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한편의 대하드라마와 같다. 수많은 집념어린 인물들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쟁점을 놓고 격론과 공방이 오간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주인공인 한·일 양국뿐 아니라 심판 격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가 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본격화된 ‘독도 문제’의 역사와 현황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매주 일요일 연재한다. /편집자
[[독도이야기] [1] 그해 여름, ‘독도 수호’의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다 바로가기(bit.ly/2WG6vLQ)]
서울로 돌아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는 조사 결과를 알리는 활동에 들어갔다. 먼저 1947년 9월 2일 국립과학박물관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홍종인·방종현·김원용·석주명 등이 발표를 맡았다. 그리고 11월 10일부터 18일까지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서 전람회가 개최됐다. 울릉도·독도 사진, 동식물·광물 표본, 고고학·민속학 자료 등이 전시됐고 8만5000명이 관람했다. 서울에 이어 부산(11월 30일~12월 4일)과 대구(12월 6일~10일)에서도 전람회가 열렸다.
학술조사대에 참가한 인사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언론인 홍종인, 역사학자 신석호, 국어학자 방종현 등 세 명의 지식인이 두드러졌다.
조선산악회 부회장이자 학술조사대 부대장 홍종인(1903~1998)은 한성일보에 1947년 9월 21일자부터 26일자까지 네 차례에 걸쳐 「울릉도 학술조사대 보고기」를 실었다. 조사대의 임무·편성·일정·사업·결론·보호시책 등을 담은 이 보고서는 “울릉도에서 동남향으로 해상 46해리에 있는 무인도로 그 귀속이 문제되리라고 전해지는 독도 행은 실행 전까지는 외부 발표를 시종 보류하고 있었으나 이는 우리가 당초부터 계획해온 기습적인 여정이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홍종인은 석 달 전까지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을 맡았던 중진 언론인이었다. 당시도 조선일보에서 일하던 그가 다른 신문에 보고기를 실은 것은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 파견이 남조선과도정부의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광복 후 창간된 한성일보는 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이 사장이어서 미군정의 기관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사대의 공식 보고서라고 할 홍종인의 글이 이 신문에 실린 것이었다.
홍종인은 보고기 외에도 독도에 관한 많은 글을 써서 국민의 인식을 높였다. 그는 이듬해인 1948년 6월 17일자 조선일보에 '동해의 내 국토/ 슬프다 유혈의 기록-답사 회고'라는 글을 실었다. 주일 미 공군기(機)가 독도를 연습 폭격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직후였다. 독도 사진이 붙은 이 글은 "내 민족을 사랑한다는 정신은 국토를 사랑한다는 정신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며 "지금도 독도 동편 섬에서는 우리 산악회와 과도정부 조사대가 세운 뚜렷한 푯말이 서 있을 것"이라고 했다.
홍종인은 여러 차례 더 독도를 찾았다. 1952년 9월 17일~28일 한국산악회가 ‘제2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파견했을 때는 단장을 맡았다. 당시 그의 직책은 조선일보 주필이었다. 이번에도 정부 부처들이 총동원돼 후원한 국가적 차원의 조사였다. 하지만 조사대가 독도 부근에 접근했을 때 미 공군기들이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는 바람에 상륙을 포기해야 했다.
한국산악회는 1953년 10월 11일~17일 세 번째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파견했다. 이번에도 단장은 조선일보 주필 홍종인이었다. 조사대는 10월 13일 독도에 도착했지만 날씨가 급변하는 바람에 철수했다. 10월 15일 다시 독도를 찾은 조사대는 하루 밤을 야영하면서 일본이 세워놓은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라는 표목을 뽑아내고 그 전 해에 만들었다가 설치하지 못한 화강암 표석을 세웠다. 표석은 앞면에 ‘독도 獨島 LIANCOURT’, 뒷면에 ‘한국산악회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 Alpine Association’이라고 새겼다. 그리고 처음으로 독도에 대한 측량 작업을 벌였다. 독도의 동도(東島)는 높이 99.4m, 둘레 800m, 면적 5만㎡, 서도(西島)는 높이 174m, 둘레 1㎞, 면적 6만5000㎡였다.
홍종인은 이번에는 조선일보에 1953년 10월 22일자부터 27일자까지 네 차례 ‘독도에 다녀와서’라는 답사기를 연재했다. 그는 또 1956년 7월 고등학교 산악부 학생 197명을 이끌고 독도를 찾은 뒤 8월 22일~30일자 조선일보에 ‘항해 1000마일/ 학도해양훈련기’를 여덟 차례 연재했다. 10월 24일자 조선일보에는 학생해양훈련보고전이 열리는 것을 계기로 ‘울릉도와 독도’라는 칼럼을 실었다.
