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자들 다 어디 있나? 급히 좀 모여주게."

1973년 9월 7일 새벽 조선일보 편집국에 주필 선우휘(

鮮于煇

·1922~1986)가 나타났다. 원고지를 손에 든 채였다. "윤전기 세우게!"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주필로서의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 어떤 위협에도, 누구의 간섭에도 굴하지 않겠다." 신문 사설을 자신이 써온 새 원고로 바꾸라는 지시였다.

1978년 박태준(왼쪽) 포항제철 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포철 제3고로 현장을 취재하는 선우휘(가운데) 주필. 직설적인 글로 지식인들의 공감을 얻은 그는 자유분방하고 천진한 성품으로도 유명했다.

사설은 한 달 전에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일본에서 실종된 정치인 김대중이 닷새 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에 귀가했고 중앙정보부가 납치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언론은 사건을 거론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선우휘가 써서 새벽에 넣은 사설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이번 사건이 불투명하게 처리되어서는 안 될 것" "국민은 당국에 사건의 조속하고 떳떳한 해결을 촉구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날이 밝자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중앙정보부가 총동원돼 신문을 회수했지만 읽을 사람들은 다 읽은 뒤였다. 사장 방우영의 책상에 봉투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선우휘의 사직서였다. '국가의 체면과 조선일보의 명예를 위하여 독단전행(獨斷專行·혼자 결정해 마음대로 행동함)한 소생을 용서해 주십시오.' 정작 대통령 박정희는 이 일로 선우휘를 높게 평가해 감사원장을 맡아 달라고 했으나, 그는 "들에 핀 꽃이 어여쁘다 해서 집 안에 옮겨 심으면 아름답겠느냐"는 시를 인용하며 고사했다.

한국 언론사와 문학사 양쪽에 큰 발자취를 남긴 선우휘는 평북 정주 출신으로 경성사범 본과에 수석 입학했고, 광복 후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 환멸을 느껴 월남했다. 이때부터 평생 "남한 사람들은 북한의 실상을 너무 모른다"며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고 한다. 1946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잠시 기자 생활을 하다 인천중 교사를 거쳐 1948년 정훈장교로 군에 들어갔다. 1·4 후퇴 때는 '적에게 이용당할 수 있으니 신문사 시설을 불태우라'는 작전명령을 받고 조선일보 윤전기 앞에 섰다. "일제 강압으로 폐간될 때 사원들이 이 윤전기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는 계초 방응모 선생의 얘기가 생각나면서 (역대 사장인) 이상재, 안재홍, 조만식 선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는 그는 윤전기 대신 활자판만 뒤엎었다.

군 복무 중 소설 '불꽃'을 발표해 동인문학상을 받은 선우휘는 1957년 대령으로 예편한 뒤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다시 조선일보에 입사한 것은 5·16 하루 전날인 1961년 5월 15일. 다음 날 출근길에 쿠데타 소식을 듣고는 곧장 육군본부로 가 소리쳤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쿠데타를 일으켰냐?" 이 일로 체포령이 떨어져 보름 동안 숨어 지냈고, 신문사에 돌아와서도 1년 동안 이름을 달지 않은 글만 쓰는 '유령 논설위원' 생활을 했다.

1963년과 1968년 두 차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선우휘는 1964년 8월 공화당이 언론윤리위원회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뒤 간부들과 함께 방일영 사장의 집을 찾아가 "신문사의 문을 열고 죽는 수가 있고, 문을 닫고 사는 수가 있다"며 윤리위 소집에 반대할 것을 호소해 관철하기도 했다.

1971년부터 9년 동안 조선일보 주필을 지냈고, 1980년 논설고문이 된 뒤 1986년 퇴임할 때까지 '선우휘 칼럼'을 썼다. 선우휘의 글은 지식인들의 큰 공감을 샀지만 직설적 내용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스스로 "욕 많이 들은 언론인으론 기네스북감"이라 자평하면서도 '쉬운 글이 좋은 글'이란 신념으로 독자들과 소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