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본사를 둔 주성엔지니어링은 연구개발(R&D)과 기술 독립에 목숨 거는 중견기업이다. 1993년 창업한 이 회사는 매년 총매출액의 15~20%를 R&D에 쓰고 있다. 중국 업체 부도로 돈을 못받아 1100억원의 순손실을 낸 2012년에는 그해 매출의 71%인 565억원을 R&D에 쏟아부었다.
또 전체 임직원(약 450명) 가운데 약67%가 R&D 인력이다. 이는 중국 최고 기술 기업인 화웨이(華爲·49%)보다 더 높다. 우리 산업계에서 기술개발에 이처럼 전력투구하는 곳은 거의 없다. 지난달 29일에는 경제5단체 고위임원들을 초청해 경기 용인시 기흥구에 신축 R&D센터 개관 행사를 가졌다.
반원익 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은 “회사 자기자본의 48%에 해당하는 1200억원을 들여 동종업계 세계 최고 수준의 R&D센터를 지은 주성엔지니어링을 격려하기 위해 경제 5단체 상근부회장들이 모두 참석했다”고 말했다.
◇주성엔지니어링 총인력 대비 R&D 인력 비율과 특허 건수
20년간 대형 태극기 게양…'기술독립'결의 다져
18개의 세계 최초 기술과 2162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주성엔지니어링을 이달 15일 찾아갔다. 본사 정문을 들어서자 건물 외벽에 가로 18m, 세로 13m짜리 대형 태극기(太極旗)가 눈에 들어왔다. 대형 태극기는 용인 R&D센터 실내 벽에도 부착돼 있다. 창업자인 황철주(61) 회장을 만났다.
-국내 기업 가운데 이렇게 큰 태극기를 단 곳은 처음 본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2001년 들어 경영이 극도로 힘든 상황에서 마음을 다잡고 '대한민국 국가대표'라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임직원들에게 불어넣기 위해 마련했다. 사업하면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미국의 주유소 등에 나부끼는 대형 성조기(星條旗)를 본 적이 있는데 나도 어려움을 겪으면서 태극기가 떠올랐다. 20년 내내 하루도 빼놓지 않고 걸어놓고 있다"고 했다.
창업 때처럼 매일 R&D 진두지휘
회사 보유 특허 가운데 상당수를 직접 개발한 황 회장은 지금도 매일 오전 7시 전에 출근, 7시30분에 기술회의를 주재하고 연구소를 돌며 나사 하나까지 챙긴다.
-기술에 왜 이렇게 매달리는가?
"우리나라의 비중은 세계 면적에서 0.07%, 세계 인구에서 0.7% 남짓하다. 다시말해 우리는 세계 무대에서 자원 대국(大國), 시장 대국, 기술 강국과 싸워 이기는 만큼 성장하는 나라이다. 자원과 시장은 키울 수 없지만 기술은 노력에 따라 강해질 수 있다."
1985년 현대전자에 엔지니어로 입사한 그는 이후 7년간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다가 회사를 차려 국내 최초로 반도체 전공정 장비 개발에 성공해 해외에 수출했다.
-오너가 직접 R&D할 필요까지 있을까.
"혁신은 오너(owner)만이 할 수 있다. 개선과 모방은 종업원도 할 수 있지만 '리스크'(risk)와 '속도', '시간'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오너 한 사람만 가능하다. 주말에도 대부분 회사에 나와 일을 한다."
-사원 3명 중 2명이 연구개발자인데, 채용 기준이 있다면.
"우리는 경력은 뽑지 않고 신입사원만 뽑는다. 출신 대학 같은 스펙도 안 본다. '모방'이 아닌 '혁신'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스펙 좋은 사람은 리스크 지는 걸 두려워해 혁신에 적합하지 않다. 바른 정신을 가진 젊은이를 '혁신 인재'로 키운다."
주성엔지니어링 건물 벽면과 복도 바닥에는 ‘고정관념과 기득권은 출입 금지’ ‘신입사원을 과장 처럼!’ ‘Speed is everything’ 같은 구호가 붙어있다. 기흥R&D센터 회의실에는 ‘전쟁에 지면 노예가 되고 경쟁에 지면 거지가 된다’는 섬뜩한 문구도 있다.
◇주성엔지니어링 경영실적
l 단위 : 억원, %(영업이익률)
l 자료 : 주성엔지니어링
‘학벌’ 아닌 ‘정신의 경쟁력’이 승패 좌우
-문구를 왜 많이 붙여놓고 있나?
"몰입과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일이 없으면 1~2개월 출근 안해도 되고 매주 3일 근무해도 된다. 자유롭게 근무 방식을 택할 수 있다. 또 매일 점심시간(12~14시)에는 회사 전원을 두시간동안 아예 끈다. 하지만 일을 할때는 졸거나 게으름 피우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올 2월 중순부터 주성엔지니어링은 회장부터 말단 사원까지 모두 회사 안에서 연한 갈색의 유니폼 상하의와 신발을 착용하고 생활한다. “업무에 완전 몰입을 위해서”라고 한다.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집중·몰입 R&D'를 잘 할까?
"빈국(貧國)이 개발도상국이 되는데는 '헝그리 정신'만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개도국에서 선진국이 되는 건 차원이 다르다. 지금은 빛의 속도로 지식과 기술·정보·통계가 공유된다. 때문에 이제는 '지식' 경쟁력 보다 '정신'의 경쟁력이 승패를 좌우한다."
황 회장은 “리더의 역할은 직원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제대로 된 ‘정신’을 심어주는 것, 즉 의식을 바꾸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전쟁에 지면 노예가 되고, 경쟁에서 지면 거지가 된다”
-'코로나 19'와 중국의 추격으로 산업계에 위기감이 높은데.
"자원이 없고 가진 게 별로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큰 위기나 급변(急變)이 오히려 더 유리하다. 기존 질서와 기득권이 무너지고 바뀌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리더만 있다면 위기를 더 큰 기회로 만들 수 있다."
반도체 D램 제조의 핵심인 캐패서터(capacitor) 전용 화학기상증착기(CVD)와 반도체원자층증착기(ALD) 장비 등을 세계 최초로 개발·양산한 주성엔지니어링은 지난해 일본의 수입제한 조치도 이겨내고 견조한 실적을 냈다. ‘기술 독립의 성과이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부문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최근 화웨이나 대만 TSMC 사례에서 보듯, 기업 경쟁력은 한 나라의 생존을 좌우한다. 탈세계화 시대에 시장에만 방치할 게 아니라 강력한 리더십으로 '산학연(産學硏) 협력'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또 대기업, 중견, 중소기업이 참여하는 분업적 협력 방식도 고려해 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