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풍구 하나 제대로 없는 빌딩 속의 다락방. 서울 청계천 일대의 평화·동화·통일상가 등 피복 제조 작업장 근로 조건 개선에 앞장섰던 종업원 전태일씨의 분신자살 사건은 당국의 무성의와 업주들의 무자비한 횡포를 고발했다. 이 사건은 결코 한 종업원의 무모한 죽음으로만 끝날 것 같지 않다."
1970년 11월 22일 자 주간조선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이상현이 쓴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남기게 될 '전태일 일기장'을 세상에 알린 단독 보도였다.
11월 13일 오후, 서울 을지로 6가 평화시장 앞길에서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이 분신(焚身)했다. 한 해 약 60만명이 이농해 도시 빈민이 되고, 그중 상당수가 섬유·전기 등 노동 집약적 수출 산업에 취업해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던 때였다. 고도성장의 그늘을 보여준 그의 죽음은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일기장은 청색 비닐 표지의 대학 노트 300여 쪽 분량. 전태일의 글은 깍듯하고 논리 정연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배우지 못하고 가족을 부양하려 공장 일을 하게 됐지만, 누구보다 어린 여공들을 안타까워했고 법전에 적힌 권리가 무시되는 현실을 슬퍼했다. 고향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엔 이렇게 썼다. "공장에는 어린아이들이 30명쯤 있네. 겨우 열네 살 된 아이가 힘겨운 작업량을 제 시간에 해내지 못해 꾸중을 듣고, 한창 재롱을 떨 나이에 매질을 당하고 있네."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 글도 있었다. "저희는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종업원 2만여 명의 90% 이상이 평균 18세 여성입니다. 숙련 여공들은 햇빛을 보지 못해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가 많습니다. 하루 15시간의 작업은 너무 과중합니다. 15세의 어린 보조공들은 1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저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해 주십시오."
조선일보도 전태일의 죽음 뒤 노동청의 후속 조치, 우여곡절 끝에 열린 장례식, 대학생들의 동조 단식 농성 등을 지면에 꾸준히 추적 보도했다. 같은 달 17일 자 사설엔 "한 청년 직공이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참화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격보다도 더 아프고 짙은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고 썼다. 20일 자 사회면 머리기사 '이름뿐인 근로감독관'을 통해선 "전태일 군의 분신자살까지 일으킨 평화시장의 경우 실질적인 근로 환경은 한 번도 조사하지 않았고, 매년 해야 하는 종업원 건강진단도 실제론 없이 본청에만 마친 것처럼 허위 보고했다"고 폭로했다.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이후 아들의 뜻을 따라 노동운동가들을 자식처럼 보살피며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불렸다. 조선일보 2008년 12월 13일 자에는 팔순의 이소선 여사 인터뷰가 실렸다. "태일이가 죽고 나서야 어린 노동자들이 얼마나 참혹한 환경에서 일하는지 알게 됐지. …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날이 오는 걸 보려고 싸우다가 39년이 지난 거야."
전태일의 죽음과 그가 남긴 일기장은 한국 사회가 노동 문제를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이상현은 훗날 "일기장이 대서특필로 전격 공개되자 정부와 세상은 침묵했고, 평화시장 일대에서 대대적 개선 조치가 단행됐다. 청년 전태일의 죽음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