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기타와 청바지(블루진), 생맥주(통·블·생). 1970년대 유신 체제 아래 청년들은 유행에 탐닉했다. 고고춤과 장발, 미니스커트가 인기를 누렸다. 식민지와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20대는 풍요를 즐기기 시작했다. 지식인들은 '신세대'의 출현을 주목했다. 교수·문학평론가 등 지식인 사회는 물론 '청년문화' 기수로 꼽히던 통기타 가수까지 뛰어들어 청년문화 논쟁을 펼쳤다.
조선일보가 논쟁의 마당을 펼쳤다. 한완상 서울대 교수가 1973년 말 펴낸 '현대사회와 청년문화'가 도화선이 됐다. 한 교수는 "한국 청년들에겐 정당함과 부당함을 판별해주는 규범이 없으며 따라서 건전한 청년문화도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논지를 폈다. 전병재 연세대 교수의 반박이 1974년 4월 30일 자 본지 문화면에 실렸다. "근거가 분명치 않은 주장이다. 대학생 전체를 비판 의식도 주체성도 없는 층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한 교수의 반박이 이어졌다. '과연 블루진, 팝송, 통기타를 한국의 청년문화로 볼 수 있는가.'(5월 2일 자) 그는 '저질적인 대중문화와 비판과 해학에 찬 서민문화와는 구별해야 한다'면서 '청년문화로서의 대학 문화는 서민문화와 밀접히 연결되어야 한다'고 썼다. 한 교수는 청년문화를 젊은 인텔리겐치아가 주도하는 대항문화로 정의했다.
◇"통기타 청바지는 주류 문화가 아니다"
서울대·연세대·서강대·숙명여대 학보사 편집장·취재부장들이 나선 좌담 '통기타·청바지가 기수는 될 수 없다'(5월 14일 자)에선 생생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매스컴이 통기타, 생맥주, 청바지 같은 것을 젊은이들의 주류 문화처럼 소개해 놓고 반성하라고 하는데, 그런 젊은이는 소수에 불과하다'는가 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구속을 싫어한다. 기타도 청바지도 구속이 없는 악기와 옷인데 이런 것들의 유행은 억눌림에서 벗어나려는 젊은이들의 자연스러운 경향'이라며 문화라기보다 유행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론가·작가·교수까지 가세
청년문화 논쟁은 사회로 번졌다. 서울 YMCA 시민논단이 논쟁을 이어갔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청바지와 통기타 등은 생활양식의 공통성이자 청년들의 동질성 표현"이라며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반항, 물질주의·기계주의·상업주의에 대한 반항 의지의 표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가 조해일은 신랄했다. "청년문화 자체가 우리의 자생된 실체를 가지지 못한 채 외래 사조에 휩쓸린 유령 놀음에 불과하다"(이상 6월 4일 자)고 비판했다.
◇양희은의 일갈, "웃기지 마라"
통기타 가수 대표 격이던 양희은이 피날레를 장식했다. 스물두 살 양희은은 본지에 이렇게 썼다. '청바지와 통기타가 잘못된 청년문화의 상징인 것처럼 온통 잡아먹을 듯이 온 매스컴이 떠들어댔다. 난 참 화가 났다. '웃기지 말라.' 청년인, 청바지 통기타 가수인 나의 대답이다.'(9월 29일 자)
양희은은 "내 노래는 우리들의 노래, 우리 젊은이의 노래이며 … 모든 사람의 마음에 젖어들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합창할 수 있는 노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청바지와 통기타 가수인 젊은 나의 바람"이라고 마무리했다. 유신 체제는 청년문화를 '퇴폐적이며 불온한 국적 불명의 외래 풍조'라고 낙인찍었다. 장발 단속, 금지곡 남발로 사회는 우중충해졌다. 긴급 조치는 대학생을 억눌렀다. 이래저래 청년문화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