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텍스트 춘추전국 시대. 뉴미디어가 만든 새 운동장으로 암약(暗躍)하던 무림의 고수들이 쏟아진다. 이 세계의 신흥 강자는 자기만의 콘텐츠와 필력으로 무장한 글쟁이들. 박상현(49) ‘코드’ 미디어 디렉터도 그중 하나다.
페이스북 스타로 팬덤이 생겨 전통 매체에서 러브콜 보내는 인기 칼럼니스트가 됐다. 주제는 디지털 미디어·IT인데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엮어내 ‘지식 인플루언서’가 됐다. 미국 뉴저지에서 사는 그를 화상 앱 ‘줌’으로 만났다.
페이스북의 빌 브라이슨
- 요즘 화제의 칼럼니스트로 꼽히는데 얼마나 많이 쓰는지요.
“조선·중앙·세계일보·서울신문 등 일간지 네 곳, 뉴미디어 ‘피렌체의 식탁’ ‘씨로켓 뉴스레터’ 등 총 여섯 군데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간헐적으로 쓰는 원고까지 포함하면 일주일에 대여섯 개 정도 씁니다.” 화상 카메라로 보여준 4월 달력엔 21일간 ‘원고 마감’ 표시가 돼 있었다.
- 직함이 ‘코드 미디어 디렉터’인데 어떤 일인가요.
“ ‘코드’는 디지털 커먼스(저작물 자유 이용) 논의를 위해 결성된 한국 사단법인이에요. 여기서 웹사이트 콘텐츠를 담당하고 있어요. 작년에 미국으로 들어와 지금은 타이틀을 유지하는 정도입니다.”
- 스스로 규정하는 타이틀은 뭔가요.
“라이터(writer). 넓은 의미에서 틀을 넘나들며 글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선 기자도 ‘리포터’ 대신 라이터라고 많이 해요. 한국은 기자, 작가, 소설가 등 ‘라이터’에 대한 정의가 직군별로 돼 있어 의미가 한정돼요. 글 쓰는 것은 업(業)이지 직군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국말로 딱 맞는 단어가 없어 영어를 그대로 쓰자니 담배 라이터하고 헷갈리더라고요(웃음).”
- 생활 기반은 미국인가요.
“1999년 미국에 유학 와서 계속 살다가 2014년 친구가 스타트업을 같이 하자고 제안해 가족은 놔두고 저만 한국에 들어갔어요. 워낙 매체에 관심이 많아 ‘리틀베이클라우드’라는 소셜 뉴스 플랫폼을 만들었는데 한국 미디어 시장을 몰라 고전했어요. 그러다 2016년 강정수(현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 박사와 ‘메디아티’를 시작해 콘텐츠랩장을 맡았어요.” 메디아티는 이재웅 전 쏘카 대표가 출자한 뉴미디어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스타트업에 초기 자금과 멘토링을 제공하는 기업)였다. 뉴닉, 어피티, 긱블 등이 메디아티에서 투자한 뉴미디어 스타트업이다.
- 잡학다식 대명사인 작가 빌 브라이슨처럼 관심 분야가 다양해 보입니다. 전공이 뭔가요.
“학부에선 사회학(고려대), 대학원에선 미술사(위스콘신 매디슨 석사·펜실베이니아 주립대 박사)를 전공했습니다.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논문을 안 쓰고 다른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어요. 관심사가 다양한데 극소수만 읽는 미술사 관련 글을 쓰면서 평생 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몇 년간 미래를 고민하면서 육아에 전념했어요. 지금도 제일 자신 있는 건 글쓰기가 아니라 육아와 설거지예요(웃음).”
- 페이스북으로 이름을 알렸는데 시작한 계기가 있나요.
