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자랑이며 긍지의 근원이던 월전 장우성이 친일 화가로 매도당한다는 소식에 공분을 누를 길 없다.”
동양화가 월전 장우성(1912~2005)을 기리는 월전미술문화재단과 종친회(단양 장씨 제학공파)가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탄원서와 진정서를 작성해 문체부·문화재청 등에 발송한 것으로 9일 확인됐다. 월전이 그려 충남 아산 현충사에 봉안된 충무공 이순신 영정이 그의 친일(親日) 행적 논란으로 철거 위기에 처하자 반박에 나선 것이다. 월전의 맏딸 장정란(74)씨는 이날 본지 통화에서 “논란을 종식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
◇유관순 이어 충무공 영정 논란… 왜?
논쟁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최근 ‘표준영정 1호’ 충무공 영정에 대해 지정 철회 심사 논의를 진행하면서 불거졌다. 월전은 전통과 현대적 조형기법을 적용해 ‘신(新)문인화’를 구축하며 일본화풍의 극복을 이끌었던 한국화의 대가다. 특히 충무공을 포함 강감찬·유관순·윤봉길 등 표준영정 7점을 그렸다. 100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충무공도 월전의 그림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관제 성격의 ‘조선미술전람회’와 ‘반도총후미술전’에 출품했다는 이유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 발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면서 논란의 복판에 섰다. 이후 “친일 화가가 그린 충무공 그림은 옳지 않다”며 지속적인 표준영정 해제 요구가 있었지만, 문체부는 사회 갈등 우려를 들어 반려해왔다.
그러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김영주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다시 들고나오자 검토에 착수했다. 문체부는 “이달 중 영정동상심의위원회를 소집해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불씨는 화폐로도 옮겨붙을 전망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문체부 결정에 따라 후속 조치에 들어갈 예정”이라며 “표준영정에서 해제되면 올해 새 도안을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월전이 그린 유관순 영정은 같은 이유로 노무현 정권 시절이던 2007년 표준영정 자격을 박탈당했다.
◇월전 종친회 “친일 매도에 공분”
친일 행적의 근거로는 월전이 조선총독부 주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4회 연속 특선해 추천 화가가 됐고, 일제의 관제 성격이 강했던 ‘반도총후미술전’에도 출품했다는 사실이 거론된다. 월전 측은 진정서를 통해 “‘선전’은 당시 조선의 모든 미술학도는 물론 일본인들도 화가의 길로 입문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반도총후미술전’ 출품 통지를 받고… (중략) 고심 끝에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불교 그림을 그리고 그 또한 비에 젖어 출품하지 못하게 되자 기뻤다고 자주 자손들에게 피력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월전의 출품작은 남아 있지 않다.
월전 측은 또, 해방 직후 조직된 조선미술건설본부 위원으로 월전이 활동했다는 사실을 반박 자료로 제시했다. “화가 오지호가 1946년 ‘해방 이후 미술계 총관’에서 언급한 대로 조선미술건설본부는 친일파를 배제하되 조선의 전 미술인을 망라했다”며 “일제에서 해방되던 바로 그 해보다 확실히 친일 행적을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때가 또 있겠는가”라고 했다. “친일 문제 연구자 임종국이 쓴 ‘황국신민화 시절의 미술계’(1983)에도 친일 미술가 명단에 장우성은 없다”고도 했다.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임종국의 유지를 이어 설립된 단체다.
◇“친일 기준에 대한 숙의 필요”
미술계에서는 정치적 휩쓸림 대신 충분한 숙의가 필요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지낸 정준모 큐레이터는 “일제하 공모전에 작품을 냈다고 친일파로 분류한다면 이를 피해갈 수 있는 화가가 거의 없을 것”이라며 “경중에 대한 고려 없이 단죄하려는 식으로 접근하면 곤란하다”고 했다. 한예종 미술원 조인수 교수는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난 만큼 화가의 생애 전반을 고려해 공과(功過)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복식 오류 논란도 남아 있다. 문화재청이 두 차례 진행한 전문가 자문회의에서 “영정 속 의복은 빨강이 아닌 검정(흑단령)이어야 하며 장신구 역시 당시 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월전 측은 “전란으로 극도의 혼란을 겪던 당대 복식의 정확한 고증 전달은 어렵고 해당 영정은 월전이 6·25전쟁 당시 충무공 종손 댁과 현충사 등을 답사해가며 심혈을 기울인 그림”이라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