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영화판은 메이저리그에서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같은 강팀들이 경쟁하면서 우승을 주고받는 그런 게임이 더 이상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디즈니 하나밖에 없어요.” 어느 할리우드 영화감독의 말이다. 언뜻 과장처럼 들리지만 미국 영화계에서 이 전망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10여 년 전만 해도 내놓는 작품들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며 시장에서 고전하던 신세였던 월트 디즈니가 이제는 할리우드의 ‘원톱’이 되어 미래의 영화산업을 바꿔놓을 공룡으로 탈바꿈했다.

대형 인수·합병으로 몸집 불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영화업계의 지각 변동과 이를 일찍부터 내다보고 차근차근 준비해온 디즈니의 전 CEO 로버트 아이거의 장기적인 포석이었다. 2005년 CEO 자리에 올라 올해 초 물러날 때까지 아이거의 임기는 대형 인수·합병의 연속이었다. 2006년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사들이는 것을 시작으로, 2009년에는 수퍼히어로 프랜차이즈를 소유한 마블을 인수했고, 2012년에는 스타워즈와 인디애나 존스 등을 가진 루커스필름을, 그리고 2019년에는 21세기폭스를 사들이면서 할리우드 사상 최대의 인수 기록을 남겼다.

처음에는 디즈니의 몸집 키우기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영화 제작사들이 합병할 경우 필연적으로 인력 감축이 뒤따르게 될 뿐 아니라, 시장 지배력이 커지면서 작은 스튜디오의 저예산 영화들이 스크린을 찾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거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21세기폭스의 인수의 경우 성공 가능성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거의 필사적으로 뛰어들었다. 스트리밍 시장에서의 대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TV, 비디오카세트, DVD 등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생존을 위협받아왔지만 잘 버텨냈다. 넷플릭스와 같은 디지털 스트리밍이 대세로 등극한 후에도 극장은 (적어도 팬데믹 전까지는) 건재했다. 하지만 스트리밍을 보는 영화 제작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영화관을 통해 영화를 배급할 경우 수익금은 영화관과 제작사가 50대50으로 나눠 가져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영화를 배급하면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과 인력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작사는 수익의 70% 이상도 가져갈 수 있다.

스트리밍용 영화로 수익 극대화

박상현 코드 미디어 디렉터

디즈니로서는 이런 좋은 시장을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 기업들이 장악하게 놔둘 수는 없는 일. 아이거의 지휘하에 10년 넘게 인수·합병을 통해 거대한 콘텐츠 무기고를 만든 디즈니는 작년 11월에 미국에서 '디즈니플러스'라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선보였다. 이 서비스는 출시와 함께 가입자가 대거 몰리면서 3개월 만에 2600만 가입자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경쟁자이자 업계 1위인 넷플릭스가 도달하는 데 5년이 걸린 숫자다. 특히 올해에 들어서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사람들이 집에만 갇혀 있게 된 상황도 호재로 작용, 승승장구 중이다.

하지만 디즈니플러스의 성공은 단순한 숫자의 의미를 넘어, 영화업계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이유는 이렇다. 디즈니가 마블의 대작 히어로물을 내놓기 위해서는 약 1억5000만달러의 제작비와 1억달러의 마케팅 비용이 들어간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영화가 히트를 해서 10억달러의 매출을 내도 극장이 절반을 떼어가고 각종 비용을 제하면 순수하게 제작사가 가져가는 돈은 1억달러가 조금 넘는 금액이다.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영화의 특성을 생각하면 매번 불안한 투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스트리밍용 영화의 경우 에피소드당 제작비는 10분의 1에 불과하니, 6편을 만들어도 1억달러 안쪽으로 고급 시리즈를 만들 수 있다. 게다가 배급도 서비스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하니 마케팅 비용도 훨씬 적게 든다. 더 중요한 건 가입자들을 붙들어 두기만 하면 고정수입이 보장된다는 사실. 따라서 디즈니플러스가 1억 가입자를 확보하면 매년 50억달러의 매출을 내면서도 극장들과 나눠 갖지 않아도 된다. 즉, 디즈니로서는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여러 편의 대작 영화에 도박하는 대신 소수의 극장용 블록버스터에 집중하고, 그보다 작은 작품들은 스트리밍으로 공개하기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된다.

아마존 등 거대 테크기업과의 대결

이것이 할리우드에서 전망하는 영화산업의 미래다. 이미 미국 시장의 40%를 장악한 디즈니가 이런 전략을 사용하기로 하면 다른 영화사들은 디즈니와의 블록버스터 경쟁을 더욱 꺼릴 것이고, 결국 디즈니가 황금 시즌의 스크린을 독차지한 후에 남는 스크린 일정을 찾아 중소 규모의 영화로 연명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얘기다. 디즈니는 작년에 21세기폭스를 인수한 후 2027년까지의 영화 제작 일정을 공개했다. 이런 영화들을 이 시즌에 개봉할 테니 극장들은 알아서 스크린을 비워두라는, 원톱의 '플렉스'인 셈이다.

하지만 디즈니의 이러한 몸집 키우기는 한편으로는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같은 거대 테크기업들이 뛰어들고 있는 영화 콘텐츠 시장을 지키려는 할리우드 맏형 디즈니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넷플릭스는 천문학적인 수준의 콘텐츠 제작비를 쏟아붓고 있고, 아마존은 팬데믹으로 파산 위기에 처한 미국 최대 멀티플렉스 체인 AMC를 인수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룡 기업들의 대결이 본격화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거대한 할리우드도 그저 작고 소박했던 옛날의 기억으로 남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