“2014년 ‘네이버 뉴스레터’에 실리콘밸리 소식을 연재하게 됐어요. 오래간만에 한국말로 글을 쓰자니 영 감이 안 오더군요. 피드백이 필요해 페이스북을 시작했어요. 어떤 식으로 글을 쓰면 사람들이 호응하는지 시험하는 차원이었죠. 초반만 해도 ‘좋아요’가 열 개 정도밖에 안 됐어요. 그래도 하나와 열 개는 다르니 반응을 보면서 글 쓰는 감을 다듬었지요. 당시 동두천 부모님 댁에 머물며 지하철 타고 서울로 출퇴근했는데 그 시간을 보내는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했고요.”
- 하루에도 페이스북에 게시물을 예닐곱 개씩 올리던데요.
“떠오르는 순간 그때그때 바로 써서 올립니다. 그래야 글이 살아있어요. 이거 재밌으니 나중에 써야지 하고 뒀다가 열 시간 뒤에 쓰면 생생함이 싹 빠져 무미건조해지더라고요. 잠자는 6시간, 하루 두 번 산책하는 한두 시간을 제외하곤 책 보거나 기사 읽거나 글을 써요.”
- 페이스북을 많이 하는 이유는?
“ ‘모든 글쟁이는 다 관종’이라고 하던데 맞는 말 같아요(웃음). 글 쓰는 것과 내 글에 대한 반응 보는 것을 좋아해요. 글 쓰는 사람들은 자기를 이해하는 독자가 따로 있어야 합니다. 천재 글쟁이라도 어느 날 갑자기 인기를 끌 수는 없을 거예요. 쭉 관심 가져온 그만의 독자들이 알아주는 거지요.”
2016년 미국 대선 무렵 미국 정치를 다루는 페이스북 채널 ‘워싱턴 업데이트’(현재 팔로어 1만여 명)도 개설했다. 그는 “당시 한국 언론들이 미국 대선 과정을 중계하는데 한국 정치 틀에 대입해 미국 정치를 보니 전혀 다르게 해석돼 전달되더라. 그게 아쉬워 채널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 실험을 해보니 내가 만족하는 글과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이 다르던가요.
“한국 독자와 주파수 딱 맞는 글이 있어요. 선한 사람이 선한 일을 해서 인정받은 감동 스토리를 좋아해요. 최근 코로나 감염증이 퍼져 승조원 하선을 요청하는 편지를 상부에 보냈다가 경질된 브렛 크로지어 전 루스벨트함 함장 얘기를 썼는데 딱 그런 경우였어요.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개인적으로는 감동 휴먼 스토리보다 소름 끼칠 정도로 분석적인 글을 보면 짜릿해요. 싫어하는 글은 감동을 주려고 포장한 글이고요.”
- 음식에 비유하자면 어떤 글을 지향하나요.
“매일 먹는 빵처럼 담담한 글, 자극적이지 않아 나한테 잘 맞는데 새로운 맛이 조금씩 느껴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이 사람 글을 읽으면 항상 이 정도 수준의 이런 맛이 나오는데 그게 싫지 않다는 느낌이랄까요.”
책은 땔감, 불이 내 것 돼야
- 미디어를 전공하지 않았는데 여느 미디어 학자보다 더 왕성하게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신문을 손에 달고 살았어요. 유학 와서 미국 신문을 읽으니 처음엔 너무 안 읽히더군요. 대학원 때 학생증을 보여 주면 공짜로 신문을 주는 프로그램이 있어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을 갖고 와서 매일 읽었어요. 처음엔 하루에 한두 개 읽기도 벅찼는데 2~3년 시간을 들이니 행간이 읽히기 시작했어요.”
- 다양하게 지식을 섭취하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아내(브라운대 뇌과학 전공 교수)와 유학 시절 미국 교수를 많이 만났는데 관심 폭이 매우 넓었어요. 이유가 뭘까 보니 ‘살아있는 호기심’이었어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으면 ‘그게 뭔데?’ 하면서 초등학생처럼 질문해요. 대개 한국 교수는 ‘내 생각엔 이런 거야’라며 진단부터 하죠. 이미 짜놓은 틀로 세상을 재단하기 때문에 새로운 게 들어가기가 어려워요.”