국사관 관장인 역사학자 신석호(1904~1981)는 한 해 뒤인 1948년 12월 학술지 『사해(史海)』 창간호에 「독도 소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광복 후 독도 문제를 처음 학술적으로 다룬 이 글의 머리말은 “필자는 작년 8월 16일부터 약 2주일간 민정장관 안재홍 선생의 명령을 받고 독도를 실지(實地) 답사한 일이 있으므로 이 일문(一文)을 초(草)하여 독도가 본래 우리나라에 속한 섬이었던 것을 명백히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이어 ‘독도의 지세(地勢)와 산물(産物)’ ‘독도의 명칭’ ‘삼봉도(三峰島)와 독도’ ‘울릉도 소속 문제와 독도’ ‘울릉도 개척과 독도’ ‘일본의 독도 강탈’ ‘일본 영유 이후의 독도’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독도를 역사적·자료적·연구사적으로 고찰했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독도는 (조선시대) 성종 때의 삼봉도와 동일한 섬으로 15세기부터 우리나라의 영토가 됐다
▲ 숙종 때 일본은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승인했으니 그 속도(屬島)인 독도도 조선 영토로 승인한 것이다
▲ 일본이 1905년 독도를 강탈한 후에도 일본 정부 및 준(準)정부기관의 기록과 일본 학자들은 독도를 조선의 속도로 인정했다
▲ 현재 연합군사령부가 그은 맥아더 라인도 독도는 한국 어구(漁區)에 속해 있다
신석호가 이 논문에서 고증하고 주장한 내용은 1950년대 한국과 일본의 독도 분쟁이 발생했을 때 한국 측 논리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저서 『독도 1947』(2010년·돌베개)에서 “신석호의 글은 1947~1948년의 시점에 작성된 독도 영유권 관련 자료·근거의 집대성이었으며, 독도 연구의 시원을 연 기념비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신석호는 고려대 교수로 독도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일본 측 주장을 반박하는 논거로 외교부에 제공했다. 그는 독도 문제가 한일회담에서 중요 의제로 떠오르자 『사상계』 1960년 8월호에 ‘독도의 내력’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조치에 대해 ‘강도행위가 아니면 사기행위’라고 질타했다.
또 하나 울릉도·독도 조사대원이 쓴 중요한 글은 서울대 교수였던 국어학자 방종현이 1947년 『경성대학 예과 신문』 제13호에 실은 「독도의 하루」이다. 그 전해 여름 독도를 찾은 날 쓴 일기였다. 일제시기 조선일보에 근무하며 국어학 관련 논설을 많이 발표했던 그는 당시 함께 일했던 홍종인과의 인연으로 조사대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문제의 독도! 궁금한 독도! 우리는 울릉도를 돌아보기 전에 먼저 독도부터 탐사하기로 했다”로 시작하는 글에서 독도 조사의 전 과정을 실감나게 그렸다.
학술적인 성격이 아닌 이 글이 훗날 큰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독도’라는 이름이 한자어 ‘석도(石島)’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방언 전문가였던 방종현은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는 ‘석(石)’을 ‘독’으로 발음한다며 독도라는 명칭이 ‘독섬’ ‘돌섬’ ‘석도(石島)’와 관련 있을 것으로 보았다. 당시에는 추정이었던 이런 해석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다시 주목받게 됐다. 1900년 10월 반포된 이 칙령은 울릉도의 관할구역을 ‘울릉전도(全島)와 죽도(竹島)·석도(石島)’로 규정했다. 독도가 석도(石島)로도 표기됐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 연구에 평생을 바친 송병기 단국대 교수는 칙령 제41호를 보지 못하고도 이런 추정을 한 방종현의 해석을 ‘탁견(卓見)’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방종현의 해석은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된다. 울릉도에 주민 이주가 재개된1880년대 중반 이전 그 곳을 드나들던 사람의 많은 수는 전라남도 출신이었다. 17세기 말 이래 울릉도를 왕래하며 어업·채취 활동을 하던 그들은 돌이 많은 독도를 ‘독섬’이라고 불렀고, 그것이 ‘독도’ ‘석도’로 표기됐다.
언론인·역사학자·국어학자로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해 독도 탐구와 인식 확산에 앞장선 지식인들이 1947년 8월 첫 독도 조사대에 포함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다음 회에 살펴보는 것처럼 이 무렵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에 키운 막강한 외교 역량을 투입해서 독도를 넘보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