 최고 기록이자 태극 마크를 달고 이룬 첫 국제대회 제패였다. 4월 22일 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전했다. "헐벗은 조선 청년 학도가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 아직껏 독립을 못 찾고 헤매는 조국 조선의 명예를 위하여 천만리 이역에서 적은 몸의 힘과 피를 다하여 '뜀'으로써 세계 제패의 영광을 획득한, 그 무서운 힘은 세계 인류가 조선의 존재를 재인식하기에 족한 세계사적 사실인 것이다." 기사 큰 제목은 '찬연! 민족의 우수성'이었다.
아직 정부도 세워지지 않았을 때였다. 광복 후 좌우 대립의 혼돈, 혼미한 치안, 파탄난 경제, 겨울이면 폭설과 여름이면 장마와 물난리…. 희망이라고는 찾을 길 없던 한국인에게 마라톤은 거의 유일한 민족적 자랑거리였다. 이날 1면 사설 제목은 '민족의 위력'이었다. 사설은 "미국 보스돈 마라손에 서군이 쾌기록으로써 우승했다는 이 사실은 해방 이후 모든 방면으로 혼돈한 가운데 헤매이고 있는 우리에게, 국제문제의 어떤 '암'과 같은 존재로 논의되고 있는 이 조선과 이 민족에게, 커다란 역사적인 쾌심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라고 썼다.
조선일보는 마라톤을 청년들의 기상을 고양시킬 스포츠로 여겨 꾸준히 지원했다. 광복 후 후원한 첫 대회는 1946년 3월 10일 열린 '제1회 전국 중등학교 서울-수원 왕복 역전 경주대회'. 두 도시를 잇는 경수(京水) 가도에 수만 관중이 몰려 20개 학교에서 출전한 200여 명의 젊은 선수를 응원했다. 입상자들에겐 김구와 이승만이 기증한 트로피가 수여됐다. 단순한 운동경기가 아니라 새 나라 건설을 앞둔 거국적 행사의 성격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일보는 "건국정신을 짊어진 젊은 근육의 약동"(3월 11일 자 2면)이라 보도했다.
같은 해 10월 27일에는 서울 태평로~우이동 왕복 15마일 코스의 '제1회 단축 마라톤 대회'를 열었다. 한양공대생 서윤복이 1시간 29분 24초 3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서윤복은 이즈음 국내 각종 마라톤 경기 우승을 휩쓸고 있었다. 보스턴에서 쟁취할 영광의 씨앗은 이때 이미 싹텄다.
보스턴 쾌거 넉 달 뒤인 8월 9일, 조선일보는 '조선마라손보급회'가 주최한 '제1회 손기정 세계 제패 기념 마라손 대회'를 후원하며 국민적 마라톤 열풍을 이어갔다. 서울 태평로 조선일보 사옥 앞을 출발해 오류동을 돌아오는 왕복 42.195㎞ 코스의 정식 마라톤 대회였다. 8월 10일 자 조선일보는 "때마침 내리는 폭우를 무릅쓰고, 이날 선수들의 얼골에는 명년도 '올림픽' 대회서 필승하여 '런던' 하늘 높이 태극기를 휘날리고, 3차 세계 제패를 획득하여 마라손 조선의 관록을 내외에 떨치려는 야망이 충만하며 그 의기와 기백은 자못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고 전했다.
6·25전쟁 때를 빼고는 거의 매년 이어진 조선일보 마라톤 대회는 1970년 '손기정배 쟁탈 조선일보 마라톤 대회'로 이름을 바꿔 풀코스 대회가 됐다. 1991년부터 춘천 의암 호반 국제 공인 코스에서 열리며 '춘천마라톤'으로 불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