- 책도 주요 지식 공급원인가요.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를 줄 팍팍 치며 재밌게 읽었다는 사람에게 ‘가장 흥미로운 주장이 뭐였느냐’고 물어보면 말문 막힐 때가 많아요. 책 한 권 뗐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통찰을 얻어 생각을 확장하는 게 독서의 핵심입니다. 책은 불(생각)을 지피는 땔감일 뿐, 불이 내 것이 돼야 합니다.”
- 운영하는 페이스북이 종종 외신 바이럴(입소문) 창구가 되던데요. 외신은 어떻게 팔로하나요.
“NPR(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을 애청하다 보니 한국과 미국의 여론 형성 과정 차이가 눈에 보였어요. 한국은 메이저 매체에서 터뜨리면 전국적 이슈가 되는데 미국은 뉴요커, 애틀랜틱 등 잡지 기사도 의미 있으면 담당 기자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바이럴이 될 때가 많았어요. 잡고 있어야 할 ‘뉴스의 길목’이 보이더군요.” 매일 읽는 매체는 뉴욕타임스·월스트리트저널· NPR·레딧(reddit)이고, 일주일에 한두 번 MIT 테크 리뷰와 유명 테크 블로거들의 글을 읽는다.
해외 거주 글쟁이들의 진격
- 글 쓸 때 유념하는 게 있다면.
“선수(그 분야 전문가)들에게 욕먹지 않기. 처음에 IT 관련 글을 쓰려니 비전문가라고 공격받으면 어쩌나 걱정이 됐어요. 그런데 미국 유명 테크 전문가 중 비전공자지만 5~10년 꾸준히 쓰며 실력 인정받은 사람이 많더군요. 용기를 얻어 시작했는데 적어도 틀린 부분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칼럼당 10~20가지 자료를 기반으로 합니다.”
- ‘아날로그의 반격’ ‘생각을 빼앗긴 세계’ 등을 번역했고, 영어 관련 글도 많이 씁니다. 영어가 유창한가 봅니다.
“카투사로 군 복무하면서 듣기는 어느 정도 해결했어요. 1998년 유학 가려다 IMF 외환 위기가 터져 용선(傭船) 회사에서 1년 일하면서 해외에 연락할 일이 많아 영어가 좀 늘었어요. 유학은 다른 차원이더군요. 미술사가 그림 보는 게 아니라 책 보는 학문이라고 해요. 2~3년 무지 고생하면서 영어를 터득했습니다.”
- 요즘 소셜미디어에서 해외에 거주하는 글쟁이들의 활약이 눈에 띕니다. 이유가 뭘까요.
“해외에 내공 있는 고수가 많은데 외국어로 표현하기엔 매우 높은 수준의 언어 능력이 필요해 한계가 있어요. SNS 덕에 물리적, 시간적 장벽이 사라지니 이분들이 한국어로 맘껏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게 됐어요. 현지에서 빨리 접한 콘텐츠에 배경 지식과 맥락까지 더해 설명합니다. ‘맥락까지 번역해 주는 통역가’인 셈이죠. 이들이 한국 콘텐츠를 더 풍성하게 해주고 미디어의 경계를 지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비전공의 힘, 깍두기 정신
- 2014년 언론계 화제였던 ‘뉴욕타임스 혁신 보고서’를 번역했다고요?
“당시 뉴욕타임스가 내부용으로 만든 보고서가 유출됐어요. 한국에서도 언론진흥재단과 기자들이 입수했는데 영문 100~200페이지로 양이 많았어요. 언론재단 요청으로 유학 시절 알고 지낸 조영신(SK브로드밴드 성장전략그룹장) 박사와 제가 번역했어요. 그때 기자들도 많이 알게 됐어요.”
