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해리스 주한미국 대사가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던 콧수염을 깎은 것에 대해 외신들도 주목하고 있다. 그의 콧수염을 향한 여권(與圈) 지지자들의 공세가 “기괴하다(bizarre)”고 평가했다.

해리스 대사는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의 한 이발소를 방문한 영상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다. 영상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던 해리스 대사는 “마스크가 저를 더욱더 덥게 만들고 물론 제 콧수염도 그렇다”며 이발소로 들어가 콧수염 면도를 했다. 일본계 미국인으로 해군 제독 출신인 해리스 대사는 2018년 외교관이 되면서 이미지 변화를 주기 위해 콧수염을 길러왔다.

콧수염 면도 직후의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

해리스 대사는 면도를 한 이유에 대해 “콧수염을 기르고 마스크까지 착용하기엔 서울의 여름은 매우 덥고 습하다”며 “코로나 지침이 중요하니 마스크는 필수고,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온라인에선 해리스 대사가 콧수염 면도를 하기 전후 사진이 퍼지면서 화제가 됐다. 하지만 해외 유력 언론들은 단순히 ‘여름철 마스크’ 때문이라는 해리스 대사의 얘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해리스 대사의 콧수염은 한국에서 논란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여권 지지자를 중심으로 해리스 대사가 일본 혈통을 갖고 있다는 점과 함께 그의 콧수염이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을 연상시킨다는 비난이 나왔다.

◇ 美 언론 "기괴한 논란"

미 CNN은 27일(현지 시각) 해리스 대사의 콧수염과 관련해 발생한 사건들을 소개하며 “근래 미국 대사에 가해진 비판 중 가장 기괴했다”고 평가했다.

CNN은 “다인종 국가인 미국과 달리 단일 민족국가인 한국은 다인종 가족이 드물고 의외로 외국인 혐오가 만연해 있다”면서 한국인들이 해리스 대사를 ‘미국인’이 아닌 ‘일본계 미국인’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이어 “미국이었으면 사실상 인종차별로 여겨졌을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뉴욕타임스(NYT)도 27일(현지 시각) “해리스 대사가 외교적 긴장을 일으킬 수 있는 위협요소였음에도 2년간 유지해온 콧수염을 잘랐다”며 콧수염과 관련 사건들을 소개했다.

영국 BBC방송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조 히데키 등 일본군 지도자들이 해리슨 대사 스타일의 콧수염을 기른 것은 맞다”라면서 “학계에선 (해리스 대사 스타일의 콧수염이) 당시 국민당을 이끈 장제스 등 지역 지도자들 사이서 유행했다고 지적한다”고 전했다.

◇ 친북단체들이 만든 ‘콧수염 총독’ 이미지

작년 12월 13일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 대사관 인근에서 반미·친북 성향 단체인 국민주권연대와 청년당이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를 겨냥한 '참수(斬首) 경연대회'를 열고, 해리스 대사의 얼굴 사진 속 콧수염을 떼어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해리스 대사 콧수염을 두고 처음 포문을 열었던 것은 친북 성향의 단체들이다. 작년 12월 13일 국민주권연대와 청년당은 종로구 미국대사관 인근에서 ‘해리스 참수(斬首·목을 자름) 경연대회’를 개최해 해리스 대사의 얼굴 사진 속 콧수염을 떼어내는 퍼포먼스 등을 펼쳤다. 두 단체는 2018년 ‘백두칭송위원회’ 등을 결성해 ‘김정은 서울 방문 환영 행사’를 기획한 친북 성향 단체다.

이들은 행사를 여는 이유에 대해 “(해리스 대사가) 문재인 대통령을 종북 좌파라 하고, 주한 미군 지원금 5배 인상을 강요하며, 내정간섭 총독 행세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혈통이라는 점과 콧수염을 기르는 것을 연관지어 ‘총독’으로 비판한 것이다.

국민주권연대와 청년당은 당시 페이스북을 통해 이른바 ‘해리스 참수 생각 공모전’을 열면서 ‘해리스 X의 코털을 하나하나 뽑기’ ‘나무젓가락으로 해리스 X의 주리를 틀기’ 등을 예시로 들었다.

같은 날 북한의 대남선전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해리스 대사를 향해 “사실상의 현지(한국) 총독”, “남조선을 식민지로밖에 보지 않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 “일본 순사 갔다” “일왕에 훈장 받았나”… 여권(與圈)으로 이어진 ‘콧수염 공세’

작년 1월 해리스 대사가 대북 사업과 관련해 ‘한·미 공조’와 ‘제재 준수’를 강조하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해리스 대사를 집중 공격하고 나섰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 송영길 의원은 아침 라디오에 출연해 해리스 대사를 ‘조선 총독’에 빗대며 “태평양 함대 사령관을 했으니 외교에는 좀 익숙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라고 해 논란이 됐다.

당시 송 의원을 비롯해 당·정·청(黨政靑)이 ‘해리스 때리기’에 나서자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해리스 대사가 일본계 미국인인 점을 문제 삼아 험담했다. 여당 지지자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등에 “해리스는 일왕에게 욱일장 받고 부임했다” “코털이 일본 순사 같다”며 노골적인 비방을 했다.

◇ 해리스 “변화 위해 콧수염 길렀을 뿐”… 비난 여론엔 “불쾌하다”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점과 콧수염을 기르는 게 비난 대상이 되는 데 대해 당시 해리스 대사는 상당한 불쾌감을 토로했다. 특히 여권과 지지자들의 공세가 이어지자 해리스 대사는 “내가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한국) 언론, 특히 소셜미디어에서 비판받고 있다”면서 콧수염을 기른 이유를 “그저 변화를 원했다”고 해명했다.

그는 당시 “20세기 일제에 저항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콧수염을 길렀던 사람들이 있다”며 안중근 의사와 안창호 선생을 예로 들었다. 또 “나는 주한 일본 대사가 아니라 미국 대사다. 식민지 역사를 내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 “군 생활을 마친 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원했다. 하지만 키가 더 클 수도 없었고, 머리카락을 더 기를 수도 없었다. 다만 머리 앞의 콧수염은 기를 수 있어서 그렇게 했다”며 “(콧수염을 기르는 걸로 비난하는) 그것보다 더 사악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CNN은 ‘인종차별, 역사, 정치: 왜 한국인은 미 대사의 콧수염에 화를 내는가’라는 기사를 통해 “한국에 해리스 대사가 일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점을 문제 삼는 여론이 있다”며 “해리스 대사는 일본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라고 했다. 이어 “미국에서라면 그를 일본계 혈통이라 부르는 건 거의 분명히 인종차별로 여겨졌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아시아계 최초 미 해군 대장… 40년 軍 복무시절엔 면도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의 해군 대장 출신인 해리스 대사는 1956년 일본인 어머니와 미국 해군 장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이다. 미 7함대의 모항인 일본 요코스카(橫須賀)가 고향이다. 1978년 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6함대 사령관, 합참의장 보좌관, 태평양함대 사령관을 거쳐 지난 2018년 5월까지 태평양사령관을 지냈다. 40년 간 해군에 복무할 때는 면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2018년 7월 주한 미국대사에 부임했다.