- 언론계 디지털 전환의 바이블이 된 보고서였습니다. 번역할 때 보니 어떻던가요.
"내용을 보니 참담했습니다. 곧 망하는 거 아닐까 싶더군요. 그래도 뉴욕타임스 같은 곳에서 치부를 모두 드러내놓고 논의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어요. 보고서 내용을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후 대응책으로 내놓은 것들을 하나씩 도입하더군요. 감동적이었어요." - 예를 들면.
“ ‘디지털화에선 개발자가 중요한데 뉴욕타임스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일 잘하는 개발자는 실리콘밸리를 선택한다. 뉴욕타임스 경영진은 기자 출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에 가면 주인공 대접받는 개발자가 여기서 보조 일을 하고 싶겠냐’는 지적이 나왔어요. 내부 개발자를 임원으로 올려야 한다는 안이 나왔고 실행했어요. 다른 개발자를 스카우트할 때 ‘너의 미래가 저기 있다’고 보여준 거죠. 그런데 뉴욕타임스는 온라인 변화 이전 지면에서 변화가 있었어요.”
- 어떤 변화인지요.
“2016년 ‘비욘드 뉴스’ 저자인 미첼 스티븐스 뉴욕대 언론학과 교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그날 뉴욕타임스 1면 톱이 테러 단체 ‘IS(이슬람 국가)’를 분석한 기사였는데 교수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빡빡한 스트레이트 기사로 1면을 채우던 뉴욕타임스에선 상상도 할 수 없던 시도라더군요. 그러면서 기자의 의견을 담은 분석 기사를 허용하기까지 뉴욕타임스 내부에서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고 했어요. 그 전만 해도 분석은 외부 전문가에게 맡기고 기자가 기사에서 ‘나(I)’를 드러내지 않는 게 원칙이었지만, 독자들이 기자의 목소리가 살아 있는 글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지면 연성화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 한국 미디어 환경도 급변해요. 기성 언론에 대한 비판도 많고요.
“분명히 비난받을 기자도 있지만, 한국 기자들이 지나치게 욕을 먹는다고 생각해요. 아는 기자 하나는 기사 때문에 특정 정파에서 너무 심하게 공격해 정신과 상담을 받고 일도 관뒀어요. 제가 지금 뉴욕 페이스(Pace)대 방문연구원으로 있는데 연구 주제가 이 내용입니다.”
-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근 휘트니 필립스 시러큐스대 교수 논문집 ‘미디어는 어떻게 허위 정보에 속았는가’를 번역했는데 소셜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심리적으로 위협에 시달리는 기자가 많아졌다는 내용이 있어요. 매체들이 기자에게 소셜미디어 전면에 나서 자기 기사를 팔라고 등 떠밀면서 문제가 생기면 기자만 피뢰침이 돼 고스란히 벼락을 맞는다는 거죠. 엄연한 산재(産災)라고 봐요. 미국에선 심리 치료 등 기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어요.”
- 언론사에서 일한 적이 없는데 내부 사정을 어떻게 잘 압니까.
“보고서를 번역하고 메디아티를 하며 언론계 사람을 많이 알게 됐어요. 전 특정 매체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없어요. ‘깍두기’ 포지션이랄까(웃음). 그러니 기자들이 흉금 터놓고 내부 얘기를 해줍니다. ‘깍두기 정신’이 미디어뿐만 아니라 테크 등 여러 분야 얘기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힘이 됐지요.”
- 미디어, 텍스트, 콘텐츠. 당신의 삶을 움직이는 삼박자 같습니다. 각각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밥 외에 살기 위해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게 있다면 콘텐츠예요. 죽으면 뭐가 아쉬울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앞으로 나올 무수한 콘텐츠를 소비하지 못하는 거였어요. 텍스트는 그중 가장 재밌어하는 콘텐츠이고, 미디어는 콘텐츠를 공급하는 중요한 파이프라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